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퇴사 후, 정확히는 급성기 우울, 지독한 자살사고, 사람이 싫어지는 병에 걸려서,
사람의 마음을 들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되어버려서,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주변 동료들의, 주변 상사들이 역겨워서 그만 두기로 한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뭐 직장인이 참는 게 한 두 가지인가?
그 정도는 웬만하면 더러운 꼴 못 볼 꼴 보고 성장해온
나로서는 참아내는 스트레스 댐이 나름 괜찮았는데,
여러 가지 스트레스 상황들이 동시에 몰려오면서 그 댐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이 나간 댐을 막아보려고,
소개팅도 해보고, 친구들도 만나보고, 솔직하게 면담도 해보고,
내 나름 애쓰며 지냈지만 그럴수록 금이 간 댐은 내 속도 모르고 계속 갈라져 갔다.
누구를 보수 할 여력도 없는 채, 쏟아지는 자살 시도자.
인격장애. 가족 갈등. 서로를 나무라는, 지적만 있고, 진심으로 위해주는 마음은 없는.
물론 현장에서 교육을 듣고, 기사로도 접한 OECD 자살율 1등.
근데 하도 들어서, 그건 변함이 없어서 무뎌졌고,
뭐 어쩔 수 없지 가 아니라 그냥 당연한 나라니까. 웃기지 않은가?
자살이 당연한 나라라니. 근데 그거에 대한 민감성은 1도 없는 나라라니.
마치 열심히 애쓰는 실무진들이 현장을 떠나는 이유들이 하찮고,
그저 나약하다는 핑계로 치부되버리는 이 문화에 진저리가 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나는 피부로 느꼈다.
위기대응팀에서 근무하긴 했지만, 뭐 모를 때 투입된 그때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은 스트레스 댐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느끼고 받아들이기엔 약해졌다.
내원한 환자분들의 자살 시도 자국, 방법, 사진들을 출근하자 확인한다.
그 사진을 보는 이유는.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그 빈도는 어땠는지.
그 사진 하나로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물론 면담 시작 전 유추를 통해 확실한지 면담을 통해 알아간다.
잘못된 유추는 소거법으로 또는 어떤게 문제 상황이었는지,
어떤 부분부터 접근을 해야 하는지. 치료비가 우선인지,
아님 가족갈등이 우선인지, 아니면 중독(도박, 알코올, 물질 등)인지.
대화, 면담이 아니고서야 파악이 가능할까? 마법사도 아니다.
물론 그 면담 과정에서도 내담자는 나에게 첫 면담에 모든 걸 털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면담 장소가 중요하다고 누차 몇 번이고 건의하고, 얘기하고
왜 그만 두는지도 몇 번이고 설명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왜냐면 살릴 수 있는 사람마져도 내가 죽이는 것 같아서 그 마음이 힘들어서 그랬다.
하지만 병원은 영리기관, 보건복지부는 그냥 우후죽순 만들면 그만
수가가 낮아, 이윤창출이 안 되는 과라서.
돈이 안되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으며,
이런 18 오히려 다른 병원으로 가시거나,
차라리 이 지역에서 이사해서 다른 지역에서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무언갈 제대로 할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문제아,
나는 긍정적인 사람인데 부정적인 사람으로
핀트를 잘 못잡고 일이 커진다,
다 무슨 "자기 일처럼 떠맞는다" 라는 뭐 같은 소리를 들으며
그런 시선을 받으며 출근을 한다.
그럼 남일이 아니라 내 내담자들 일이다.
막상 이걸 얘기해도 나몰라라 할까봐
내가 그냥 입을 다물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그럴 성격도, 그럴 아량도 없다.
어디든 써야, 면전에다 하고 싶은 얘기를 못한 그 한이 이렇게 터져버렸다.
그러고선 알기쉽게,
듣기 쉽게 하는 병원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그렇게들 살아간다.
실상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환자들이
나에게 건낸 말들은 그게 아니였는데.
아무튼.
주치의 면담을 통해 털어놓을 수도,
주치의가 무서우면
사회복지사 또는 간호사 다른 타 전문요원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고,
우리는 그 면담을 바탕으로 회의를 해야한다.
그게 케이스컨퍼런스라고 나는 배웠다.
그 과정이 없이 그냥 무턱대고 하는 개입들은 마치 초동수사가 잘 못 되어,
바로 잡을 수 있는 범인이나 상황들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재밌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열 받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면 다행이다. 그냥 배가 가라 앉는다.
아무튼,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고, 의사만 수술방에서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일반 시민들도, 사회복지사도, 기자도, 그 누구도 심지어 강아지도 사람을 살린다.
근데 오히려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자살이지만, 타살이다.
이거 어떡하냐.
내가 엠비티아이 F 라서
(* 내 일상 캐릭터랑 직장인일 때 캐릭터랑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면담을 들어가면 장난칠때도 있지만 그것은 딱딱한 면담 또는 무거운 주제를 조금이나마
풀기 위한 장치로도 쓴다.
뭔 극 에프 때문에 이 일이 맞고 안 맞고냐. 잘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자.)
또는 니가 예민해서
또는 니가 지금 어쩌구 저쩌구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게 아니라요..."
아무리 곱게 얘길 해도 듣지 않는다.
수 많은 내담자들이 내게 했던 말이다.
"그게 아니라요..."
"그 누구도 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한다.
심지어 이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누구보다 더 알아야 함에도 정이 다 털렸다.
그러고선 다시 정을 주길 바란다.
그러고선 다시 정을 달라고 바란다.
용서, 기회
용서의 기회를 준다해서
이전처럼 되는 것은 없다.
응어리진 마음에 최소한의 절차일뿐.
용서 한 번으로 다시 이전의 모습을 기대하기엔
너무 큰 욕심이지 않나?
사람이 둘 만 모여도 와글와글
어떤 철학자는
자기 인생이 재미없으면
99% 자기 인생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를 한다고 한다.
가만 보면
혼자 돌아다녀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앉아있다.
물론, 스트레스를 그렇게 푸는 사람도.
그리고 그렇게 해줘야 해소되는 것도 있지만.
나는 그리 썩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걸 안 좋아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어울려야 하기도 하고,
사회인의 자세로
처세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켓이 되어서
배척되거나 소외되거나
괴롭힘을 당한다.
유치하다.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하나만.
여전히 거기는 그렇게 굴러가겠지?
하지만 내 알빠냐?
내 내담자 이외엔 다 남일이다.
직장에와서 내편 니편 쪼개지들 마라.
진짜 겨드랑이 털 수북히 난 어른들이 아직도 유치한 놀이에 누가 놀아나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왁싱을 해서 없나? 왁싱하면 어른이 아닌가?
아무튼 직장에서 나랑 안 놀아준다고
내 뜻과 다른 후배라고
내 비위를
내 돈꼬를
나에게 아첨을 안 떨어준다고
어깃장 두지마라.
그 후배는 일하느라 바빴다.
친목질은 퇴근 후에 해라.
적어도 사람을 살려야 하는 직업이라면
공부하기 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