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 동안의 커피이야기를 마치 에스프레소 기구로 뽑아내듯 쏟아냈다. 추출된 그 맛 속에 녹아 있는 커피와의 인연, 그 황홀하고 소중한 만남이 그대로 온전히 담겼을까? 사뭇 궁금하다. 요즘에도 새로운 추출방식과 커피콩을 만나곤 한다. 무엇보다 추출기구의 진보는 좇아가기가 힘들 지경이다. 드리퍼와 서버 사이에 얼음을 통과하도록 중간 서버를 둬서 깔끔하면서도 맛과 향이 진한 아이스커피를 추출하는 기구부터 시작해서, 휴대용 에스프레소 기구도 본 적 있다. 드리퍼의 재질도 정말 다양하게 출시가 되고 있다. 심지어 커피분쇄기와 결합된 서버도 보여서 덜컥 샀다.
문득 커피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뭘까를 생각해 본다. 처음 떠오르는 게 음악이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음악과 함께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근사한 일이다. 추출한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서 산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땀 흘린 후 산정에서 마시는 커피는 선경에 머무는 듯 황홀하다. 부스스 잠 깬 아침에 즉석에서 내린 에스프레소 한 잔도 새로운 하루를 맞는 그 설렘을 톡톡히 누리게 한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커피와 함께!
이탈리아 음식은 짙은 커피로 마무리를 해야 제대로 먹은 듯하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가 발원하고 보편화된 것일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 궁합이 맞다. 스파게티, 라자냐, 리조토 등을 먹은 다음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무언가가 빠진 듯 허전하다. 다음으로 커피와 잘 어울리는 걸 꼽자면, 물론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담배가 아닐까? 자연스레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가 떠오른다. 제목부터 한 수 접고 들어간다. 물론 내게는 특이하게도 맥주와도 함께 하지만.
대학시절, 같은 과 친구 중에 시네필이 있었다. 나도 어지간히 영화를 보는 편이었는데 그 친구를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장선우, 박광수의 영화에 대한 비평을 손수 타이프라이터로 쳐서 내게 줬는데, 지금도 그 글을 가지고 있다. 색 바랜 종이와 녹슨 스테이플러의 자국이 세월의 더께를 말해 준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30년 전에 대학생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 친구는 졸업 후 결국 국문과로 편입했다. 늘 나와 함께 문학과 영화를 얘기하던 친구.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서울을 떠나 멀고 먼 울산에 고립됐다고 생각하니 울울했다.
“나, 울산에 내려가면 면벽수도 한 채 영화만 볼 테니 추천하고 싶은 영화 좀 보내줘.”
그 국문학도는 시험답안을 작성하듯 자그마치 100여 명의 감독과 대표작을 일일이 손으로 적어서 팩스로 보내줬다. 이 답안으로 잘 버텨 보라는 듯이. 아쉽게도 팩스에 적힌 글은 휘발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한 명씩 줄 그어가며 작품을 찾아서 봤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예의 짐 자무쉬를 포함하여 특히 좋아했던 감독들이 연상작용을 거쳐 용케도 한 명씩 차례로 떠오른다. 이미 고인이 된 감독도 있지만, 지금도 신작이 나오면 가리지 않고 보는......
당시에 봤던 영화들의 감독이름을 적어보자면 대충 이렇다.
데니스 호퍼, 데이비드 린,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라세 할스트롬,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로만 폴란스키, 로브 라이너, 루이스 뷰누엘, 리들리 스콧, 리안, 마틴 스콜세지, 미카엘 하네케, 밀로스 포먼, 베르톨루치, 빌 오거스트, 빔 벤더스, 스탠리 큐브릭, 스티븐 프리어즈, 스파이크 리, 아톰 에고이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알프레드 히치콕,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애드리안 라인, 에밀 쿠스트리차, 웨인 왕, 잉마르 베리만, 장-뤽 고다르, 제인 캠피온, 존 포드, 테리 길리엄, 페드르 알모도바르, 프랑소와 트뤼포 등등.
1990년대에는 거의 이들 감독과 한 시절을 보낸 듯하다. 마침내 나도 좋아하는 감독의 이름을 100 명 이상 거뜬히 적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도 가물가물하다. 추천한 영화들을 보려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녀야 했다. 스파이크 리의 <정글 피버>와 시드니 루멧의 <허공에의 질주> 등은 청계천에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봤다. 90년대 중반께였는데, 당시에 거금 2, 3만 원씩 줬다. 이제는 비디오 테크도 없는데, 아직도 손때 묻은 그 테이프를 차마 못 버리고 있다. 그놈의 추억이 뭐라고.
당시 친구 덕분에 짐 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보았는데, 그로부터 수년 후 <커피와 담배>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너, 담배 피우니?”
“응, 커피를 마실 때만.”
모든 에피소드 별로 커피와 담배가 서로 짝을 이루는 얘기들이 펼쳐져서 꽤 흥미로운 작품이다. 몇몇 대사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담배랑 커피는 너무 잘 어울려요.”
그냥 담배를 피울 것이지 굳이 커피를 들먹인다.
“너, 커피 너무 많이 마신다고 생각하지 않아?”
연신 커피를 홀짝이는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가 보다.
“아냐, 커피는 건강에 좋지.”
카페인을 들이붓는다고 할 때는 언제고, 건강에 좋다며 자위하기도 한다.
“전, 잠자기 전에 커피 마시는 걸 즐기죠. 자기 전에 많이 마시면 꿈꾸는 속도가 빨라져요.”
연신 담배를 피우며 커피 얘기에 여념이 없다. 꿈꾸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얘기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말이다.
