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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Oct 17. 2024

14-1. 드디어

드디어 오늘이다.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던 중환자실 입원 기간이 오늘로써 끝난다. 따지고 보면 보름가량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무지막지한 공포와 걱정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해서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했던 나날들이라 내 삶의 그 어떤 2주보다도 무섭고 길게 느껴졌다. 끝이 어딘지 모를 두려움을 경험했더니 롤러코스터 열차가 살짝 느려지기만 했는데도 출발지로 돌아가려는 착각에 빠져 잔뜩 긴장했던 혈관들이 일제히 이완되는 것처럼 느슨하고 해이해졌다.


오늘도 출근해서 J형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병원에서 호출하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를 끝마쳤다. 마음이 편해지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나 보다. 이제는 끝이라고 착각했는지, 그간 배려받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정상적인 직장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 마음의 비중이 이전보다 커지면서 병원에 갔다가 바로 퇴근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오전 중에 병원에서 연락을 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마저 들었다.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대로 이른 오후에 1인실로 옮길 수 있게 됐다는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아내가 G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눈치를 덜 보고 회사를 나설 수 있게 됐다. 물론 아내가 이토록 아픈데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매일 똑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게 마냥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일반 병실로 옮기고 장모님이 간병인으로 들어가면 좀 낫지 않을까. 이제 꼴에 여유까지 부리고 있었다.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늘은 병실은 옮기는 관계로 중환자실 면회는 진행되지 않았다. 원래라면 면회했을 시간에 간호사들이 아내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거의 2주 만에 만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함께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는 장인어른의 컨디션이 좋아진 건지, 아니면 장모님의 출정식을 보조해야 해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장인어른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나름대로 반가웠다. 2주 동안 병원 밖의 식당 탐방을 해보자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우리는 오늘도 역시 병원 지하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점심 식사를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장인어른은 그동안 중환자실 면회에 동행하지 않은 것이 미안했는지, 본인이 병원에 올 때는 무조건 밥은 자기가 사겠다고 선언했다. 나도 나대로 힘들지만, 장인어른이 오히려 더 큰 걱정이었다. 본의의 딸과 우리 딸 걱정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식사도 겨우 한다고 장모님이 살짝 귀띔해 줬는데, 며칠 만에 몰라볼 정도로 야위었다.


점심 식사를 끝낸 우리는 커피도 한 잔씩 들고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긴다고 하니 다들 여유가 생겼다. 오히려 처음 해외여행 나가는 사람들의 긴장감과 설렘을 내비치고 있었다.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아 그동안 오지 못했던 장인어른도, 오늘부터 간병인 모드로 들어가게 되는 장모님도 모두 한시름 덜었다는 듯 중환자실 앞에서 우리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주 내도록 왔던 중환자실인데 처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면회하고 나온 듯한 다른 환자의 보호자들은 갓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사람들처럼 한껏 어두운 얼굴을 하며 잔뜩 심란해하고 있었다. 지난주의 나도 분명 저랬을 텐데 싶으면서 병원이라는 곳이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사람투성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잠깐 한숨 돌린 나와 장모님은 1층에 아내의 일반실 접수를 하러 내려갔다. 보호자는 1명만 입실할 수 있으며, 가족이라 하더라도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은 병원 정책상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상시에 내가 들어가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봤더니 접수대에 신고만 하면 보호자 교대는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안내해 줬다. 출입증 역할을 하는 듯한 보호자 목걸이 명찰을 받아 들고 다시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 거기서 나는 보호자 역할이 막중해진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붙잡고 갖은 당부를 늘어놨다.


평소에 없는 말을 못 하고 매사에 솔직한 편인 장모님에게 당신의 걱정들을 아내에게 내비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일러뒀다. 지금 당장은 환자에게 심적 안정감을 선사하기에는 나보다도 장모님이 훨씬 나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러려면 함께 병실로 들어가는 간병인부터 편안한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모님이 아내를 보고 당황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일부러 아내의 상태를 과장되게 알려줬다. 장모님은 우리 집에서 아내를 구급차에 태운 후에 거의 2주 동안 아내의 얼굴과 상태를 보지 못했기에, 아내의 컨디션에 대해서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내가 얘기해 준 것들에만 의존해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제넘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장인어른도 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나름의 임무를 부여했다. 집에 있다가 장모님이 필요한 물건이 있거나 호출이 있다고 하면 지체 없이 차를 끌고 병원으로 달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도 장모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이불, 옷가지들을 몇 보따리 싸 와서 차 안에 넣어왔다고 했는데, 앞으로 그 역할만큼은 충실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아내의 상태가 가장 중요했지만, 이기적이게도 지병이 있는 장인어른도 잘 버텨주길 혼자서 바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추가적인 환자가 생기는 것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조금 기다렸더니 아내의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들의 호출이 있었다. 문이 열려서 보니 면회 때마다 약간은 세워져 있던 아내의 침대가 오늘은 완전히 눕혀져서 끌려 나오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올림머리로 묶여있던 머리카락도 어제보다는 조금 덜 엉겨 붙은 것 같고, 아내를 덮고 있던 이불도 정갈하게 그 매무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장모님은 아내를 보자마자 움직이고 있는 침상 옆에 붙어서 아내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 엄마 왔으니까 다 괜찮을 거야.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예고 없이 아내의 곁으로 달려간 장모님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처음 보는 아내의 불편한 모습에 울거나 신세 한탄을 시작할까 두려웠고, 아내도 갑자기 밝은 곳에 들어가서 눈 뜨는 게 어려운 것처럼 급작스레 다가오는 엄마를 보고 감정을 주체할 수 있을지 염려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그간 장모님에게 아내의 상황을 설명할 때, 최대한 긍정과 희망을 제거해서 얘기해 준 탓인지 이제 얼굴 근육을 약간은 움직일 수 있는 아내를 보고 오히려 반색하는 눈치였다. 반면, 아내는 거의 보름가량 중환자실에 갇혀 있다가 쓰나미를 맞이하듯 장모님을 맞닥뜨리니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마음의 평온이 무너져서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얼굴 근육과 코에 연결돼서 걸리적거리는 콧줄 위로 눈물이 샘물처럼 졸졸 흐르고 있었다. 침착함을 잘 유지하며 아내의 얼굴을 휴지로 닦아주며 연신 안정시켜 주는 장모님 덕분에 아내 마음의 동요도 곧 진정됐다.

