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질수록 누구보다 친해집니다. 저조차도 가족만큼 친한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가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 맞습니다. 근데 왜 하필 나이를 먹을수록 친해질까요? 단지, 사춘기를 봤고, 나를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형제자매는 그래도 누구보단 배신하지 않는 끈끈한 믿음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사람은 영악한 동물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보여주지 않고 속일 수 있고 싫어하는 것을 좋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습니다. 순진한 사람은 그런 행위를 오로지 진실로만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래된 친구나 연인이라면 그런 행위들에 대한 믿음이 몇 배로 커지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일 수도 있고, 시간이라는 벽 앞에 그전만큼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입버릇처럼 하는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듣고 믿는 사람들은 언젠가 수십 배의 고통으로 거짓말의 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소중하고 소중했었다면 적어도 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군가에게 심어줬던 감정고통들은 웃기게도 나에게 분명 되돌아오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기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이 기준이 되기도 하고 물질적인 부분이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린 감정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이익을 중시하는 줄자는 분명 끝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감정은 자로 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소중히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소한 배려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배고플 때 먼저 먹여주는 것에 설렘을 느끼고, 차도 쪽은 위험하니 인도로 걷게 하는 걱정에 감사함을 생각하며, 집에 데려다주는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닌 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랑을 느꼈으면 합니다. 당신이 그만큼 사랑받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매일 느끼고 감사함을 전해주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끝이 절망이라면 다시 사랑하기가 두렵습니다. 누군가에게 모든 걸 주었던 내 진심이 무너지는 날엔 세상이 같이 무너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끝이 나에겐 고통의 문턱이라면 다시는 어떤 누군가를 믿고 싶진 않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 힘듦을 겪는다면 아마 무너지는 걸로는 끝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두려움이 끝을 맺고 숨어 있던 내가 나타날 때쯤 분명 좋은 사람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워서 사랑을 안 하는 것보단 차라리 같은 고통을 겪어도 이 사랑을 다시 한번 느꼈으면 합니다. 그만큼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준다는 감정은 어떤 고통과 비교해도 이겨낼 만큼 위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