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에 소원을 빈 친구가 4명 있는데 모두 결혼했잖아요. 저도 처음엔 안 믿었는데, 어느 날 ‘한번 빌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간절히 빌어봤어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민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뚫어져라 봤다. 그녀가 "그림이 정말 뭔가 부적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아요?" 하는데 그래 보였다.
퇴근 후 M의 개업식에 갔다. 게스트하우스를 하는 그는 옛 직장 동료다. 마당발인 M이 파티를 열면 언제나 국적, 나이, 성별 불문 다양한 손님이 모인다. 모르는 사람끼리 모여서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먹고 마신다. 그래서 그가 주선하는 모임에 갈 때는 생면부지 사람들과 먹고 대화할 각오를 하고 가야 한다. 그 때문에 그와 친분 있는 사람들과 같이 가려고 했는데 다들 일정이 안 된다고 해 할 수 없이 혼자 갔다. 뭐 회사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업무 얘기를 하듯, 행사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명함 교환하고 스몰토크(small talk) 하듯 그렇게 대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좀 어색할 뿐.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지도 앱을 켰다. 주택가 골목에서 집을 찾으려면 지도가 필수다.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났다. 그 집으로 향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M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여기구나!’ 열린 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거실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재미나게 얘기하고 있었다. 부엌 옆 식탁에는 뷔페처럼 음식이 즐비하게 놓였는데 국적만큼 음식 종류도 다양했다. 다들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씩 가져오는 포틀럭(potluck) 파티답게 크래커와 치즈, 직접 만들었다는 프랑스식 체리파이, 샐러드, 올리브, 토르티야, 스콘, 빵, 닭볶음탕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했다. 난 가장 무난한 치킨을 사 갔다.
앉을자리가 부족해서 음식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목 인사, 눈인사를 나누고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을 조금씩 다 맛봤다. 거기에 더해 마시지 않으려던 결심을 깨고 레드와인도 한잔했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안 마시겠다고 계속 거절하기 힘든 데다, 좀 마시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가 어려웠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포도주를 좋아한다. 그런데 한 잔 마시면 얼굴이 빨개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 병 마신 줄 안다. 욕심내어 두 잔을 마시면 온몸이 새빨개지고 취한다. 그래서 늘 아쉽다. 더 마시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먼저 말 붙이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냥 조용히 먹으며 ‘두 시간쯤 있다가 일어나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이미 앉아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일어나 2층을 구경한다고 갔다. 잠깐 사이 테이블에 혼자 남았다. 어색하지 않게 있겠다는 자신감은, 좀 떨어진 상태였다. 그때, 한 여성이 등장했다. M이 내가 앉은 테이블로 안내하여 동석했다. 그는 그녀가 "자유로운 영혼,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그에게 "오빠야말로 나의 롤모델"이라며 둘이 주거니 받거니 칭찬했다. 그는 내 주변 인물 중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적 감각을 지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 저런 끼를 숨기고 어떻게 회사생활을 했었을까 싶은 사람. 하지만 조직 생활도 제법 잘했던 사람. 다행히 둘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었다.
그녀는 왼 손가락에 낀 반지를 들어 보였다. M은 "프러포즈받았어?"라며 놀라워했다. M은 그녀가 남자 친구를 만나러 프랑스에 다녀왔다며 배경 설명을 해 줬다. 그 사이 M의 춤 동호회 사람이 도착하여 그 남자도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M은 전혀 모르는 우리 셋을 남겨두고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가버렸다. 그녀는 그에 굴하지 않고, 활달한 성격답게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된 경위를 소상히 알려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났다. 그러면서 남자 친구의 부모님과 인사하고, 둘의 관계가 반지로 얽혔음에도 아직 결혼 확신은 없다며 밝게 웃었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마흔 넘긴 여자가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제한적이란 걸 깨닫고,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를 알아보고, 따라 했다고 한다. 결혼을 위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실행한 그녀는 이 모든 놀라운 일의 발단이 어떤 그림에서 시작된 거라며 갑자기 '그림 예찬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이 정말 효험 있어요." 그녀는 휴대전화 속 그림을 보여주며 아주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영험하여 그 기운이 그림에 깃들었다고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예의 그 춤 동호회 남자가 불쑥 말했다. “그 그림 어디 가면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얘기에 푹 빠져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질문인 듯했다. 둘 다 순간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먼저 그녀가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화가 집이 경기도 부근인데 여기서 가긴 조금 멀다고 했다. 하지만, 먼 거리가 문제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 집에 그림 보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그 단순한 사실을 곧 깨닫더니 “그 그림, 사진이라도 찍게 보여주실래요?”라고 했다. 그녀가 흔쾌히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직접 보고 비는 것만 못하겠지만, 간절한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냐면서. 그 남자가 실내 불빛에 반사되지 않게 아주 신중하게 휴대전화 속 그림을 찍었다. 사진을 정성껏 찍는 남자를 보니 나도 찍고 싶었다. 결혼할 생각은 이제 딱히 없지만, 짝을 만난 사람의 얘기는 언제 들어도 신기하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는지, 커플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얘기를 듣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연애 얘기는 매번 흥미롭다. 특히 그녀의 얘기는 흡인력이 강했다. 얘기 자체도 그렇지만 그녀가 말을 참 맛깔나게 잘했다. 그 힘에 이끌려 ‘혹시 저 그림에 빌면 나도 남자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혹하는 마음이 일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휴대전화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찍으실래요?”
그녀가 짝을 만난 일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노력한 결과인지, 그림이 영험하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알 길 없다. 하지만, 믿음과 행동 그 둘의 시너지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시크릿(Secret) 책에서 간절함은 온 우주의 기운을 불러 모은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결혼 시장에서 나이 많은 여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에 주저앉지 않고, 원하는 사람을 찾아 나선 그 행동력과 용기가 부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사람을 만난 그녀가 행운아처럼 보였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맞다. 나도 한때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한 적 있지만, 그녀만큼은 아니었다. 그때는 더 이상 노력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국제결혼 해도 좋다고 생각한 적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선 적 없다. 항상 ‘짝이 있을 운명이라면 만나겠지’ 하는 운명론과 안일함 사이에 있다. 그래서 그녀가 강력히 추천한 ‘남자를 만날 수 있는 앱’은 귓등으로 흘렸다. 평생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절실하지 않다. 절실하지 않지만, 짝 있는 사람은 부럽다. 혼자인 게 불행하지 않지만, 짝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쉰 넘은 나이에 짝을 만날 거라는 기대가 무척 낮지만, 혹시나 한다.
그녀가 건넨 그림의 사진을 찍었다. 때마침 M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 셋이 웃고 얘기하는 사이에 나는 내 휴대전화 속 그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