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움켜잡은 작고 세밀한 수만 갈래 신경 다발이 뇌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다시 척추와 연결되어 있는 감각. 척추에 사는 영혼의 요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신경 다발에 실을 꿰어 아래로 죽죽 잡아당기고 있는 감각.
몇 번이고 봤었지만 몇 번이고 잊어버렸던 이미지가 이번에는 선명하게 기억 속에 재생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흐느끼듯 일부는 흐려지고 다시 선명해지면서 그을린다. 그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갯벌에서 자신을 덮은 진흙을 거꾸로 누워 쳐내는 어떤 사내아이의 이미지.
분명 어딘가에서 내던져진 그 아이를 갯벌은 파도치듯 쓸어 담아 집어삼켰고 별안간 아이는 발길질로 갯벌을 쳐내길 반복한다. 갯벌은 아이를 보호한 쿠션이기도 했지만 곧바로 그를 집어삼키려 했으니 보호자일까? 혹은 괴물일까? 끝까지 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은 채 정신이 흐릿해졌다. 왜 이 이미지를 계속 잊었을까? 왜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생각해 냈을까? 그 아이는 어째서 계속해서 갯벌파도를 쳐내야 했을까?
울보성냥이 생각난다. 그 녀석은 늘 고개가 45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 키도 작고 몸도 왜소했던 그 녀석은 어디 하나 특출 날 것 없는 자신을 봐달라는 듯 늘 고개를 45도 오른쪽으로 기울여 지냈다. 그 행동을 많은 친구들이 그저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으로 여겼으나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기울어진 고개는 그에 대한 의심을 집어넣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는 삐쩍 마른 몸매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스타일을 하고는 언제나 눈물을 글썽였다. 마치 불타고 있는 성냥이 이내 힘을 잃고 서서히 옆으로 고개를 저미는 것처럼, 그리고 그 성냥이 불에 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 듯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것처럼. 울보성냥, 그 녀석의 별명이었다.
글썽이는 눈물은 어찌 한 번도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어 마치 안에서 전부 연소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저 밖으로 나가면 불타버리는 거야. 저 밖에 네 자리는 없는 거야. 고개를 꺾인 채 사람을, 사람을 보면 이내 눈물을 흘릴 준비만 하는(그러나 울지는 않는) 울보성냥, 그 녀석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던 걸까?
그 녀석의 시선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특출 난 외적 형태를 가졌음에도 모두가 달리 괴롭히는 법이 없었다. 졸업한 뒤 그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서서히 잊혀 무엇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게 됐는데 단지 그 아이의 집 작은 마당에 있는 구조물 앞에서 우는 일이 잦았다는 소문만 들렸을 뿐이다. 그때의 눈물을 흘러 떨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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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은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창조된 세계를 표현한 것이며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감명받은 것들을 다시 나만의 시선으로, 이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내 작품들은 자폐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만 생각하고 내 주변 것들은 배제하는, 주변 것들에 깃들어 있는 내 생각만을 도출해서 그것을 예술로 표현한 게 나의 작품이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내 예술 작품에 감동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나는 그 사람들을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게 아니야. 그런데 사람들은 작품을 보고 공감이 간다며 박수를 친다. 내 이기심에 공감한다는 건 그들의 이기심이 나의 이기심에 동했다는 것일까? 그들도 사실은 자신의 생각을 뽑아내기 위해 타인을 국수면발 기계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일까?
우리 서로가 가진 이기심의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연대를 형성한다는 사실이 웃기지 않는가? 이기심이 모여 연대를 만든다는 게 웃기지 않는가? 이기심의 깊숙한 얽힘이 연대와 이타심이 되고 우리는 사실 서로를 위해 살고 있다 여기는 게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흐르지는 않는 메마른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