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가를 불러줄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첫째 때 처음 이 노래를 들려주며, 불러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호르몬 탓이겠지만, 가사가 가슴을 울렸다.
“엄마는 언제나 ○○이를 사랑해.
장난을 칠 때도, 떼를 쓸 때도
함께 있을 때도, 떨어져 있을 때도
엄마는 언제나 ○○이를 사랑해…”
상업용 교육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그림처럼 예쁜 엄마와 딸이 등장했고, 나는 그림 속 엄마인 듯 아이에게 종종 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장난을 쳐도, 떼를 써도 언제나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장난을 받아주지 않았고, 떼를 쓰면 혼날 거라고 협박부터 했다.
사랑한다고 말은 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표현은 서툴러도 마음으로 느낀다.
말 못 하는 짐승도 누가 자신을 예뻐하는지 안다고 하니, 하물며 내 아이가 모르겠는가.
우리 둘째가 그랬나 보다.
보기만 해도 귀엽고 자는 모습은 천사 같은 아이인데,.. 힘들었다.
첫째처럼 오래 기다렸던 아이도 아니었고, 솔직히 말해 계획에도 없던 아이였다.
복직한 지 두어 달,
겨우 나를 되찾았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일도 육아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생명 앞에 나는 망설였다.
아이를 사랑했지만, 이제 막 찾기 시작한 '나'를 포기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자장가는 나오지 않았다.
노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데, 그 마음이.. 없었다.
하나와 둘은 다르다고 했다.
두 배가 아니라 네 배로 힘들다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둘째를 낳고 많이 아팠다.
방광염이 생겨 1년이 넘게 약을 먹었고,
가슴에 멍울이 생겨 제거 수술도 받았다.
자궁에는 혹이 생겨 수술했고, 피부에는 처음 듣는 사마귀가 퍼졌다.
보약을 짓고 레이저 치료를 받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흰머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내 몸의 변화가 서글펐다.
어느 순간, 그 모든 원인이 아이 탓처럼 느껴졌다.
사랑했지만, 마음을 전부 줄 수는 없었다.
그 시절, 나는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다 1년이 훌쩍 지나고, 아이가 재롱을 부릴 무렵,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엄마는 언제나…”
그제야 비로소 마음을 다해 부를 수 있었다.
그 순간, 늦었지만 너무나도 안도했다.
그리고 밀려드는 자책과 슬픔, 후회…
왜 이제야 불러주었을까.
내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네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음에 안도했다.
그 시절, 내 몸은 아팠고 흰머리는 늘었으며 피부는 망가졌다. 병원을 전전하고 비싼 약을 먹으며 몸은 돌봤지만, 정작 무너지고 있는 마음은 아무도, 나조차도 보살펴주지 못했다.
자장가를 불러준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고백했다.
고해성사하듯, 그동안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남편은 말없이 안아주며 말했다.
“너무 힘들었잖아. 괜찮아.”
그때, 아이도 알고 있었을까?
내가 부르지 못했던 자장가의 의미를.
나만 바라보던 그 맑은 눈동자가, 그때도 알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