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긴 후에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한동안 페이스 조절 없이 전력 질주만 하다가 갑작스레 서행하게 됐더니 그제야 몸과 마음의 아픈 곳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내가 병원에 들어갔을 때부터 끊이지 않던 잔기침과 함께, 긴장이 비로소 풀려버린 어젯밤부터 약하게 오한이 들면서 시작된 몸살 기운까지 보태져서 온몸의 혈관들이 찌릿찌릿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내가 중환자실을 퇴원하면서 오랜만에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됐다. 평소 같으면 J형이랑 같이 점심을 먹었겠지만, 그간의 몸고생, 마음고생으로 인해 지쳤던 나에게 수액을 선물하기로 했다.
몸살 기운이 돌거나 장염에 걸려서 고생할 때면 가는 의원으로 향했다. 이 의원은 수액이나 영양제를 맞춰주면서 보험 처리를 위한 서류까지 잘 챙겨줘서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도 역시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수액 주사를 팔에 꽂은 채로 세라젬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더니 온몸이 노곤해지더니 이내 단잠에 들었다. 대낮에 잠이 드는 걸 보아하니 나도 마음이 많이 편해진 듯했다.
장모님이 아내가 오늘부터 바로 재활에 돌입한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정확히는 아내의 상황 파악을 위한 기본 검사들을 진행한다고 했다. 오늘은 언제까지 하게 될지 모를 작업 치료와 운동 치료 등을 위한 인지 능력 검사, 기능 검사 등이 있었다고 했는데, 어차피 대화가 원활한 상태도 아니었기에 많은 진도를 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도 지난주 아내의 상태를 생각하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했다. 바닥을 치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모두를 믿고 기다려보기로 다짐했다.
오늘도 딸의 엄마 결핍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저녁 식사 후에 아내와 영상 통화하기로 했다. 밥을 잘 먹어야만 엄마를 보여준다는 조건적 보상은 아니었지만, 짧은 입의 소유자인 딸은 꼭 아내와 만나기 위해서 여느 때와 달리 부지런히 저녁 식사를 마무리해 나갔다. 엄마와의 영상 통화를 상품으로 내걸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겁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귀신 소리 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연 영상을 보니 호랑이, 귀신, 도깨비 등의 캐릭터들이 있고 아이를 협박하는 각종 멘트를 으스스한 목소리로 내는 구조였다. 그러면 부모 말을 안 듣고 날뛰던 자녀들은 스산스러운 겁박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다. 부모는 아이에게 어떠한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고, 귀신 소리로 둔갑한 제삼자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에게 공포를 심어주면서까지 부모의 짧은 평안을 얻고자 하는 잔인한 행태인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오죽하면 그렇게 하겠나 싶다가도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 아이의 정신 건강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짧디짧은 생각을 기반으로 한 앱인 것 같아 무척 한심스러웠다. 어찌 보면 아이에게 잔소리하는 부모가 되기 싫은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효율적인 도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이토록 비겁한 방식도 없었다. 아이도 결국 타인이므로, 부모가 아이에게 부탁을 하거나 강제성을 띠는 당부를 하는 방식으로 어떠한 행동이나 생활 양식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식에게 나쁜 사람으로 비추어지기 싫은 부모들은 귀신 소리 앱과 같은 우회로를 선택한다. 아이와 지루한 설전을 이어갈 자신이 없기에 제삼자의 힘을 빌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형성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습이 필요하다.
