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없는 에노시마[江ノ島](1)

by GIMIN

유카타[浴衣]를 입은 중국인 남자 곁에서 투명한 모금통이 비를 맞았다. 안에 든 동전이 얼룩덜룩한 녹처럼 보였다. '고양이 펀드'라고 일본어로 쓴 판자가 앞에 붙은 걸 보니 고양이 복지를 위한 기금 마련용으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엄마와 나는 잠시 문어 센베를 파는 상점 앞에서 서성댔다. 머리띠를 두른 남자 종업원 둘이 두세 군데 열린 창을 통해 줄 선 손님에게 센베를 나눠줬다. 맨 왼쪽 창문 바로 옆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라고 써진 깃발이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에 젖은 채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은 감기가 걸릴 수 있었기에 애써 참았다. 나는 점심식사를 하고 온 식당에서 파는 멜론소다 플로트를 떠올렸다. 콧잔등이 더할 나위 없이 시큰했다.





신주쿠[新宿]에서 에노시마[江の島]로 가는 직행열차를 토요일 아침에 탔다. 오다큐[小田急] 신주쿠[新宿] 역에 도착한 지하철에 일찌감치 올라탔다. 구름 낀 날씨도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날씨는 생각보다 더 흐렸다. 한 잿빛 구름이 다른 잿빛 구름과 한데 엮이며 푸른 하늘을 틀어막았다.


카타세에노시마[片瀬江ノ島] 역의 표지판을 보다가 창 유리에 그어진 빗물을 봤다. 집들이 저마다의 어두운 울타리를 앞장 세웠다. 창유리에 붙은 빗방울이 몇 개 더 그어졌다.


때마침 거의 맨 뒤에 탔기 때문에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한참 걸어야 했다. 빗발이 제법 거세졌다.


비에 젖은 바람 때문인지 바닷바람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역사의 사진은 찍어야겠다 싶어 일단 핸드폰 카메라로 표지판을 찍었다. 엄마와 나는 천천히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개찰구를 통과할 때 삑 하는 알림과 철컥거리는 기계음이 가볍게 들리고, 표시판에 부착된 잔액과 요금이 잠깐 표시되다 사라졌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역 앞 광장에서 점점 흩어졌다. 처마 밑에서 내리는 비를 보던 나는 바로 옆에 있는 페미리마트에서 우산을 사 오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우산을 쓰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 우산을 받았다. 빗방울은 웅덩이에 수많은 파문을 던져 넣었다.


편의점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들고 계산하거나, 우산과 더불어 먹을 것을 계산하기 위해 줄 서 있었다. 계산하기 위한 줄이 어느새 두 줄로 늘어났다. 계산원은 모두 여성이었는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웅덩이 첨벙거리는 소리와 자동문 열리는 소리에 자주 묻혔다. 나는 이내 몇 자루 안 남은 투명 우산 중에서 하나를 집었다.


왜 하필 오늘 이렇게 비가 오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괜히 심통이 난 나는 산 우산을 쓰지 않고 엄마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엄마는 왜 우산 쓰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말을 얼버무리기에 급급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도, 화를 내는 일 자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의 이성은 아직 남아있었다.






우산은 생각보다 컸다. 1단이라서 그런지 두툼한 옷과 배낭을 멘 내가 완전히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원단이 넓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싸구려 우산인 것을 증명하듯, 우산살을 잡는 팁이 삐걱대는 게 둔한 손가락으로 잡은 손잡이를 통해서도 미세하게 느껴졌다. 받침살 또한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우산 너머에 있는 하늘과 빗방울들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장점이랄까.


역사에서 섬으로 가는 도로 옆 파출소까지 가려면 일단 바로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엄마와 나는 다리를 건너며 저 멀리 있는 에노시마[江ノ島]를 바라보았다. 날이 흐렸지만 섬은 초록빛을 겨우겨우 뿜어냈다. 겨울임에도 제법 울창한 숲이 섬을 감쌌다. 어두운 녹색 날개를 한 어미새가 섬이란 둥지를 자신의 넓은 날개로 감싸주며 비를 맞는 것 같았다.


이따금 보이는 회백색 요트 돛대들이 여기가 레저 휴양지라는 사실을 은근히 알려줄 뿐이었다.


다리 가운데에 네 개의 뼈대가 돔을 이루고 있는 구조물이 달려있었는데 중앙에는 모로 누운 자세를 한 사람의 동상이 자그맣게 있었다. 데포르메가 강조된 동상이었다. 엄마와 나는 뭐 이런 동상이 다 있냐며 함께 슬며시 웃었다.


추운 날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장갑 속의 체온처럼 마음이 흐뭇했다.





다리를 다 건너고 파출소로 오자, 그제야 레스토랑이라든가, 카페라든가, 관광 안내소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버거집도 눈에 들어오고 붉은 기와지붕이 이색적인 경양식집도 눈에 들어왔다. 몇몇 외국인들은 벌써 그 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새삼 여기는 여름에 오는 곳이라는 말을 꺼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노시마[江ノ島]까지 이어지는 제방으로 직접 가는 횡단보도가 없었다. 파출소 앞에는 지하로 들어가는 내리막길이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며 다시 올라와야만 했다. 구글 스트리트 뷰에서 본 그대로였다. 내려가서 다시 직진해서 올라가면 공원이 나오고 공원에서 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인도교 입구가 나올 것이다.


인도교의 끝에 섬이 있었다.


입구에서 우비를 쓴 아저씨 한 사람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에노시마 크리스마스 축제를 홍보하는 전단이었다. 우리는 받지 않고 그대로 지하로 내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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