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2
햇빛이 따스한 봄날, 그것도 주말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다. 그래서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여도 거주지와 생활반경을 벗어날 수 있어 즐거웠다. 남산 아래 피크닉(picknic)에 다녀왔다. 재미있는 전시를 많이 하는 곳인데 이번에 <희곡극장>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을 낭독하는 것으로 <양손 프로젝트>가 공연한다. 네 편의 희곡낭독을 모두 보고 싶었지만 시간 상 두 편만 보게 되었는데 오늘 그중 한편을 봤다.
부조리극의 대표주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두 번 보고 조금 이해했는데 역시 오늘 낭독한 <해피데이즈(Happy Days)>도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다. 아니 낭독이 아니라 연극으로 봐야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피데이즈>는 2인극이지만 거의 1인극에 가깝다. 허리까지 파묻힌 여주인공의 상황은 불가항력적 상황에 놓인 사람을 상징한다. 흙에 파묻힌 채로 아침에 눈을 뜬 여주인공 '위니'는 어제보다 나빠지지 않은 상황을 감사하고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될 거라고 말한다. 언덕 아래 누워있는 남편 '윌리'에게 말을 걸고 혼잣말을 하며 일상의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낙천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문득문득 불안하고 절망적인 마음이 싹트는 것을 막을 수 없다. 2막에서는 목까지 흙에 잠겨 눈만 껌뻑이게 된다. 사지를 쓸 수 없는 상황. 1막에서처럼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될 거라고 하지만 '위니'의 희망은 절망에 가까운 말이 된다.
중간에 좀 졸았다. 고개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앞으로 확 젖혀졌다가 숙여졌다. 그때마다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고 손을 움직이며 잠들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주인공처럼. 잠이 서서히 깬 후 관람객의 표정을 둘러봤는데 나처럼 조는 사람이 몇 명 있어 안심했다. 장소가 공연장이 아니어서 방음이 잘 되지 않고 조명도 없었다. 실내조명을 활용했을 뿐. 그래서인지 음악이 나오는 것인지, 밖의 소리가 들어오는 것인지 처음에 헷갈렸다. 객석은 무대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의자를 배치했는데 세어보니 50~60명이 되는 것 같았다. 적은 규모의 객석이 꽉 찼다. 아마도 <양손 프로젝트>의 공연을 믿고 보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처음이다)
관람 후 극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단순히 읽기만 한 낭독극이 아니라 배우의 표정과 대사톤을 연극처럼 그대로 보여주어 재미가 있었다. 신선한 체험이었다. 수요일에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을 본다. 역시 <양손 프로젝트>의 낭독극이다. 토요일 낮 공연을 졸아서 수요일 저녁 공연을 졸지 않고 볼 수 있을지 걱정이다. 퇴근 후라 더 피곤할 수도 있기에. <엔드게임>역시 부조리극이다.
인터넷으로 부조리극이 무엇인지 읽고 나니 요즘 사회 모습과 겹쳐져 이해된다. 방향과 탈출구를 잃은 작금의 사회 모습이. 부조리한 세상에 불확실성은 커지고 인간은 더 모순적이고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이 각자의 서사를 배경으로 사건을 대하는 것만으로는 이 부조리한 사회를 표현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얘기하기에는 부조리극이 더 적합한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