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순간도 지나고 나면 허허거리며 웃고 만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리 힘들어도 막상 한때만 버티면 좋은 일들만 기억하는, 꽤 똑똑한 대뇌시스템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간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2개월 전만 해도 그랬다. 이제 두 번 다시 사랑하지 않을 테야, 하며 되뇌고 또 되뇌었다. 사랑은 이기적인 것. 결코 순수하지 않은 것. 마치 순진한 커피 원액을 이용만 해 먹는 '커피 변종메뉴' 같은 사악한 것이라고 부르댔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니까, 2학기 개학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고향 친구가 부모님이 서울에 집을 사줬다며 나와 함께 살자고 했다. 왠지 서문 쪽이 싫기도 해서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숙집에서 차려주는 맛있는 음식만 먹다가 이제는 직접 해 먹거나 일일이 사다 먹어야 하는 귀찮은 면도 있겠지만, 서문에 살면서 겪었던 실연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풍수지리학에 따라 터가 안 좋았다고 자위했다. 그로부터 화곡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현실에 적응하며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왔다. 학생의 본분? 과연 그 본분이란 게 뭘까? 그렇지, 이제 그만 방황하고 공부하는 것. 세상은 뻔하고 뻔하니까 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그런데 왜 이다지도 전공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매주 치르는 쪽지시험도 부담스럽기만 했고,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미적분이나 함수와 같은 골머리만 아픈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는 걸까?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였다. 공대생인 내가 문과나 예술 쪽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이후 졸업할 때까지 현대문학개론, 시론, 시 창작론, 서양문화사, 동양문화사, 교육공학, 음악감상, 디자인 기초와 같은 다른 학과의 전공과목이나 교양과목을 모조리 수강신청 했다. 전공 이수학점에 지장이 없는 한도에서 최대한 가능한 학점을 모두 투자한 셈이다.
어떻게 된 게, 전공과목은 여전히 C와 D로 도배한 채 시들시들(?) 한데, 다른 학과는 죄다 성적이 A 일색이다. 아무래도 전공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하나 어차피 선택한 이상, 나름대로 합리화가 필요했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당시 내린 결론은 너무도 단순했다. 어차피 선택한 이상 책임을 지되, 다른 방법론을 찾아보자는 것. 전공만 잘하는 것보다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학문을 배우고 보다 다양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관심이 미치는 과목은 그만큼 애착이 커서 그런지 더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그때 철학이나 심리학도 들었다면 어땠을까. 사회학이나 정치학, 신학 따위도 들었으면 또 얼마나 좋았을까. 다만 그 점이 지금도 아쉬울 뿐이다.
그럭저럭 한 학기가 끝나갈 쯤이다. 모처럼 오래 엉덩이를 붙인 채 도서관에서 살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도 쐴 겸 남산이나 정독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으며 무미한 생활을 이어갔다. 준비가 필요했던 것일까? 오랜 고독과 기다림 후에, 마치 보답이라도 하듯 화곡동에서 운명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코 우연이란 없는 모양이다.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 예정을 지녔다고 믿을 도리밖에 없었다. 장마와 여름 햇살을 이겨낸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듯, 그동안 사무쳤을 외로움을 용케도 잘 버틴 이유인지, 내게도, 마침내, 수확의 계절이 온 것인가 보다. 벼가 계곡을 덮었던, 그 풍요로운 동네. 화곡동禾谷洞을 선택한 것 자체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 모르겠다. 화곡동은 바로 벼가 익는 계곡이었다.
어느 날, 같이 살던 친구의 사촌 여동생이 이 풍작豊作의 동네에 놀러 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청파동에 있는 여대에 합격하였다는 여자친구와 함께 온 게 아닌가. 우리는 같이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입학을 기념한다는 핑계로 술자리까지 마련했다. 이윽고 한창 분위기도 무르익었을 때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거나하게 술이 돌자 한껏 자유스러워졌다. 나이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함께 온 청파동은 무용을 전공해서 인지 외모에서 풍기는 첫인상만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느새 늙은(?) 내 마음을 향해 돌직구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수려한 외모는 덤이고 그에 못지않은 몸매라니, 정신이 혼절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싶게.
