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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강우 Nov 04. 2024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

허공

허공

 

 

허공으로 허공을 그릴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다 

검은지빠귀가 날개를 편 모습만으로는 활공인지 착륙인지 알 수 없다 

허공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허물 수 있다 

허공은 나태하여 소멸을 불러오지만 공허를 채근하여 

전에 없던 생명을 조립하기도 한다 

허공을 배경으로만 다루는 건 허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이다 

허공은 빈 창고가 아니라 둥글게 쌓여 가는 돌무더기에 가깝다 

더러 돌 틈에서 뱀이 기어나오거나 나비가 날아오를 때 

그때 비로소 누군가는 희망을 타전하거나 세기말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허공이 품은 것은 은하의 별만큼이나 많아서 

우리가 가진 것은 실은 허공이 본연의 모습을 잠시 잃을 때이다 

허공이 정신을 차릴 때야말로 가장 가난할 때이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한 줌 허공과 바꾸었을 때 

그때 허공은 자신이 떼 준 살점의 수천수만 배를 청구한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 

무너지는 것에는 더 많은 허공이 필요하고 

어떤 것들은 메워질 수 없는 부피를 얻는다는 걸 

허공은 제 몸을 허물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파도처럼 걸어가는 것도

꽃대궁처럼 좁은 골목에 포개어 넘어지는 것도 

막무가내로 허공을 허무는 것이다 

부피가 사라진 곳을 메우는 건 허공이지만 

허공을 메우는 건 부피가 일정하지 않은 마음이라서 

허공이 유일하게 몸을 바꾸지 않는 건 

호환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진공의 슬픔 따위 

사람들의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캄캄한 속이다 

천지간 제일 부자인 허공이 가장 가난하다고 느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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