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고동 소리가 아주 작은 포구에 울려 퍼지면,
삼삼오오 아낙네들이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 모여든다.
성인 한주먹 크기의 소라를 담아서 리어카에 실기 위해서다.
그 아낙네들 중에서 제일 단단해 보이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내 외할머니다.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이름도 모르고,
이름이 그냥 외할머니인 줄 알고 살았다.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함께 하셨던 그분은,
나의 두 번째 외할머니시다.
첫 번째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두 번째 외할머니는 엄마와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외할머니와 성향이 전혀 다른, 두 번째 외할머니는
그렇게 외할아버지와, 딸 넷이 오롯이 남겨진 집에
오셨다고 한다.
첫 번째 외할머니는 6.25의 비극을 겪기 전까지는
목회하시는 외할아버지의 내조와, 딸 넷에게 공부와
자수까지 가르칠 정도로 현모양처 이셨다고 한다.
피란 가시던 날, 외할아버지는 천정을 뜯고
딸들의 소중한 물건들을
숨겨 놓은 후, 딸 둘만 데리고 섬으로 피란길에 오르셨고,
외할머니는 피란길에 오른 외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두 딸들과 남으셨다고 한다.
빨지산들이 외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외할머니를 데리고 간 이후로는,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딸 둘만 남겨진 집에 전쟁은 그렇게 처절한 아픔과 상처,
외할머니의 남은 삶마저 삼키고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외할아버지는 두 번째 외할머니를
그렇게 집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다고 한다.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번째 외할머니와,
남겨진 딸 넷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두 번째 외할머니와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우리가 흔히 아는 외할머니상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셨다.
"외할머니!" 하고 부르면 다정한 대답은커녕
"왜 왔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가 다반사여서 그저 빙빙 돌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그나마 다정해지는 때는,
일 년에 몇 번 돌아오는 제사 때다.
집안에 큰일이나 제사가 있을 땐 외할머니는
꼭 흑임자 시루떡을 하신다.
갓난아이를 목욕시킬 수 있을만한 크기의 시루에
방앗간에서 곱게 갈아 온 찹쌀가루를 깔고,
그 사이사이에 켜켜이 흑임자가루를 얹는다.
시루와 가마솥단지의 빈 공간을
밀가루와 물로 반죽해서 붙이면 준비는 끝이다.
한바탕 장작불이 제 몸을 불사르고 나면, 뿌연 수증기와 함께
까만 연필심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흑임자 시루떡이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낸다.
재단을 하듯이 열십자를 크게 몇 번 긋고 나면
큼지막한 목기 접시 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
그때가 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다.
외할머니는 "먹고 싶냐?" 하고 물으신다.
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네!" 하고 얼른 대답한다.
제사가 끝나야 먹는데 조금씩만 먹어보라며 쓱 내미신다.
찹쌀의 쫄깃함과 흑임자의 고소함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그동안 외할머니가 어린 우리들에게 여과 없이
표현해서 느꼈던 서운함과,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무뚝뚝한 외할머니의 말투에 대한 불만도 그 순간은 다 녹아내린다.
세월이 흘러 두 번째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던 날,
우리는 그제야 외할머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냥 "외할머니!" 하고 불러만 보았지 외할머니의 이름이 '박선녀'라는 사실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선녀와 나무꾼'의 그 아름다운 선녀와는 거리가 먼,
남의 자식 넷을 거두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쩌다 포구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억척스러운 인생을 살다가신 분....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면,
시루를 들여다보며 환한 미소를 짓던
나의 두 번째 외할머니와,
흑임자 시루떡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