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수열이 아빠는 평소에는 점잖으신데 술만 마시면 수열이 일가족을 집밖으로 내쫓으시는 게 다반사다.
심지어 새벽녘에도 발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어 보면 어김없이 수열이 엄마와 삼 남매가 서 있다.
그 정도로 술을 좋아하셨지만, 평상시에는 성실하시고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특별히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드디어 수열이 아빠가 사루비아를 새 창호지에 붙이고 조각을 덧대서 완성시켜 놓는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옆으로 퍼진 맨드라미 보다, 기다랗게 세로로 꼿꼿이 서 있는 사루비아가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나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뒷동산에서 왜 안 놀고 그새 오냐며 웃으시는데,
난 아빠에게 사루비아를 넣어 달라고 졸랐다.
아빠는 역시나 웃으시며 얼른 꺾어 오라고 하신다.
공교롭게도 그날밤은 비바람이 한바탕 흩뿌리는지,
문풍지가 밤새 제 몸을 떨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난 무서워서
이불속을 파고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밤새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눈부시다.
창호지 문에 비친 햇살이 눈부셔서
제대로 눈이 안 떠지는 상황에서,
창호지 베일을 쓰고 내려다보고 있는 '사루비아'와 '맨드라미'가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뒷동산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수열이다!"
눈곱도 제대로 안 뗀 채로 뒷동산에 올라
창호지에 비친 꽃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또 산골 아이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매일 반복되는 봉분을 타고 놀기, 메뚜기 잡기, 소나무에서
뛰어내리기, 닭싸움이지만 지루할 틈이 없고,
집집마다 밥 먹으라는 엄마들의 부름을 받아야만이
아쉬움을 남기며 집으로 돌아간다.
아주 오랜만에 뒷동산에 올랐다. 어릴 적엔 그래도 오른다는 표현이 어느 정도 맞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작은 언덕일 뿐이다. 잡초만 무성한 그곳엔 변한 건 없고,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소나무 세 그루와, 외롭다 못해 처량한 봉분 하나가 지키고 있을 뿐이다. 단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삶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다. 뒷동산을 찾아 간 시간대만 다를 뿐,그들도 가끔씩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뒷동산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