이기 팝과 톰 웨이츠가 나오는 장면도 기억난다. 90년대에 톰 웨이츠의 R&B 음악을 좋아했는데, 그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짐 자무쉬는 은근히 인맥이 넓은 듯하다. 담배를 끊었다고 하면서, 또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직도 담배를 피우는 게 안타깝다고도 하면서 톰은 능청스럽게 말한다.
“금연의 미학은 한 대쯤 피워도 괜찮다는 것이지. 내가 끊었기 때문에……”
톰은 유난히 ‘내가 끊었기 때문에’라는 말을 강조한다. 음악을 하는 동지이자 앙숙 같은 둘은 천연덕스럽게 담배를 피우면서, 커피와 담배는 오묘한 조화가 있다고 한참 동안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커피를 마시는 건 휴식이다. 그래서 ‘커피 브레이크’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까?
카페 안에서는 늘 만남이 이뤄졌다. 그럴 때마다 테이블에는 커피가 놓이고, 뿌연 담배연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이 흑백의 영상. 지금도 선연하다. 커피는 담배를 부른다. 아니, 그 반대일 때도 있다. 어쩌면 둘의 조화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커피와 담배를 번갈아 즐기는 로베르토 베니니는 둘 중의 하나를 끊었으면 싶었다. 그 부조화의 조화. 그래도 담배와 가장 잘 어울리는 커피는 에스프레소가 아닐까 싶다.
웨인 왕의 <스모크>는 담배가게가 배경이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인 영화로 남아 있다. 배경으로 나오는 톰 웨이츠의 음악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톰 웨이츠의 매력적인 보이스를 들을 때마다 실제로 담배의 영향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톰 웨이츠. 그 환상적인 만남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커피 덕분이 아니었을까.
소위 ‘All about coffee’라고, 커피의 모든 것을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유행하는 네스프레소, 돌체 구스토, 일리, 라바짜 등에서 나오는 캡슐커피 기계는 아직 없다. 모카포트와 더불어 캡슐커피도 에스프레소 종류에 속한다고 볼 때, 캡슐커피는 일종의 간편한 에스프레소 기계라고 할 만하다.
“우리도 캡슐커피 기계 하나 살까?”
기어코 아내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회사에서도 캡슐커피 기계가 각 층마다 비치돼 있어서 각자 캡슐커피만 가져가면 쉽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로비에는 캡슐커피 자동판매기까지 있다. 회사에서처럼 자연스레 캡슐커피를 집에서도 즐기고 싶었다. 심지어 출장지의 호텔 방에도 구비돼 있을 정도로 점차 보편화돼 가고 있는 중이다. 커피에 관해서는 첨단의 유행을 좇고 싶다. 어차피 삶은 궁극의 맛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기에. 내겐 궁극의 맛은 커피로 향한다.
“아예 집에다 커피박물관을 만들게? 드롱기도 집에서 잠자고 있는데, 캡슐커피까지 먼지 뒤집어 씌우고 싶어? 나름대로 생두를 직접 로스팅해서 제대로 커피를 즐기고 있는데, 매번 돈을 들여서 장비를 사 모으고, 기어코 캡슐커피까지 살 필요가 있겠어?”
틀린 말이 한 군데도 없다. 그래도 추출속도가 빠르기도 하고, 후처리도 간편하고, 맛도 에스프레소만큼 깊으면서 무엇보다 깔끔하다며 설명해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알았어. 나야 뭐, 핸드드립이나 미스터클레버를 좋아하니까.”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어느새 나온 지 10년이 된 캡슐커피는 현대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그야말로 커피의 혁명이다. 요즘 환경적인 측면에서 독일의 함부르크는 아예 캡슐커피를 제한한단다. 어떻게 보면 현명하다. 캡슐커피를 포장하기 위해서는 플라스틱이든, 알루미늄이든 일회용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편의도 좋지만, 캡슐커피를 즐기기에 앞서 다른 부정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며칠 정도 호텔에 머문다면, 캡슐 커피를 챙겨가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다. 당연히 그 호텔에 캡슐커피 기계가 있는지는 확인해야겠지만. 요즘도 출장 가서 호텔방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캡슐커피 기계가 있는지부터 살핀다. 괜히 기계가 있으면 고급호텔만 같다.
캡슐커피가 가진 흠이라면 예의 환경적 문제를 떠올려야 하지만, 가성비와 선택의 폭이 제한돼 있다는 점, 직접 원두를 갈아서 추출하는 방식에 비해 신선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 등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캡슐커피도 일종의 에스프레소에 해당하니까 때로는 싱글 오리진의 향미가 그리울 때도 있다. 싱글 오리진 single origin이라 하면, 지리적으로 단일 지역 내에서 자란 커피를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커피의 이름은 재배되는 지역명(이나 농장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캡슐커피는 이 맛까지는 만들어내지 못한다. 세상이 제아무리 편리해져도 옛 방식의 순수한 맛이 때때로 그리울 때가 있는 법이다.
핸드드립을 포함한 대부분의 커피 추출기구는 추출과정을 통해 향긋한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저 멀리서도 냄새를 맡고 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단순히 커피의 맛만 즐기는 것에서 나아가 커피를 분쇄하고 추출하는 과정에서 향이 퍼지기 때문에 방향효과라는 부가기능까지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에스프레소나 캡슐커피는 그 운치까지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긴 하다. 물론 간편하게 커피를 즐기는 데는 그 무엇도 따라올 수 없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기를 잘했다. 부정적인 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커피에 대한 그리움이 더 쌓이게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