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베고니아 꽃: 짝사랑,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까운 거리, 먼 마음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아침마다 지호는 등굣길에 유나와 마주쳤다. 둘은 다른 반이었지만 여전히 함께 학교로 향하는 그 시간이 지호에게는 유난히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곁에 머물러도 이상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지호는 늘 조심스레 마음을 숨겼다.
그날 아침도 지호와 유나는 나란히 버스에 올라탔다. 유나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지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에 앉아 그 옅은 미소를 눈에 담았다. 마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그녀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늘은 좀 피곤해 보여, " 지호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유나는 잠깐 지호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응, 어제 조금 늦게 잤거든. 입학하니까 뭔가 신경 쓸 게 많더라." 유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피곤하다는 듯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뭐, 그렇지...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 지호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려다, 조금 더 진중한 말투로 마무리했다. "그래도, 네가 피곤해 보이는 건 어색하네. 늘 활기차기만 했는데."
유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사람인데, 가끔은 지칠 때도 있지. 넌 늘 똑같네. 나만 변한 건가?"
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나도 변한 것 같은데... 나도 고등학교에 오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더라."
버스에서 내려 각자의 교실로 향하던 순간, 유나는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봐!" 지호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유나의 뒷모습이 멀어져 가는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점심시간, 지호는 복도에서 유나가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지만, 유나는 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바빴다. 지호는 멀리서 그 환한 웃음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네가 내게 단순한 친구라면, 이 마음이 이토록 복잡하지 않았을 텐데.’ 지호는 혼자만의 작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교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교 시간이 되어 유나와 다시 만난 지호는 나란히 걸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익숙한 농담이 오가고, 어릴 적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떠오르며 둘은 어느새 웃음을 터뜨렸다.
"너 초등학교 때 기억나? 내가 너한테 매번 숙제 물어봤었잖아, " 유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너 내 숙제만 베끼고 틀린 문제는 하나도 안 고치던 거 기억나."
"그랬나?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참 어리석었네, " 유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 모습에 지호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대화 속에서도 지호는 문득 유나가 멀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평범한 친구라면, 왜 내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걸까.'
그날 저녁, 지호는 침대에 누워 머릿속을 떠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만나고, 저녁마다 함께 집에 가면서도, 이제는 친구로서 지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쉽게 고백할 수 없는 이유도 분명했다. 만약 고백한다면, 유나가 영영 곁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럴수록 지호의 마음속에서 유나의 존재는 점점 더 아련한 빛을 품어가고 있었다.
‘너는 내 마음에 핀 한 송이 베고니아 같아. 가만히 곁에 두고 바라보기만 해도 아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소중한 빛이 흩어질까 두려워 감히 손에 쥐지 못하는 꽃.’
지호는 그렇게 속삭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가가면 부서질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간직한 채, 그 밤도 그녀를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