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와 6차 레이오프 그 어딘가
건축 설계업계에서 중국 시장은 오랫동안 '거대한 기회'로 여겨져 왔다. 천문학적인 스케일의 프로젝트들이 넘쳐났고, 국가 차원의 도시 개발 정책 덕분에 수십 개의 신도시가 동시에 탄생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도 한계가 있었다. 현상 설계에서 당선이 되어도, 계약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심지어 프로젝트가 진행되다가도 정부 정책 변화나 금융 문제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사들이 중국 시장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다른 시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들과 프리미엄 가격이었다. 중국 클라이언트들은 서구 건축회사들에게 높은 설계비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러한 황금기를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누려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약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프로젝트들의 진행 속도가 늦춰졌다. 그리고 이 변화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업계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그러던 와중, 중동 시장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대형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개발이 동시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2030 리야드 엑스포를 위한 초대형 마스터플랜이 시장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5차 레이오프의 시발점이 되었다. 우리는 중동 클라이언트들의 자금력이 압도적이라는 점을 믿었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대규모 인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클라이언트 측에서 단 한 통의 이메일로 프로젝트 전격 중단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중동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을까? 아니면 리스크 관리의 실패였을까? 무엇보다도, 위약금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약을 파기할 만큼 클라이언트들에게는 돈이 많았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들에게는 한두 개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시장 전체를 흔들어버릴 힘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을 과소평가했다.
5차와 6차 레이오프는 차이가 없을 정도로 연달아 발생했다. 국내 라이프 사이언스 오피스 프로젝트들이 무기한 설계 중단 소식을 전해왔다. 이 프로젝트들은 코로나 시기를 중심으로 '유일하게 성장하는' 섹터라는 인식이 강했고, 우리 1실 디렉터는 무려 전체 인원의 3/4를 투입하여 한 회사를 대상으로 3개 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프로젝트들이 연이어 중단되면서, 그 규모는 되레 조직의 위기로 돌아왔다.
팀 미팅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모두의 표정이 어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팀이 해체되고 인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캐시가 나오는 실시 설계 인원들만 보호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앞으로 있을 현상 설계들에 투입될 인력이라는 점, 그리고 필요시 실시 설계에도 투입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역할이 다방면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 시점부터 회사의 구조와 운영 방식을 철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누가 남고 누가 나가는지, 어떤 프로젝트가 보호받고 어떤 프로젝트가 위험한지, 그리고 회사 내에서 '키맨'이란 어떤 존재인지.
살아남는 사람의 법칙
이 시점부터 15-20년 차의 직원들도 하나둘씩 레이오프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가장 보호받는 층이 10년 이상 근속한 직원들이지만, 이제는 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회사에서 받는 연봉이 높아질수록, 구조조정의 1순위가 되는 모습이었다. 회사의 관점에서 보면, 비용 대비 효율성을 따지는 것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수십 년을 바쳐 일했던 조직에서 하루아침에 밀려나는 일이었다.
반대로, 리스크 관리에서 명백한 실수를 한 디렉터들은 승진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같지만, 키맨은 죽지 않는 법이다. 키맨이란, 실수를 해도 회사에서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프로젝트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키맨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오프에서 살아남는 3가지 전략
단순한 역할을 넘어, 회사가 필요로 하는 사람 되기
회사가 구조조정을 할 때, 가장 먼저 내보내는 사람들은 특정 역할에만 국한된 경우가 많다. 설계만 할 줄 알고, 그 외의 업무는 못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나는 현상 설계뿐만 아니라, 실시 설계에서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내 역량을 넓혀 갔다. 더불어,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 프레젠테이션, 일정 조정 등도 직접 담당하면서 프로젝트 내에서 '필수적인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프로젝트의 흐름을 읽고, 미리 움직이기
프로젝트가 중단될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팀이 해체될 조짐이 보이면, 다음 프로젝트를 찾고, 필요한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중동 프로젝트가 위험하다는 신호가 나오자마자, 국내 프로젝트의 기회를 모색했다. 이를 통해 하나의 프로젝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에 걸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회사의 비공식적인 네트워크 활용하기
회사 내에서 공식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인간관계도 중요하다. 나는 디렉터 및 주요 팀원들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했다. 단순히 친분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회사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결국, 살아남는 자만이 생존한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회사의 구조를 이해하고,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며, 회사가 '놓치고 싶지 않은 인재'로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조직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조직이 보호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인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