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이를 재우려 누운 밤이었다.
평소처럼 팔다리를 바르작대던 아이가 나를 불렀다.
“엄마.”
“응?”
“엄마, 나 싫어하지?”
그 한마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이 조그만 아이에게,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만 네 살도 되지 않은 아이.
‘미운 네 살, 미친 세 살’이라는 말처럼, 그 시절 아이는 매일같이 떼를 썼다.
울기 시작하면 삼십 분은 기본이었고, 길게는 한 시간을 목이 터져라 울었다.
바닥에 드러눕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달래도 혼내도 아무 소용없었다.
어느 날은 지쳐서 그냥 두기도 했다.
“그래,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나는 내 할 일 할게.”
또 어떤 날은,
“울고 싶으면 방에 들어가서 울어.”
그렇게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매일이 버거웠다.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금쪽이’인가 싶어 한숨 쉬었고, 아이를 들여다보기보다,
그저 ‘내가 왜 이렇게 힘든가’만 들여다보았다.
티비에선 말한다.
아이의 문제는 대부분 부모와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나는 내 문제를 보지 않았다.
아이만 문제라고 생각했다.
밥을 먹었으면 양치질을 해야 하고,
밖에 나가기 전엔 씻어야 하고,
약속한 시간엔 정리하고 나와야 한다고.
내 기준, 내 리듬에 맞춰 아이를 움직이려 했고,
그 리듬을 따르지 않으면 혼을 냈다.
한두 번 부드럽게 말하다 결국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그런 나를 어떻게 봤을까.
형에게는 따듯하고 나에게는 화만 내는 엄마?
한두 번 부드럽게 말하다가 소리치는 엄마?
주말에만 같이 자는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내 몸이 피곤해서, 내가 여유가 없어서, 나 자신도 돌볼시간이 없어서. 그런 핑계로 아이를 방치했다.
물론 나는 아이를 사랑했다.
좋은 음식, 예쁜 옷, 원하는 장난감도 충분히 사주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내게 묻는다.
엄마는 나를 싫어하냐고.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그렇게 자주 말하고,
안아주었는데…
아이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이는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주지 않는 엄마.
시끄러우니까 들어가서 울라는 엄마.
밥을 먹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겠다는 엄마.
네 맘대로 하라는 엄마.
나는 아이에게 필요한 물질적인 것은 모두 주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걸 주지 못했다.
시간, 여유, 그리고 내 마음.
나는 너무 피곤했고, 너무 지쳐 있었고,
나 자신도 돌보지 못한 채 매일을 버텼다.
그래서 아이를 ‘돌본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아이의 감정은 보지 못했다.
"엄마, 나 싫어하지?”
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아이의 마음속에 쌓인 감정이 만들어낸, 조용하지만 묵직한 한방이었다.
내가 타인에게 바랐던 위로와 공감을 아이에게는 해주지 못했다.
남편에게도 “그냥 들어줘, 위로해줘”라고 말하던 내가,
정작 아이가 힘들어할 때는 왜 분석하고 통제하려 들었을까?
아이들도 안다.
미세한 표정, 말투, 눈빛, 한숨.
누가 나를 좋아하고, 누가 나를 귀찮아하는지.
내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했던 내 아이는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그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나, 싫어하나?”
그 물음표 하나가,
내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파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