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추출의 세계가 나날이 진보하고, 커피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선 듯하다. 물론 지나치게 커피에 의미를 부여한 측면도 있지만 말이다. 안개가 많아서 차 재배에 좋다는 스리랑카의 차 재배 농가가 만약 다른 곡물을 생산했으면 어땠을까.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부터 끝없이 이어진 차 밭만을 고수했던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우리가 즐기는 차, 커피에도 무수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종이 필터의 가장자리로는 물을 내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가운데 부분의 크레마를 부풀게 하며 조심스럽게 핸드드립을 한 것도 귀동냥이었다. 30년 이상 핸드드립을 해오면서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었고 자연스레 추출 데이터를 스스로 터득했지만, 내게도 스승이 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면서 학원에서 배운 바를 세세히 가르쳐 줬던 내 스승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공정무역 커피에 대한 세미나가 있는데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을지로입구 역 안에 있는 핸드드립 전문점을 운영하는 아가씨다.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어느새 단골이 되었다. 사무실에서도 핸드드립을 해서 커피를 즐기기에 주말마다 집에서 일주일 분량의 커피를 볶는 편이다. 그런데 미처 볶아놓은 커피가 없으면, 그 아가씨가 볶은 커피를 사곤 한다. 그럴 때면, 투 샷을 넣어서 레귤러에 가까운 아메리카노를 공짜로 주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핸드드립 수업을 한다고 해서 신청했고 우리는 사제지간이 되었던 것. 수강생은 단 세 명. 첫날은 칼리타를 이용하고, 둘째 날은 하리오와 코노 드리퍼를, 셋째 날은 융 드리퍼를 통해 추출하는 실습을 했다.
어쨌건 커피와 관련된 세미나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마침 장소도 회사에서 멀지 않은 남대문 쪽이다.
"그럼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죠. 일종의 '대안커피'에 대한 이야기겠죠? 저도 공정무역 커피를 처음 접해본 건 동네의 재활용품을 파는 가게에서예요. 우연히 발견한 후 냉큼 사다가 추출해서 마셔본 적이 있지만 공정무역이 무엇인지 사뭇 궁금하긴 하네요."
싱글 오리진과는 달리 약간 향미가 떨어진 듯해서 즐겨 찾지는 않았지만, 커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메모를 하고 세미나 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핸드드립 수업을 하던 중에 내 스승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커피와 관련된 종사자 중에서 최고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야 로스터나 바리스타가 아닐까? 짐짓 농담하듯 말했다.
“당연히 손님이겠죠, 하하. 그냥 해본 소리고요, 로스터나 바리스타는 아닐 듯하고, 대체 누구예요?”
그런데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큐그레이더 Q-Grader라고 불리는 원두감별사랍니다. 미국 스페셜티 커피협회 산하에 CQI라고 불리는 커피품질연구소(coffee quality institute)가 있는데, 이곳에서 까다로운 시험을 거쳐야 자격증을 받을 수 있어요. 발 빠른 한국사람 중에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도 꽤 많다고 들었어요.”
큐그레이더는 처음 들어본다고 하자, 다소 신이 난 목소리를 얘기를 잇는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큐그레이더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길성용 씨는 큐그레이더 시험 감독관이기도 해요. 감독관 24명 중에서 유일한 동양인이기도 하고요. 골프선수 박세리의 매니저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큐그레이더 자격증을 따서 학원까지 열었죠. 지금은 감독관이기도 하고요. 처음 박세리 선수가 대중에게 각인된 장면 있잖아요? 공이 워터해저드에 들어가자 그 안에 들어가서 치던, 소위 ‘맨발투혼’ 장면 말에요. 그때 곁에 있던 사람이 바로 길성용 씨예요. 아마도 박세리 선수의 매니저로 일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명성이 자자할 걸요.”
커피의 소비량이 급증하고 수많은 프랜차이즈에서는 큐그레이더를 채용하는 바람에 각광받는 직업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커피의 유명세로 인해 새로 생겨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세계에 큐그레이더가 1,900명 정도가 있다는데, 그중에서 한국사람이 400여 명이고, 이들 중에서 300여 명이 바로 길성용 씨를 거쳐갔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동남아에서도 한국에 와서 길성용 씨로부터 큐그레이더 자격증을 딴다고 하니 대단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한 가지 더요. 큐그레이더는 주로 아라비카 생두의 품질만 평가하는데, 로부스타 품종은 별도로 부른다고 해요. 알그레이더 R-grader라고 말이죠.”
로부스타라고 해서 ‘알’로 시작하는가 보다. 아무튼 새로운 커피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마침내 세미나가 열리는 날이다. 퇴근 후 부랴부랴 그곳을 찾아갔다. 세미나장 입구에는 공정무역 커피와 관련된 책도 팔고, 사진도 전시돼 있고, 또 한 켠에서는 공정무역을 거친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추출해서 참석자들이 시음할 수 있도록 했다. 주최 측의 두 스태프가 부지런히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세미나는 미국의 공정무역 협회에서 온 나이도 지긋한 할아버지들이었고, 동시통역을 하며 진행되었다.
