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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강우 Nov 04. 2024

2023년 아르코창작기금

초록의 가계

초록의 가계(家系)

 

 

집 또한 손길이 필요한 몸이라고 들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척추뼈가 허술해졌다

때 없는 웃음도 곡절 없는 울음도

혹은 자세를 유지하는 근육이거나 힘줄이었음을

골다공증이 자양분의 손실에 있다면

바람이 드나드는 빈집의 방들은

목이 쉰 성대인 셈이다

슬며시 낮잠을 청하는 들짐승들이나

숫제 한 세거지(世居地)를 장만한 명아주에게도

쪽마루가 들려줄 이야기는 마냥 고루해서

오늘은 슬하의 길고양이가 하품으로 대독한다

 

이야기는 고양이 수염처럼 짧지만

하긴 별과 별 사이의 거리도 한 눈금이다

함석지붕은 지상의 일을 눌러쓴 모자처럼 보인다

붉게 녹이 슨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던 집주인 사내

진도가 안 나가는 식솔을 거느리고 도시로 떠난 뒤

세간을 대체한 건 먼지의 필기도구들이다

여백의 몸은 총총 별들의 책상이 되었다

 

새 주소 기입란에 닭벼슬꽃을 이식할 순 없지

마음이 가닿지 않는 우편 행낭이 아득할 때

집은 그때부터 자신의 몸을 우체통으로 이용했다

부쳐도 가닿지 않는 서신이 쌓인다

붉은 인주가 묻어나는 처마를

저 박새, 아까부터 자꾸만 쪼아대는 게

아무래도 모자마저 벗기려는 심산이다

 

어쩌면 내용증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번번이 반송되는 녹가루의 마음은 

봉투를 잃어버린 바짝 여윈 초록의 가계(家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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