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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땜

by 김여생

그런 날이 있다.

아침부터 뭘 해도 안 되는 날.

만지기만 하면 물건이 망가지고 옷이 뜯기고 가구에 생채기를 내는 날.

뭐지 세상이 날 거부하나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날.

오늘이 그랬다.

밥을 하려고 쌀을 씻어 밥통에 가져가 넣으려는 순간 손에서 밥통이 미끄러져 온 바닥이 쌀알로 가득해졌다.

하.. 이런 순간은 항상 슬로우로 보인다.

아아 내 손에서 밥통이 떨어져간다아아.

이러면 안되는데에에 잡아야 하는데에에.

온 바닥 구석구석이 쌀알로 가득해지는 광경이 슬로우로 보이니 참혹하다.

예전이면 울고불고 짜증 내고 그랬을 텐데,

이젠 '아 오늘 하루 액땜했다!' 하고 만다.

이걸로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돌아다니다가 침대 옆에서 '으윽.' 외마디 신음을 내며 주저앉는다.

조심하지 않고 모서리에 정강이를 박았다.

소리도 안 나오게 말도 안 되게 아파서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정말 아픈데. 이거 멍 크게 들겠다.'

아까 전으로 액땜이 다 안된 건가.

절뚝거리며 걸어 다닌다.

그래도 정말 감사한 건 이제 무의식적으로도 남 탓을 안 한다는 것.

예전엔 무언가 잘못되면 자꾸 다른 것에 탓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좋은 습관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내 탓은 하기 싫어 자꾸 마음속으로 미움을 만들어냈다.

미움을 만들어내면 제일 상처받는 건 나 자신인데.

그걸 몰라서 계속 사람 탓, 환경 탓, 사회 탓을 했다.

그냥 '늘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하면 된다.

밥통이 떨어진 건 손가락에 힘을 뽝! 안 주면 언제든지 미끄러져 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정강이를 박은건 다른 거 할 생각에 마음이 바빠서 조심을 덜한 것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일 것.'

몇 년간의 연습이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감정에 휘둘려 아무것도 못했던 날들의 연속을 졸업하고 이제는 현실을 보고 문제 해결을 한다.

조금 대견한 마음도 한 스푼 얹어본다.

변한 나를 다시 한번 인지할 수 있는 오늘이 정말 감사하다.

역시 이렇게 깨닫기 위해 쌀을 흘렸나 보다.


조와앟쒀! 영차! 자알했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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