단순히 커피의 종류가 어떻고, 어떤 추출기구가 있으며, 어떻게 하면 최고의 맛을 추출할 수 있냐, 하며 커피의 세계를 맛에만 집중한 측면이 컸다. 세미나의 내용은 커피의 세계를 너무 좁게만 바라보지 말고, 일종의 '커피의 사회학'에 눈뜨라는 전언이었다. 커피 재배 농부와 서로 공생해야 한다는 당위와 소비자로서 커피를 즐기는 일에도 권리를 내세우기에 앞서 무수한 농부들의 희생까지 떠올려야 한다는 명제를 동시에 생각하라는 것. 공정무역의 모토와 영역이 전 세계 모든 커피농장을 아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비단 커피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기호식품을 생산하는 농부들에게도 공정무역의 손길이 미치기를, 그저, 빌뿐이다.
커피나무를 재배하고, 커피콩을 채취해서 정제 pulping 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생두를 생산해 내는 농부들의 삶을 슬라이드로 보여줬는데, 그야말로 빈곤 그 자체였다. 수요가 많아도 유통과정에서 마진이 늘어날 뿐이지 그들의 삶은 여전히 궁핍하기만 했다. 농부의 손길 하나하나가 커피 맛을 좌우하는데도 정작 농부의 삶은 배제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마침내 농부들은 커피재배만으로 생계가 곤란해지자 다른 농작물로 선회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주요 커피소비자들이 공정무역을 통해 커피 농부의 생계도 보장하면서 좋은 품질의 생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이를테면, 메이저 커피 프랜차이즈가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커피 농가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해서 직접 사들이고, 농가에는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이른바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 개념이다.
세미나에서 새롭게 안 사실도 있다. 비수확기에 양봉과 같은 일거리를 제공해서 지속적인 수익 창출을 돕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있어서 더 품질 좋은 생두를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 공정무역을 통한 커피 유통에 한 표를 던진다. 결국 생산자의 최소 생활을 보장하면 보다 품질 좋은 생두를 확보할 수 있고, 이로써 커피의 맛은 이미 반 이상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제 커피를 향한 지난 30여 년의 사랑이 종착지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커피를 더 오래 즐길 수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기도 했다. 커피를 만나면서 간간이 엇길로 샜지만, 궁극의 길은 서로 통하리라 믿는다.
만약 누군가 커피의 맛을 좌우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렇다.
"커피의 맛은 생두의 품종과 원산지 종류, 정제 품질, 로스팅과 분쇄, 추출하는 바리스타의 능력, 심지어 온도나 습도와 같은 환경의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중에서 커피 맛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생두의 품종과 품질입니다."
흔히 생두(커피콩)는 커피나무의 열매에서 외피와 과육을 분리 후 세척하는 정제과정을 거친다. 이 공정을 거친 후 건조와 숙성을 거치면 로스팅하기 전의 생두가 얻어지는데, 바로 이 생두에서 이미 커피의 맛이 대부분 결정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로스팅을 꼽을 수 있습니다."
로스팅을 달리 하면서 원두의 종류에 따른 맛의 차이를 기록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최상의 데이터를 구하는 것도 커피를 즐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덤으로, 생두를 사서 직접 로스팅을 하면 훨씬 저렴하고 맛있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로스팅한 원두를 구입할 때보다 1/4에서 1/5 가격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점은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고가의 로스터 roaster보다 팬 로스팅에도 장점이 많다. 무슨 일이든 기구에 의존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손길이 더 갈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요즘은 2만 원대의 수망 로스터도 시중에 나오지만, 그도 아니면 집에 있는 손잡이가 달린 가벼운 냄비로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커피의 맛은 다양한 커피의 추출에 달렸다고 봅니다."
필터커피에 해당하는 핸드드립. 스팀을 이용하는 에스프레소, 모카포트, 사이폰. 직화로 커피를 추출하는 터키식 커피나 아라빅 커피. 그리고 프렌치프레스나 더치커피와 같은 다양한 방식이 있다.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맛은 또 한 번 바뀐다. 분쇄도에 따라서, 혹은 물의 온도와 속도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일률적으로 맛의 차이를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원하는 맛도 다를 수 있으니까.
나는 꿈꾼다.
아내와 함께 운남성을 거쳐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커피 산지를 둘러보는 꿈. 에티오피아, 르완다,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 콩고의 농장을 찾은 후, 지부티공화국을 거쳐 예멘의 모카항에 들르고, 그다음은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탈리아 등지를 도는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대서양 너머 중남미의 콜롬비아, 과테말라, 브라질, 에콰도르 등이고, 마지막으로 하와이를 거쳐 파푸아 뉴기니까지 가는, 이른바 커피 산지여행을 하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다. 각 지역에서 추출해서 즐기다가 최상의 맛을 찾으면 하나씩 싱글 오리진 생두를 사갖고 올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여행지를 회상하며 하나씩 팬 로스팅해서 핸드드립, 모카포트, 더치, 프렌치프레스, 에스프레소, 클레버 등으로 커피를 즐기는 상상을 한다.
또 한 번의 30년이 지나 멀고 먼 대장정의 소회를 소곤소곤 말할 수 있기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