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보통 전화를 하지만 아이가 자고 있어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현실의 팍팍함에 지쳐 나가떨어져 버린 친구의 한숨이 여기까지 들려온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저 몇 마디 위로만을 건넬 수밖에 없음에 마음 한편이 시려온다.
자신이 죽어도 슬퍼해줄 사람이 있어 든든하다고 말하는 친구.
'안돼 죽지 마 싫어 뿌엥.' 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 죽지 말고 마음껏 살다가 노환으로 눈을 감으렴.' 하고 달래니,
'친구야 근데 노환이면 병에 시달리는 거 아니니? 난 즐겁게 가고 싶다-'
심드렁하게 친구가 말한다.
'늙으면 자연스레 노환이 오는 거지 뭐.
난 자다가 가고 싶다. 그게 제일 호상이야.'
우린 죽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그래 그게 제일 좋은 거긴 한데..'
또 한숨을 쉬고 있을 친구가 눈에 훤하다.
'예전에 우리 동네에 자다가 돌아가신 할매가 계셨는데 동네 사람들 다 박수 치며 축하해 줬어! 호상은 원래 축하하는 거야.'
내가 하하 거리며 얘기하자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네. 어이가 없다.'
라며 큭큭대고 다시 씩씩한 내 친구로 돌아왔다.
'우리가 건강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있다는 거야. 교실 바닥 뛰어다니던 애들이 죽음을 얘기하니까 재밌잖아.'
나도 질세라 같이 큭큭대며 이야기를 덧붙인다.
'우리 집 한번 놀러 와. 같이 노래방 가자.
네가 불러주는 은영이에게 듣고 싶어.'
말하자 친구는 깜짝 놀란다.
'그걸 기억해?' 와 대박사건.'
친구의 예전 말버릇이 다시 나온다.
친구는 노래를 정말 잘한다.
깨끗한 목소리로 음이 사정없이 쭉쭉 올라간다.
발라드 전성시대였던 우리의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18번이었다.
감성 발라드를 좋아하던 친구는 노래방을 가면 2시간 내내 발라드만 부르던 진성 발라더였다.
(난 방방 뛰는 걸 좋아하는데 취향이 참 달랐다.)
KCM의 '은영이에게.'
흐릿한 학창 시절이지만 왠지 모르게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던 친구의 옆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너 어떻게 그걸 기억하냐. 그럼 안녕이 부른 은영이에게 들어봐. 김연우 같지 않니?
임재현의 세상에 없는 계절 들어봐.'
갑자기 신이 나버린 어머니다.
요즘 나온 감성발라드를 보따리 채 풀어놓는다.
'너 신세대다. 얘네들은 다 어떻게 알아?'
난 친구 덕에 좋은 노래들을 알아간다.
들으면서 정말 한결같이 감성 발라드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감탄한다.
'넌 진짜 취향이 변하지가 않는구나.'
'가사 좋은 노래들이 좋아. 감성적이고. 그러니 터져서 울지..'
'야잇 슬플 땐 듣지 마! 이거 눈물 나라고 듣는 거냐구.'
또 티격태격 싸운다.
'넌 또 정신 사나운 노래 듣지?'
'어머? 나는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춤이 절로 나오는 노래가 좋은 거야! 왜이랴.'
'너도 진짜 안 변한다.'
메시지인데 서로의 음성이 옆에서 고스란히 들린다.
꺼이꺼이 웃는 목소리까지도.
생각해 보면 우린 같이 노래방 가면 친구는 빅마마, 거미, 원티드, 바이브 등 감성 발라드를 부르고 나는 소찬휘, 김현정, 이정현, 코요태 등 댄스 가요를 불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진짜 취향 차이 후후.)
'노래방 가서 은영이에게 연습해 둬. 날 위해 불러야 하니까.'
'연습 안 해도 쌉가능.'
중학생 아들들을 키우더니 요즘 애들 말이 늘어버린 친구다.
(실제로 이 단어를 쓰는 친구를 보면 웃음이 나올 것 같다.)
극과 극인 취향의 친구지만 역시 결이 비슷하면 서로 낄낄깔깔이 잘 된다.
특히 학창 시절 친구들과 만나면 나이를 잊고 서로 격해지기 일쑤다.
티격태격하느라 친구는 삶의 팍팍함을 잠시 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자꾸 열심히 살아야겠다길래 열심히 살지 마!
열심히를 빼고 그냥 살아. 그래도 충분해로 또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서로 하트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거의 반절은 티격태격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진한 사랑이 묻어있다.
열심히 살지 마 친구야.
그냥 살아도 알아줄 사람은 다 알아주더라.
그리고 난 항상 네 편이야.
알아두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