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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아 레인 Oct 15. 2024

흑임자 시루떡

나의 외할머니들

 뱃고동 소리가 아주 작은 포구에 울려 퍼지면

삼삼오오 아낙네들이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 모여든다.

성인 한주먹 크기의 소라를 담아서 리어카에 실기 위해서다.

그 아낙네들 중에서 제일 단단해 보이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외할머니다.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이 그냥 외할머니인 줄 알고 살았다.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함께 하셨던  그분은

나의 두 번째 외할머니시다.


첫 번째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두 번째 외할머니는 엄마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외할머니와 성향이 전혀 다른 두 번째 외할머니는

그렇게 외할아버지와  딸 넷이 오롯이 남겨진 집에

오셨다고 한다.


첫 번째 외할머니는 6.25의 비극을 겪기 전까지는

목회하시는 외할아버지의 내조와 딸 넷에게 공부와

자수까지 가르칠 정도로 현모양처 이셨다고 한다.


피란 가시던 날, 외할아버지는 천정을 뜯고

딸들의 소중한 물건들을

숨겨 놓은 후  딸 둘만 데리고 섬으로 피란길에 오르셨고,

외할머니는 피란길에 오른 외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두 딸들과 남으셨다고 한다.

빨지산들이 외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외할머니를 데리고 간 이후로는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딸 둘만 남겨진 집에 전쟁은 그렇게 처절한 아픔과 상처,

외할머니의 남은 삶마저 삼키고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외할아버지는 두 번째 외할머니를

그렇게 집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번째 외할머니와

남겨진 딸 넷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두 번째 외할머니와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흔히 아는 외할머니상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셨다.

"외할머니!" 하고 부르면 다정한 대답은커녕

 "왜 왔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가 다반사여서 그저 빙빙 돌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그나마 다정해지는 때는

 일 년에 몇 번 돌아오는 제사 때다.

집안에 큰일이나 제사가 있을 땐 외할머니는

꼭 흑임자 시루떡을 하신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킬 수 있을만한 크기의 시루에

방앗간에서 곱게 갈아 온 찹쌀가루를 깔고,

그 사이사이에 켜켜이 흑임자가루를 얹는다.

시루와 가마솥단지의 빈 공간을

 밀가루와 물로 반죽해서 붙이면 준비는 끝이다.

한바탕 장작불이 제 몸을 불사르고 나면 뿌연 수증기와 함께

까만 연필심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흑임자 시루떡이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낸다.


재단을 하듯이 열십자를 크게 몇 번 긋고 나면

큼지막한 목기 접시 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

그때가 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다.

외할머니는 "먹고 싶냐?" 하고 물으신다.

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얼른 대답한다.

제사가 끝나야 먹는데 조금씩만 먹어보라며 쑥 내미신다.


찹쌀의 쫄깃함과 흑임자의 고소함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그동안 외할머니가 어린 우리들에게 여과 없이

표현해서 느꼈던 서운함과,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무뚝뚝한 외할머니의 말투에 대한 불만도 그 순간은 다 녹아내린다.


세월이 흘러 두 번째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던 날,

우리는 그제야 외할머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냥 "외할머니!" 하고 불러만 보았지 외할머니의 이름이 "박선녀"라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선녀와 나무꾼"의 그 아름다운 선녀와는 거리가 먼,

남의 자식 넷을 거두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쩌다 포구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억척스러운 인생을 살다가신 분....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시루를 들여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던

나의 두 번째 외할머니와

흑임자 시루떡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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