아내의 병이 처음 발병하고 구급차에 몸을 싣기 전에 모두가 아내가 누워있는 우리 집 안방 침대 주위에 걱정스레 둘러섰던 이후 처음으로 다시 모였다. 집을 나서면서 쉽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귀환이 이제야 시작됐다. M병원 응급실장과 논의하면서 아내를 입원시킬 때만 해도 하루 이틀 뒤면 회복해서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오래 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렇게 다시 모였다. 구급차에 오를 때와 모두의 상황은 달라졌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내의 새로운 병실은 G병원의 가장 높은 층에 위치했기 때문에 환자 이송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먼 거리를 올라가야 했다. 가히 1인실의 진면모를 보여줬다. 아내를 옮겨주기 위해 꼭대기 층에서 내려온 이송 담당 직원과 함께 우리 모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역시 병원이었기에 아내 말고도 다양한 환자들이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아내의 펴진 침상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나올 때까지 제법 기다려야 했다. 나와 장인어른은 아내의 중환자실 기간이 길어지면서 늘어난 짐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있었던 반면에, 장모님은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장모님은 아내의 손을 꼭 붙잡고, 이제는 엄마가 왔으니 다 괜찮을 거라며 연신 아내를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


겨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우리는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 길에 웬만한 층에 다 멈추는 바람에 답답한 공간에 장시간 갇혀 있어야 했다. 답답하고 덥기까지 해서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고 싶어 졌는데, 두 손 가득 들고 있는 짐과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 때문에 도무지 벗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내릴 때가 다가오니 인구 밀도가 낮아지면서 이송 직원과 우리 가족만 있었던 엘리베이터 내의 적막이 불편했는지, 나는 그에게 시답잖은 농담까지 건네고 있었다. 그는 농담까지 건네는 보호자는 처음 본 것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병원의 꼭대기에 있는 1인실 병동은 내가 계속 드나들었던 외래진료실이 있는 1층이나 중환자실이 있는 3층보다 확실히 유동 인구도 적었고 훨씬 청결했다. 아내가 입원하게 될 1인실은 입구에서부터 관리되고 있었는데, 보호자로 등록된 장모님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면서 나와 장인어른을 저지했다. 내심 옮긴 병실에서 짐도 풀어주고 다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예상보다 엄격한 관리 기준에 적잖이 당황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정했더니, 원래는 짐도 앞에 두고 가야 하는데 감사하게도 잠깐 들어갈 수 있도록 눈 감아 주겠다고 했다.


한번 저지당해서 마음이 불편한 데다 아내를 맞이한 간호사들이 새로운 병실을 분주하게 준비해 주는 바람에 내가 기대한 단란한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을 얼른 내려놓고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모두에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아내와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누고 정신없는 병실을 장인어른과 함께 빠져나왔다. 그래도 어제까지 중환자실을 나설 때와는 다르게 장모님이 아내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오히려 편했다. 엄마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을 통해 심적 안정감을 얻어서 얼른 회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장모님이 병원에서 간병하면서 필요한 옷가지나 짐들을 가지러 장인어른과 함께 차로 향했다. 이부자리, 옷가지, 다른 준비들이 들어있는 보따리와 쇼핑백들을 잔뜩 들고 올라가서 1인 병실 출입문 앞에서 장모님을 호출했다. 아내에게 어설프게 인사한 것 같아서 잠깐이라도 들어가서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내와 장모님이 한동안 머물러야 하는 병원에서 진상 환자로 찍히는 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다. 장모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얼마나 오랫동안 부탁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길고 길었던 나의 턴을 종료하고 장모님에게 다음 플레이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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