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 속에서
그즈음 친구들이 갈리기 시작했다.
흔히들 말하는 힘든 시기, 진짜가 가려진다는 그 시기를 성인이 되고 처음 맞이하고 있었다.
극도로 내향적임에도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던 나는 조울증에 집에 처박히고, 약 부작용으로 살도 찌자 먼저 연락하던 친구들이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역으로 좋았다. 진심으로.
이제 진짜만 남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는 몰랐지. 그 진짜에서 또 진짜가 걸러지는 날이 올지)
실업급여를 받으며 집에 있으니 친오빠와 함께 사는 집안에 오빠의 한숨소리가 늘어났다.
오빠도 아빠도 내가 정신과에 다니는 걸 몰랐고 알릴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중 폭우가 내린 날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져 손등도 부러지면서 나는 예상보다 긴 시간을 쉬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이 손을 쓰는 일이라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업급여 기간은 거의 집에서 손이 괜찮은 선에서 글만 쓰면서 보냈다.
역시 내가 글을 쓴다는 걸 가족들은 몰랐다.
적은 돈이지만 용돈 정도는 벌던 중 오빠와 성인이 된 후 처음, 크게 싸웠다.
“넌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거기서도 나는 나의 조울증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그들 앞에 있을 때는 밝은 나로 있는 내가 잠시 온전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이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손이 거의 낫고도 집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하자 오빠는 본 적도 없는 역정을 냈다.
나도 알았다. 내가 걱정돼서 그런 거라는 걸.
하지만 너무 서운해, ”이제껏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렸는데 나 좀 쉬면 안 되냐! “ 고 나는 펑펑 울었고 오빠는 불리할 때 울지 말라고 말하며 나는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결국 몇 시간 지나 오빠가 와, 아기 때 이후 처음으로 나를 뜨거운 축구선수의 포옹처럼 안아줬는데 이튿날 바로 나는 구직을 시작했다. 가족이 주는 힘과 압박감이 그 정도였던 것이다.
급한 대로 제일 먼저 면접에 합격한 회사에 출근하면서 그때는 그게 또 다른 방아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약을 장기간 복용하면서 나는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이 생겼고, 약을 하루에 두 봉씩 먹기도 했다.
약이 떨어지면 뜬 눈으로 왕복 3시간을 출근을 하며 줄담배를 피웠다.
흔히 조증을 ‘기분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보다는 에너지 과잉의 상태라고 보면 된다.
이를테면 충동구매라던지 어떤 사람은 충동적인 성관계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때는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고 고양된 감정은 잠을 이루게 하질 못한다.
그리고 아침이 와, 조증 삽화가 끝나면 금방 부어질 콘크리트를 기다리며 알몸으로 드럼통에 들어있는 것 상태가 된다.
내가 가족을 일으키겠다는 건 다 망상처럼 보이고 지난밤 구매한 것들은 예쁜 쓰레기들이며, 그냥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바닥까지 사람을 매몰되게 한다.
조울증은 길던 짧던 그 두 가지의 반복이다.
새로 들어간 회사는 최악이었다.
직원은 전보다 많고 그들은 좋았지만 대표가 문제였다.
딱 내가 혐오하는 깡패 같은 스타일이었다.
면접 볼 때는 존댓말을 썼지만 입사하자마자 바로 야 너 하는 소리를 들었고 여자 직원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남자 직원은 이 새끼 저 새끼를 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탈출하고 싶었지만 오빠 얼굴이 생각나 1년은 버티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오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잠만 자고, 회사에 가면 왜 저런 놈 밑에서 저런 놈 돈을 받으려고 일해야 하는지 몰랐다.
업무라고 전혀 할 수 없는, 대표 아이들 재롱잔치 영상을 편집해줘야 했고 포토샵으로 시간표를 만들어줘야 했다.
그렇게 나의 공황은 달리는 3호선 꽉 막힌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 발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