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오늘, 욕심의 끝
아이를 잃고 나니 모든 것이 허무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렸다. 그래서 다음 아이가 빨리 생겨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그 당시 내 삶의 전부였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며 분노하다가 한없이 우울의 늪에 빠졌다. 모든 사람이 날 이해해 주길 바랐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던가.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더 늪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얻고 싶고, 둘을 얻으면 셋을 얻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함께 검사받기를, 그다음엔 금주를 하기를, 또 그다음엔 꼬박꼬박 산부인과에서 내 준 숙제에 동참하기를...
점점 욕심이 커져만 갔다.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면 비로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스스로 자유로워지길 거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갖기 위해 배란일 테스트를 하고 시기에 맞춰 숙제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이 내 말을 따라 주길 바랐다.
친구와의 약속도 안 돼!
회식도 안 돼!
아파도 안 돼!
아이를 얻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남편에게 숙제를 강요했고 그렇게 우린 자꾸 다툼이 생겼다. 용한 집에 가서 100만 원이 넘는 굿도 했다. 하늘나라로 떠난 아이가 날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굿을 하면서 아이를 보내주고 새로운 아이가 찾아오길 바랐다. 깊은 굴 같은 곳으로 들어가 백번 정도 절을 한 것 같다. 어느새 광적으로 임신에 집착했다.
"내가 힘드니까 내 말을 따라줘. 나 좀 살려줘."
나의 욕심의 끝은 집착이었다. 마음이 힘들었고, 몸도 아팠다. 남편과의 사이도 나빠졌다. 남편은 자꾸만 밖으로 나돌았고, 난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임신은 나 혼자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왜 협조를 해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처받은 날 위해서 이 정도도 못해주는 남편이 미웠다. 욕심이 날 괴롭게 만들었다. 욕심의 무게는 나의 어깨를 무겁게 했고, 우리 사이에 분열을 만들었다.
폭발한 나는, 남편에게 왜 함께 바라지 않는 것이냐고 울며 소리를 질렀다. 왜 힘든 날 이해해 주지 않냐고 울부짖었다. 그때 남편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촉촉했던 그때의 그 눈을. 그렇다. 난 나 혼자만 힘들고, 아프고, 슬플 거라 생각했다. 남편은 상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똑같이 힘들었다는 걸 세상 사람들 다 알고 있었는데, 제일 가까이에 있던 나만 왜 모르고 있었을까?
남편은 어쩌면 세상 그 누구보다, 심지어 나보다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 아이를 잃은 슬픔, 그리고 그 때문에 미쳐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남편은 내 옆에서 흔들이지 않고 묵묵히 서있었는데 왜 난 그를 보지 못했나. 남편의 사랑으로 감싸져 있어 그의 힘듦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날 그때, 남편의 눈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보다 더 힘들었음에도 활짝 웃으며 나의 옆에서 기다려준 사람. 너무나도 감사한 사람. 함께 눈물을 나누며 우리는 점차 극복해 나갔다. 남편은 조용히 날 지켜주었고, 나 또한 나만의 속도로 조금씩 치유해 나갔다.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난 상처의 그림자에 직면할 힘을 찾게 되었고, 점차 희망이 보였다.
날이 지나면서, 우리의 사랑은 상처와 욕심을 가라않혔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치유는 흉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여정의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이란 것을. 그 이야기를 사랑으로 가득 채운다면 비로소 욕심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아홉 번째 오늘, 끝.
오늘의 질문 일기
Q1. 욕심이 크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Q2. 집착의 끝은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