누구는 아무리 탱글탱글한 몸매라도 나이가 들면 변한다고 했다. 그래서 외모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보다는, 내면의 깊이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 마음을 온통 들썩거리게 만드는 그를 앞에 두고서, 플라토닉이라는 고상한 말은 가당치도 않았다.
“다음 주에 같이 영화 보러 갈래?"
술김에, 굳이 용기를 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툭 뱉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까칠할 줄 알았는데.
"네, 오빠."
오빠? 너무도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말하는 그가 너무 좋았다. 지금도 나이가 어릴지언정 결코 쉽게 말을 놓지 못하는데, 그때는 그랬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복학생과 신입생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법한 만남, 나로서는 화려하고도 황송한 늦바람 (?) 연애가 펼쳐진다. 주로 청파동이 주무대였지만, 둘의 가운데 지점에 속하는 신촌에서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장소와 시간 불문? 이건 꽤 도발적인 얘기일 수도 있다. 어쨌건. 사랑에 푹 빠진 늦깎이는 사랑인지, 욕망인지도 모른 채,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사랑이 전부인 나날을 보냈다.
이대 쪽으로 가는 길에 있던 무수한 가게들 중에서, 당시 유독 눈에 띄는 데가 두 군데 있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여전히 다방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유난히 특이했던 ‘콜롬비아’란 이름의 커피전문점이 그 하나였고, 또 다른 곳은 지혜의 여신, 바로 미네르바였다. 요즘에야 콜롬비아 하면 슈프레모 supremo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안데스 산맥의 해발고도가 높은 때문인지,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스트레이트 커피 straight coffee의 대명사가 바로 콜롬비아다. 브라질 산토스와 더불어 블렌딩의 베이스로도 종종 쓰이곤 한다는데, 그건 콜롬비아가 독특한 향미와 더불어 모든 커피를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때는 콜롬비아의 자자한 명성을 미처 몰랐다.
콜롬비아는 드물게도 주로 단종커피를 팔았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분한테 물었다. 비로소 단종커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단종커피는 스트레이트 straight 커피로서, 한 종류의 커피만을 사용하여 볶은 커피를 말합니다. 아라비카 종은 대부분 이 스트레이트 커피로도 손색이 없죠. 요즘은 블렌딩을 통해 단종커피의 고유한 맛과 향을 강조하면서 좀 더 깊고 조화로운 향미를 만들기도 합니다. 브라질 산토스와 더불어 블렌딩 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커피가 바로 우리 가게에서 제공하는 콜롬비아 슈프레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콜롬비아’란 곳에 대한 정보조차도. 노란색 바탕의 간판이 특이했다는 정도밖에는. 얼마 전에야 아카이브를 검색해서 1995년 3월 24일 자 동아일보에 난 기사 (본고장 커피 맛은 신촌 ‘콜롬비아’에서…)를 발견했다.
“『여기 어때』 (김수연 저 천마 간)는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분위기 있는 서울 시내의 카페와 술집 등을 체험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신촌 대학로 압구정동 등의 신세대 카페와 술집 음식점 등을 분위기와 용도에 따라 안내했다. 대학로의 ‘베티블루’는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며 음료도 비싸지 않고 영화음악을 주로 들려준다고 소개했다. 주한 콜롬비아 문화원에서 콜롬비아 커피를 홍보하기 위해 문을 연 신촌의 ‘콜롬비아’는 커피 맛이 일품이라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커피 산지 별 싱글 오리진이 유행하기 훨씬 전이었고, 로스팅 하우스나 핸드드립 전문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였다. 커피 1세대로 알려져 있는 박이추 씨의 보헤미안이 1988년에 문을 열었고, 남양주시 북한강변에 있는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의 관장인 박종만 씨가 1989년에야 홍대 앞에 커피전문점 '왈츠'를 차렸다. 보헤미안이나 왈츠가 우리나라 커피전문점 시대를 연 시초라고 하니까, 제대로 된 커피와 커피문화가 정착되기 훨씬 전인 시기였다.
