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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감

신뢰가 무너져 느끼는 강한 실망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

by 쑤필가




법원에 다녀온 후 난 우리의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협의 이혼 신청서를 다시 제출하고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지만

그에게 내가 한 가지 당부했던 것은

주어진 숙려기간 한 달 동안은

협의 이혼 접수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말자고,

평소 우리처럼 지내자고 말했고,

남편도 알겠다고 답했다.


아마 남편은 내가 그 여자와의 카톡을 보게 된 게

컴퓨터에서 카톡이 자동 로그인되어 본 줄 알았던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니 남편의 애플워치는 충전기 위에 그대로 놓여있다.

그가 집에 없을 때 핸드폰과 거리가 생기면

애플 워치가 비활성화되는 줄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이 모든 게 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으나

확인을 통한 확신이 필요했던 것일까.

남편 애플 워치를 들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근거린다.

카톡창을 열었고 채팅방 이름 중에 그 여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안도와 함께 '제발' 끝까지 모든 게 오해이길 바랐다.


그의 카톡에는 많은 거래처 이름들이 있었다.

근데 정말 왜 하필 그 이름이 눈에 보였을까.

[산본 페인트]

왜 하필 아니 어쩌면 다행히도 그 채팅방을 열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내가 열어본 산본페인트라는 채팅방에는

페인트 업체와는 무관한 대화들이 있었고

또다시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남편의 메시지가 있었다.

여전히 그 둘의 만행은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번 대화는 남편이 지난번 말했던

아는 동생일 뿐이고 아들이 있는데 생일이라 해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는

그런 같잖은 변명 따위는 할 수 없는 대화들이었다.


남편은 카톡을 보내면서도 대화 내용을 계속해서 삭제하는 듯했다.

중간에 카톡 내용이 사라지기도 했고

삭제된 메시지에 답을 하는 듯 보이는 대화도 있었다.

근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 둘이 함께 있었다는 것과

어떤 사이인지 유추할 수 있는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깨울 걸 그랬네!"

"그러니까 앞으로는 재우지 마."

"오빠 그게 갑자기 슬프더라. 오빠가 가는데 보내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없고"


근데 거기서 내가 정말.. 무너졌던 건 너의 말이었다.

"나도. 조금만 참자"


네가 어떻게.

넌 이 숙려기간이 단순히 조금만 참다가 상간녀한테 가는 시간이었다니.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되짚어봐도 이렇게 마음이 찢어지는데.

그때 당시 난 손이 떨리고 서있을 힘조차 없었고

너를 보고 울고 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좌절할 모습을 보일 참이었고 무너져 내리는 마음에

그 자리에서 정말 주저앉았다.


카톡을 보자마자 그 내용을 사진 찍어 친언니한테 보냈고

언니가 바로 전화가 왔다.

좌절해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나에게 언니는 지금 당장 데리러 갈 테니

일단 집에서 나오라고 했다.

난 싫다는 말만 반복하며 "그냥 오빠 만나서 물어볼래"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 배신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일단 자리를 피한다 한들 이후 소송이나 남편과 싸우는 과정을 버틸 수도 없을 거 같았다.

남편의 얼굴을 보고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믿었던 그에게 이게 도대체 뭐냐며, 오해냐며, 설명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아무 정신이 없었다.

언니는 나를 다독이며 똑똑하게 굴어야 한다 했고 난 정신 차리려고 노력했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물이 얼굴에 범벅된 상태로 엉망이었던 나는 퇴근길이었던 남편과 마주치지 않으려

추운 겨울에 급하게 캐리어 짐을 싸서 빠르게 집을 나왔고

언니가 도착할 때까지 남편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그냥 계속 걸었다.


겨울의 찬 바람이 마음과 살갗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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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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