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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termelon Oct 10. 2024

미리 매를 맞으러 법무팀에 올라간 AE차장

계약서 법무 검토, 그리고 내부 품의 절차

광고회사 기획팀과 가장 성격이 다른 팀은 법무팀인 것 같다.

광고회사의 기획팀은 광고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관리하고 주도한다.

그 과정에서 계획대로 되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적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안된다는 건 알지만,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불가능한 일정이지만, 더 빠르게 작업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내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다.

예외적인 상황이 일상이 되어, 이것이 특수하고 예외적이었다는 것을 까먹게 된다.


유연하게 어떻게든 일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 AE와 달리,

융통성을 부리면 안 되는 팀이 있다.

바로 법무팀.


광고주의 요청으로 영상을 만들게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광고주는 이 영상을 만들고 자사 채널에 업로드는 하되, 광고를 집행할지는 아직 내부적으로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와 광고대행계약서가 아닌 단건의 영상물제작계약서를 체결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예상이 되었다.

광고주의 요청대로 영상물제작계약서를 체결해서 법무 검토를 받으러 올라가면, 법무팀 팀장님이 반대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 회사는 단순히 영상물을 제작하는 프로덕션이 아니다.

종합광고회사이다.

그렇기에 광고를 제작하고, 그 광고를 집행해서, 매체 수수료로 먹고사는 회사이다.

그런데 광고 집행 여부가 결정되지 않는 영상을 제작한다?

그래서 광고 집행이 결국 결정되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우리랑 광고 집행할 건가?

아마 광고주 담당자는 이 모든 것에 확답을 주기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광고대행계약서가 아닌 단건의 영상물제작계약서를 작성하자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가장 먼저 법무팀을 만났다.

영상물제작계약서 포맷은 나도 있다. 그냥 보내면 된다.

그런데 굳이 올라가서 이 상황을 설명했다.

역시 법무팀은 광고를 집행하게 되었을 때, 우리 회사에 의뢰한다는 조항을 추가하자고 주장했다.

그러기엔 어렵다고 설득했다.

설득 끝에 우리 회사에 의뢰한다가 아닌, 우리 회사와 합의하에 광고를 집행한다는 조항으로 바꿨다.


그렇게 바꿔서 광고주에게 계약서를 보내니 역시 반응이 좋지 않았다.

광고주가 애초에 영상물제작계약서를 작성하자고 요청한 이유가 그러했기 때문.

광고주는 물론 우리 팀장님도 굳이 꼭 그렇게 해야겠냐고 하셨다.


하지만 난 정석의 절차를 밟았다.

광고주 법무팀의 회신을 받아, 우리 법무팀에 가지고 올라갔고, 해당조항을 합의에서 협의로 다시 한 단계 낮춰서 보냈다. 사실 법률적으로 이 조항이 있고 없고 가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다.

만약 광고주가 우리가 만든 영상으로 비밀리에 광고를 집행했고

그게 비밀이 되지도 않지만, 추후 우리가 알게 되어, 해당 제작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매체 수수료의 일부를 지급하라고 요구할 때, 계약서에 이 작은 조항이 있고 없고는 사실 큰 논점이 아니다.

당연히 주장해야 하는 권리이고, 우리는 업계 관행에 따라 매체 수수료의 70%에 해당되는 몫을 받아야 한다. 물론 그렇게 법률적으로 싸우게 되면, 앞으로 그 광고주와 다시 원활하게 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나의 설득력과 광고주의 합리성을 믿고, 한 번 더 수정된 계약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협의'라는 작은 단어를 유지한 채 그 계약서에 날인했다.

법무팀과 사전에 미리 협의한 덕분에 계약서 날인 내부 품의는 수월하게 승인되었고,

전날 회사 회식에서 대표님께 법무팀 팀장님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채, 이미 이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사전에 얼마나 여러 번 조언을 구했고, 회사의 이익과 입장을 충분히 고려했는지 어필해 줬기에 대표님도 바로 결재해 주셨다.


계약서 하나 보내기까지

몇 건의 메일이 내부에서 왔다 갔다 했고

이 일로 몇 번이나 위에 올라가 설득하고 얼굴을 붉혔지만

결국 이 일로 법무팀 팀장님은 나를 좋게 봤고, 신뢰할 수 있는 AE 담당자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법무팀이 FM대로 일해야 하는 팀인 건 맞지만, 미리미리 만나면 우리도 대안을 같이 세울 수 있는 팀이라며, 일이 터지고 나서가 아니라, 미리 법무팀의 입장을 예상하고 반대할 것을 알면서도 상의하러 올라와주는 AE가 고맙다고 말씀 주셨다.


미리 말씀드리고 상의드렸기에 책임을 같이 나눠주실 분들이다.

기획팀은 일이 되게 만들려고 하는 건데, 법무팀은 고리타분하게 안된다고만 하는 방해꾼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마음에 세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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