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밥 짓기
혼자 밥 짓기
잘 고른다는 건 잘 버린다는 말이라는 거
계약직을 한 번이라도 해 보면 아는 사실입니다
버려진 기분이 위안을 받는 건 게으름은 자동갱신이라는 거. 목구멍은 평생계약이라 위아래 입술이 뭘 먹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도장을 찍어요
오일장이 좋은 이유는 슈퍼와 달리 냄새가 뒷짐지고 다닌다는 겁니다. 부딪쳐도 찡그리기는커녕 오랜만에 만난 삼촌이 잠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걸 보듯 잠시 땅바닥을 차며 능청 떨어요. 호떡집과 파전집 주위를 얼쩡거리다 돌아가신 엄마를 닮은 촌부한테서 쌀 한 됫박을 샀습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걸음은 쌀을 든 손으로 균형 맞춥니다. 방 한 칸이 절룩거리면 담장에 기댄 접시꽃이 얼른 손 내미는 풍경을 상상하며 걷다 사고를 치고 맙니다
포장지가 터져 쌀이 쏟아졌군요. 신중하게 골라 담았지만 이미 쌀은 그 쌀이 아니어서 구경하던 남자는 더러워졌다 하고 참견하던 여자는 흙 묻었다 하네요. 조합하면 흙 묻은 더러운 쌀입니다. 그러니까 액면 그대로는 흙은 더러운 것이고 쌀은 못 먹는 것이 되고 말아요. 세상에,
집에 오자마자 쌀을 씻습니다. 가볍게 뜬 웃음을 걷어 내면 심각한 이야기만 남습니다. 당신과 주고받은 말 중에도 쌀이라고 생각했던 흙알갱이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말들을 잘 씻어 안쳤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뒤늦게 발견한 저 쌀벌레는 어떨까요. 허기를 파 먹는 바구미 몇 마리. 둘 사이에 형성된 습도는 벌레를 부르고 맙니다
다 된 밥을 풉니다. 혼자 살고부터, 기다림을 거리감으로 곱새기고부터 뜸을 들이지 않고 먹어요. 한 끼 식사도 밥솥과의 계약이라 믿고 남은 밥은 보온으로 처리합니다. 속이 설설 끓는 고비를 넘긴 뒤가 중요합니다. 적절한 온도 유지가 밥맛을 결정하지요. 이러쿵저러쿵 찧고 찧은 말과 같습니다. 뚜껑이 자주 열리면 관계가 꾸덕꾸덕해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