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노아 레인 Oct 15. 2024

흑임자 시루떡

나의 외할머니들

 뱃고동 소리가 아주 작은 포구에 울려 퍼지면,

삼삼오오 아낙네들이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 모여든다.

성인 한주먹 크기의 소라를 담아서 리어카에 실기 위해서다.

그 아낙네들 중에서 제일 단단해 보이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외할머니다.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이 그냥 외할머니인 줄 알고 살았다.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함께 하셨던  그분은,

나의 두 번째 외할머니시다.


첫 번째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두 번째 외할머니는 엄마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외할머니와 성향이 전혀 다른, 두 번째 외할머니는

그렇게 외할아버지와,  딸 넷이 오롯이 남겨진 집에

오셨다고 한다.


첫 번째 외할머니는 6.25의 비극을 겪기 전까지는

목회하시는 외할아버지의 내조와, 딸 넷에게 공부와

자수까지 가르칠 정도로 현모양처 이셨다고 한다.


피란 가시던 날, 외할아버지는 천정을 뜯고

딸들의 소중한 물건들을

숨겨 놓은 후,  딸 둘만 데리고 섬으로 피란길에 오르셨고,

외할머니는 피란길에 오른 외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두 딸들과 남으셨다고 한다.

빨지산들이 외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외할머니를 데리고 간 이후로는,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딸 둘만 남겨진 집에 전쟁은 그렇게 처절한 아픔과 상처,

외할머니의 남은 삶마저 삼키고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외할아버지는 두 번째 외할머니를

그렇게 집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번째 외할머니와,

남겨진 딸 넷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두 번째 외할머니와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흔히 아는 외할머니상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셨다.

"외할머니!" 하고 부르면 다정한 대답은커녕

 "왜 왔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가 다반사여서 그저 빙빙 돌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그나마 다정해지는 때는,

 일 년에 몇 번 돌아오는 제사 때다.

집안에 큰일이나 제사가 있을 땐 외할머니는

꼭 흑임자 시루떡을 하신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킬 수 있을만한 크기의 시루에

방앗간에서 곱게 갈아 온 찹쌀가루를 깔고,

그 사이사이에 켜켜이 흑임자가루를 얹는다.

시루와 가마솥단지의 빈 공간을

밀가루와 물로 반죽해서 붙이면 준비는 끝이다.

한바탕 장작불이 제 몸을 불사르고 나면, 뿌연 수증기와 함께

까만 연필심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흑임자 시루떡이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낸다.


재단을 하듯이 열십자를 크게 몇 번 긋고 나면

큼지막한 목기 접시 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

그때가 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다.

외할머니는 "먹고 싶냐?" 하고 물으신다.

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얼른 대답한다.

제사가 끝나야 먹는데 조금씩만 먹어보라며 쓱 내미신다.


찹쌀의 쫄깃함과 흑임자의 고소함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그동안 외할머니가 어린 우리들에게 여과 없이

표현해서 느꼈던 서운함과,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무뚝뚝한 외할머니의 말투에 대한 불만도 그 순간은 다 녹아내린다.


세월이 흘러 두 번째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던 날,

우리는 그제야 외할머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냥 "외할머니!" 하고 불러만 보았지 외할머니의 이름이 '박선녀'라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선녀와 나무꾼'의 그 아름다운 선녀와는 거리가 먼,

남의 자식 넷을 거두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쩌다 포구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억척스러운 인생을 살다가신 분....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시루를 들여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던

나의 두 번째 외할머니와,

흑임자 시루떡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