아내와 나는 딸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행동을 끌어내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설명을 길게 하는 장기전이나 단호한 말투로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단기전으로 정리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삐 움직이는 딸의 수저와 저작운동을 보고 오늘은 이러한 설득은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얼른 식사를 마무리하고 아내와 영상 통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통해 그동안 엄마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후다닥 끝낸 우리는 호기롭게 영상 통화를 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얼른 장모님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고, 장모님이 받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딸은 어제처럼 광대를 한껏 치켜올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지 않게 전화를 받은 장모님은 오늘도 역시나 한 번에 아내를 화면에 비추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딸은 허공에 대고 ‘엄마!’라고 불러버렸다. 장모님이 겨우 초점을 맞춰서 비춘 아내의 얼굴은 어제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좋아진 모습이었다. 아직 말이 제법 어눌하긴 했지만, 어제보다 좋아진 것 같았고, 팔의 움직임도 조금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딸이랑 어렵사리 간단한 대화도 되는 걸 보고 장모님과 아내가 만난 시너지 효과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속도라면 아내가 집에 금방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아내는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많은 체력을 쏟아부어야 했기에 긴 대화를 지속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와 딸이 서로에게 할 말을 끝내고 나서 통화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자연스레 장모님이 오늘 일과 중에 했던 검사에 대해서 알려줬다. 장모님에게 아내의 상황을 들었더니 빼꼼히 고개를 내민 희망의 새싹들이 황급히 땅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아내는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고개를 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신생아가 태어난 직후에 목 주위 근육에 힘이 없어 다른 사람이 지지해 주지 않으면 고개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격하게 떨어지는데, 아내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아내의 몸이 완전 신생아 때로 돌아간 것이다.
몸에 있는 근육들이 이렇게 쉽게 제 기능을 잃는다는 게 참으로 신기한 동시에 걱정스러웠다. 약 보름 정도 누워 있기만 했던 탓인지, 아니면 자가면역뇌염의 여파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아내의 몸 상태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의 근육들은 초기화된 것처럼 한꺼번에 기존의 기능들을 상실했고, 목 가누는 것부터 허리를 곧추세우고 걷는 것까지 전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사실상 신생아와 비슷한 상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딸이랑 영상 통화까지 했으니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고 잠시 방심했던 마음에 다시 걱정의 홍수가 다시 들이치기 시작했다. 아내의 몸이 재활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태껏 발견되지 않은 장애나 후유증이 있는 것은 아닐지. 어리석게도 내가 방심하면서 놓치고 있는 것들이 쏙쏙 염려되기 시작했다. 결승선을 지났다고 생각해서 달리기를 멈췄는데 사실은 그저 첫 번째 체크 포인트만 겨우 지났을 뿐이었다.
나는 야외 활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집에 앉아서 가족이랑 시간 보내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자연 풍경에 큰 감동을 받는 편도 아니고, 새로운 경치를 보는 효용보다 운전하거나 이동하면서 기운 빠지는 비효용이 더욱 크게 와닿는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집에 있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심지어 우리 가족에 뒤늦게 합세한 딸도 우리 부부 유전자의 직격탄을 맞아 토요일에 가족이 다 함께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겠다는 선언을 하곤 했다.
집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밖으로 끌어내 주는 것은 친구들, 딸 친구의 부모 등의 주위 지인들이다. 감사하게 캠핑이나 글램핑 자리에 초청해 주면,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함께하면서 간접 체험을 하게 된다.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 숯을 피우든, 식사 후에 자연스럽게 마시멜로나 쫀드기도 굽고 불멍을 하기 위해 장작불을 지피든 꼭 한 번은 불을 피운다. 일반적으로 착화제나 토치를 사용해서 불을 붙인 숯이나 장작은 활활 타오르기 마련이다. 마치 바로 삼겹살이나 간식을 구워 먹으라는 듯 높은 밝은 불길로 배가 고픈 우리들을 꼬드기곤 한다. 하지만, 허상과도 같은 이 거친 불길에 마시멜로 꼬치를 들이대면 속이 익기도 전에 겉에만 시커멓게 타고 만다. 탄내만 실컷 나고 안은 물렁물렁하기만 해서 먹을 수 없어져 버려야 한다.
거칠고 격정적인 불길이 사그라들고 난 후에 숯이나 장작이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안정적으로 발화하는 단계에 도달해야 고기를 제대로 구울 수 있고, 마시멜로도 겉바속촉으로 균등하게 익힐 수 있다.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듯, 약간의 지식이나 경험만 습득했지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착각이 일 때가 바로 이 장작의 가짜 불길과 비슷할 것이다. 나 역시 경거망동해서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긴 이후에 모든 것이 끝났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여 어리석게도 거짓된 성취감에 잔뜩 취해버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지 몰라도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릴 수 있을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다시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