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백색
병원을 바꿨다. 5년을 다녔지만 1년마다 페이 닥터가 바뀌고, 최근 의사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했으므로 답보되는 느낌이 강했다.
집에서 최대한 두 번째로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첫 진료날. 가서 아홉 가지 설문지를 작성했다.
내가 보기에도 만점이 나올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자 의사가 말했다.
온통 백색, 온통 백색이었다.
티슈 커버부터 책상은 물론 온갖 오브제와 가운까지.
내가 앉는 의자도 그랬다.
나는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이전에 먹던 약 리스트를 보며 의사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모니터에 띄워준 나의 설문지 결과. 모든 항목, 보통 방문하는 환자의 평균을 훌쩍 웃돌아, 그래프는 천장을 뚫을 것 같았다.
의사는 아주, ‘심각’하다고 했다.
나의 최근의 죽음에 대한 계획, 그리고 구직활동과, 취업이 돼도 나가질 못하는 불안을 의사는 의외로 덤덤하게 들어주었다.
안타까운 표정을 하지도, 그렇다고 경청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 못 한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꺼내어내자, 상담을 마친 후 마음은 뭔가 개운해졌다.
나는 생명의 전화에도 전화했었지만 연결되기 전에 결국 끊어, 누군가에게 그렇게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약은 항우울제가 아예 빠지고 새로운 약들로 채워졌다.
병원비는 5만 6천 원이 나왔다.
초진인 걸 알아도 사실 쉬고 있는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투자라는 걸 알았다.
매미가 미친 듯이 우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다.
전 병원보단 교통편이 불편해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 주에 면접이 두 개 더 잡히고 나는 덥고 더운 한낮의 방 안에서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새로운 약이 약효를 드러내길 기다렸다.
무언가 크게 달라질 거라 착각한 것 같다.
실제로는 약효를 피부로는 느낄 수 없었다.
바꾼 약들은 저녁약이 특히 불면증에 전혀 도움이 안 됐는데 지독하게 잠이 안 왔다.
그래도 언제까지 약에 기대 잠을 잘까 싶었고 이것은 일을 하면 피로에 좀 나아지지 않을까. 얌전히 약을 먹었다.
오래된 친구와 그 후 절연을 했다.
매번 연락이 오던, 나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딱 1년 전 내가 일을 그만두고 경제적으로도 전 같지 않아 지고 살이 쪄 외모도 달라지자 눈에 띄게 연락 햇수가 줄었다.
그전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그날은 조증 삽화도 있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친구를 차단했다.
나는 키링이었나 싶었다. 이미 한번 진짜를 걸러냈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도 또 진짜가 있었다.
아쉬움이나 섭섭함 보다는 개운함이 있었다.
나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고, 그런 나를 인정하지 않는 친구는 끊어낼 타이밍이었다.
그날 밤은 아주 잘 잤다.
이사 온 6년 전에는 희던 벽지도 은근히 누레지고, 내 흰색 책상도 세월에 미묘하게 나무 끝이 들렸다.
내가 생각한 미래는 이게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너무 더운 어느 날, 충동적으로 얼음 정수기를 렌탈 하고 얼음을 씹으면서 나는 울지 않으면서 울었다.
어른들이 가슴을 치며 울화를 터트리는 걸 처음 이해한 날이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이고 자업자득 같았다.
그동안 하던 사진 일을 그만하고 싶어서 엔터테인먼트 신인개발팀 면접을 보러 갔다. 그 방도 진료실처럼 온통 희었다.
“촬영 일을 오래 하셨던데요.”
“이제 그만하고 새로운 일을 찾고 싶어서요.”
나는 리셋하고 싶었던 것 같다.
“소희의 소희를 한글이름으로 지은 건, 너가 자라면서 네 마음대로 뜻을 붙일 수 있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지. 한자도 좋지만 그건 부모의 뜻을 담잖아? 네 엄마랑 나는 그것보다는 네가 네 스스로 뜻을 담아가길 바랬어.”
그날 오후 아빠랑 통화를 하며 나는 내 이름이 왜 한글이름인지 처음 알았다.
아름이나 하늘이처럼 누가 봐도 한글 이름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러자 내 이름이 처음 소중해졌다.
이력서에 적힌 이름. 지그시 쳐다보면 부모의 애정이 느껴진다.
사실은 그만하고 싶다고 아빠에게는 당연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아빠도 분명 그런 것이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