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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아 레인 Oct 22. 2024

뒷동산을 찾는 사람들

그곳은 항상 따뜻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뒷동산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잠에서 덜 깬 내게 엄마는 "시끄러워 죽겠다! 빨리 나가 보아라, 어린 게 잠도 없지!"

약간의 짜증 섞인 말을 하신다.

알람시계처럼 날마다 거의 똑같은 시간에 나를 부르는 소리는 다름 아닌,

"옆집 아이, 수열"이다.

수열이는 나와  살 터울의 남자아이로, 매번 반말 섞인 말투로 놀다가도

순간 토라져서 집으로 쪼르르 가버리기 일쑤지만,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부터 놀자며 보채는 아이다.


"동산"이라고 해봐야 봉분 하나가 버티고 있고, 작은 소나무 세 그루가 있을 뿐인데,

우리는 "뒷동산"이라고 불렀다.

그 뒷동산은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면,

어느새 시끌벅적해진다.

오빠들은 하모니카도 불고, 나이 어린 우리들은

놀이라고 해봐야 닭싸움, 소나무에 매달렸다 뛰어내리기, 메뚜기가 한창인 계절엔

메뚜기 잡기가 거의 다반사지만, 뭐가 그리 즐거운지

 뒷동산에서는 하루가 짧기만 하다.


유난히도 햇살이 좋은 어느 가을날,

 아빠는 아침부터 분주하시다.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다 뜯어다 마당 한편에 뉘어 놓으신다.

창호지를 바르는 날이란 걸 바로 알 수 있다.

아빠는 화단에 가서 맘에 드는 꽃을 꺾어 오라고 하신다.

나는 부채처럼 생긴 "맨드라미"를 꺾어서 아빠한테 내미니,

투박한 맨드라미를 손으로 꾹꾹 눌러 창호지 위에 얹고,

 작은 조각을 덧대서 문고리 옆에 붙이신다.

자줏빛 맨드라미가 창호지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왔는지 등뒤에서 수열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도 창호지 바르고 있는데..."

나는 얼른 뒤돌아 보며 "너네 집은 무슨 꽃 넣었어?" 말하니

수열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사루비아"하는거였다.

난 순간 "와! 예쁘겠네! 얼른 가보자!"

수열이는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장섰고,

나는 주황색 사루비아가 창호지 속에서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수열이네 앞마당 역시 뜯어 놓은 문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수열이 아빠는 아직 덜 떨어진 묵은 창호지를

떼어 내면서 수열이를 향해

"그새 갔다 왔냐?" 하시며 꺾어 놓은 사루비아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화단 한편에 일렬로 나란히 누워서 대기하고 있는

주황색 사루비아 역시

가을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다.

수열이는 잽싸게 가져다 드리면서 "아빠! 누나네는 맨드라미 넣었어요"라고 말한다.

수열이 아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맨드라미는 여간 넣기 힘들 텐데"하시면서도

"너네 아빠는 뭐든지 안된다는 게 없는 양반이라.." 하시며 말끝을 흐리신다.


사실 수열이 아빠는 평소에는 점잖으신데 술만 마시면 수열이 일가족을 집밖으로 내쫓으시는 게 다반사다.

심지어 새벽녘에도 발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어 보면 어김없이 수열이 엄마와 삼 남매가 서 있다.

그 정도로 술을 좋아하셨지만, 평상시에는 성실하시고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특별히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드디어 수열이 아빠가 사루비아를 새 창호지에 붙이고 조각을 덧대서 완성시켜 놓는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옆으로 퍼진 맨드라미 보다, 기다랗게 세로로 꼿꼿이 서 있는 사루비아가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나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뒷동산에서 왜 안 놀고 그새 오냐며 웃으시는데,

 난 아빠에게 사루비아를 넣어 달라고 졸랐다.

아빠는 역시나  웃으시며 얼른 꺾어 오라고 하신다.


공교롭게도 그날밤은 비바람이 한바탕 흩뿌리는지,

문풍지가 밤새 제 몸을 떨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난 무서워서

이불속을 파고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밤새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눈부시다.

창호지 문에 비친 햇살이 눈부셔서

제대로 눈이 안 떠지는 상황에서,

창호지 베일을 쓰고 내려다보고 있는 "사루비아"와 "맨드라미"가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뒷동산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수열이다!"

눈곱도 제대로 안 뗀 채로 뒷동산에 올라

 창호지에 비친 꽃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산골 아이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매일 반복되는 봉분을 타고 놀기, 메뚜기 잡기, 소나무에서

뛰어내리기,  닭싸움이지만 지루할 틈이 없고,

집집마다 밥 먹으라는 엄마들의 부름을 받아야만이

 아쉬움을 남기며 집으로 돌아간다.




아주 오랜만에 뒷동산에 올랐다. 어릴 적엔 그래도 오른다는 표현이 어느 정도 맞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작은 언덕일 뿐이다. 잡초만 무성한 그곳엔  변한 건 없고 아이들이 떠나간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소나무 세 그루와 외롭다 못해 처량한 봉분 하나가 지키고 있을 뿐이다. 단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 각자의 자리에서  삶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다. 뒷동산을 찾아 간 시간대만 다를 뿐,  그들도 가끔씩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뒷동산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엄마품처럼 항상 따뜻하고 편안한 그 뒷동산이  있어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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