역시나 커피의 맛에 이끌리기보다는 클래식을 들으며 독특한 커피문화를 즐기는 매력이 더 컸다고 할까. 아마도 커피의 맛을 제대로 몰랐던 게 맞을 것이다. 결국 ‘미네르바’가 우리의 단골 가게로 낙점되고야 말았다. 여기는 커피를 주문하면 사이폰 원리를 이용하는 기구를 내놓고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여 준다. 즉, 직접 만들어서 즐기던 커피였다. 이른바 ‘눈으로 마시는 커피랄까. 1991년도였으니까 다소 시대를 앞서간 곳이기도 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이폰 Syphon커피에 대해서 묻자, 지혜의 여신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사이폰 Syphon은 빨대를 생각하면 돼요. 사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위, 아래 두 개의 플라스크가 보이죠? 아래에 물이 담긴 플라스크와 분쇄된 원두가 있는 위쪽 플라스크가 서로 밀착된 채 진공상태를 이루고 있답니다. 알코올램프에 의해 물이 끓으면 이 가압된 물은 마치 빨대가 물을 빨아들이듯 위쪽으로 이동하여 커피와 섞이게 됩니다. 아래쪽 플라스크의 물이 모두 증발하면 알코올램프의 뚜껑을 덮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면 위쪽의 커피는 압력이 낮아져 있는 아래로 중력에 의해 저절로 이동하게 되죠. 이게 사이폰의 원리이죠”
사이폰의 원리를 어렴풋이 알게 됐지만, 무엇보다 실제로 접하니 더 와닿았다. 커피가 추출되는 과정 내내 향긋한 냄새가 온 공간을 그득 채우니까 그야말로 뇌쇄적이라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향이 기막히네요. 이제야 원리도 이해가 되고, 이 모든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사이폰 커피의 매력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네요. 자세히 설명해 줘서 감사합니다.”
사이폰 추출기구로 뽑아낸 커피의 맛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깔끔했다. 그런데 추출하는 사이에 모두를 소진한 이유일까. 막상 마실 때는 향이 많이 옅어진 뒤였다. 미네르바의 사이폰 커피의 첫 느낌은 정말 부드러웠지만, 반면에 깊고 진한 맛까지는 전해주지는 않았다. 아메리카노도 진해서 잠 못 든다고 하면, 결코 아메리카노가 좇아오지 못하는 깔끔한 끝 맛에 부드러움까지 겸비한 사이폰 커피는 나름대로 매력을 지녔다고 하겠다.
지금은 커피의 맛을 좌우하는 게 볶기 전의 커피콩 green bean, 이른바 생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바리스타 과정은 커피의 전체 24 공정 중에서 겨우 마지막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래서 생두 감별사가 각광을 받는 직업이 된 지도 오래다. 어쨌든 커피를 추출하는 독특한 방식도 미네르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지혜의 여신답게 미네르바의 공간은 너무나 현명하게도, 우리의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아직도 미네르바의 사이폰은 잊을 수 없다.
알코올램프의 불이 뜨겁게 물을 데우듯 우리의 육체도 그만큼 뜨거웠다. 하지만 램프의 뚜껑을 닫자 서서히 식듯, 사랑도 매한가지인가 보다. 사이폰의 추출 원리가 생경했고 또 신기했지만, 내게는 커피의 깊고 융숭한 맛이 더 절실했다. 과정의 신선함보다 결과가 더 절실했던 것이다. 이미 사라진 향처럼 매력도 덩달아 사라진 걸까. 어쩌면 사랑을 포장하는 외적인 이유보다 사랑의 진앙지에 더 다가가고 싶었던 이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