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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만나다

10장: 별다방이 사랑하는 프렌치프레스, 2013

by 허류

역마살. 늘 떠돌아다니는 운명인가 보다.

결혼 전에 울산에서 근무할 때, 퇴근 후 미술학원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원장님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녀서 친구처럼 지냈다.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가 밖에서 만나면 이름만 부르기도 했다. 어느 주말, 선생님과 함께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유명하대서 울산에서 부산까지 물어 물어서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 두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묻더니, 첫 마디가 둘이 안 맞는단다.


"저희 궁합 보러 온 것 아닌데요?"


우린, 그냥 스승과 제자 사이일 뿐이랍니다. 그러자 대번에 선생더러 의사가 아니냐고 한다. 사주에 날카로운 칼이 보인다며. 따지고 보면, 의사와 조각가는 둘 다 메스를 필요로 하니 사주도 비슷한가 보다.


이윽고 내 차례.


"자넨 좀 특이한데? 사주에는 여덟 글자가 있는데, 자네는 자그마치 '수水'자가 네 개나 돼. 그중의 한 '수'는 두 개인 것과 같지."


그렇다면 팔자에 '수'가 5개인 셈? 불, 나무, 쇠, 흙도 골고루 섞일 것이지 온통 물 천지란 얘기다. 올바른 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덧붙인다.


"몸속에 물이 많으니 욕망이 넘친다는 얘길세. 어떤 식으로든 물을 빼줘야 한다네. 땀이든 뭐든 간에. 자네, 땀 많이 흘리지? 그리고 자주 물을 보충도 해줘야 하고. 부지런해야겠구먼. 한가할 틈이 없겠어."


한가할 틈이 없다? 고달픈 인생이란 얘기로 해석이 된다. 땀이 많은 건 맞는데, 물도 자주 보충해야 한다?


확대해석을 하자면, 커피도 물은 물이다. 커피뿐 아니라 차도 가리지 않는다. 녹차를 좋아하지만, 백차, 황차, 청차, 홍차, 흑차도 가리지 않는다. 스님한테 다도를 배운 후, 하얀 다기의 틈새와 다보에 녹찻물이 밸 만큼 마셨고, 청차에 속하는 철관음을 어렵게 구해서 중국 다기 세트로 즐기곤 했다. 중국 친구한테 부탁해서 사다가 모아놓은 보이차가 집에 그득하다. 보이차는 완전 발효차로서 흑차에 가깝다고 알고 있다.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일화의 초정리 광천수라는 탄산수 1.5 리터를 매번 박스째 주문해서 드셨다. 톡 쏘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도 외국에 가면 비싸지만 탄산수를 사서 마시곤 한다.


어느 날엔가 농구를 하고 와서 목마르다고 1.5 리터 한 병을 한꺼번에 다 마시기도 했다. 하여튼 땀도 많이 흘리고 물도 엄청 먹어댄다. 적게 흘리고 적게 먹었으면 좋으련만. 팔자가 그런가 보다.


"그런데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 멀리 외국으로 계속 떠돌아다닐 운명이야."


그때까지는 외국에 나간 적도 없는데, 과연? 20년이 훨씬 지나서 되돌아보니, 얼추 맞긴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도 말레이시아 조호르 주의 동쪽 끝인 데사루 Desaru의 어느 호텔이니까. 많이도 돌아다녔다. 출장이나 발령을 받아서 간 곳이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쿠웨이트,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UAE, 아제르바이잔,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고, 필리핀, 라오스, 태국, 인도네시아, 요르단, 네덜란드 등으로 여행도 갔으니까. 커피 존에 속하는 아프리카와 중남미는 여전히 아껴두고 있지만.


본의 아니게 의사가 되기도 했고, 해외여행 한 번도 나다닌 적 없는데도 역마살이 있다는 얘기도 확인한 채 우리는 그곳을 나섰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선생과는 지금도 친구로 지낸다. 궁합이 안 맞는다고 해서 지레 선을 그은 때문일까?


프렌치프레스를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역마살의 연장선에서, UAE의 오지에 출장을 갔을 때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근처 다운타운에 있는 마트에 쇼핑하러 간다는데, 마침 도착한 다음 날이 휴일이었다. 마트에는 의외로 한국인이 많이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마실을 나오듯 딱히 갈만한 곳이 이곳뿐인가 보다. 살 것도 없으면서 마트 곳곳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이제 더는 갈 데가 없다.


마트를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그 흔하디 흔한 핸드드립 세트가 도무지 뵈질 않는다. 미처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다. 집에 네 가지 종류의 드리퍼가 합쳐서 열 개 가까이나 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당장 핸드드립 기구가 없는데. 장기간 출장이라 짐이 많긴 했다. 커피를 챙기면서 설마 현지에도 있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아랍식이나 터키식 커피가 주류를 이루는 곳이니 나 같은 외국인 외에는 아예 필터기구는 찾지도 않나 보다.


허탕을 치고 나오다 발견한 별다방(스타벅스). 예의 한국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아예 책을 펼쳐 들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사람도 더러 보였다. 여가를 즐길만한 게 참 없긴 한가 보다. 간혹 칸두라를 쓴 현지인도 있지만, 손님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서 여기가 한국인지 착각될 정도다. 여기 스타벅스에서 구할 수 있었던 추출기구가 바로 프렌치프레스였다.


같이 근무하는 요르단 친구가 사용하던 기구여서 나도 이 참에 동참하기로 했다. 실은 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모하메드라는 이 친구는 프렌치프레스에 스타벅스에서 사 온 아라비카 원두를 넣고는 이를 추출해서 즐기곤 한다. 직화가 가능하면 아마도 터키식이나 아라빅 커피를 즐겼을 텐데 말이다. 한가한 오후에 커피를 즐기는 이 친구에게 슬쩍 물어봤다.


“모하메드! 너도 터키식이나 아라빅 커피 좋아하지?”


한국 직원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나마 터키식이나 아랍식에 가까운 맛을 내는 게 바로 프렌치프레스라고 한다.


“둘 다 카더몬 cardamon을 넣는다는 건 아는데, 터키식과 아랍식 커피의 차이점을 좀 쉽게 설명해 줘?”


물론 웹서핑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보고 즐기면서 자란 친구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터키식 커피는 스위트 커피라고 부르죠. 50% 정도의 미디엄 로스팅한 원두와 풀시티 Full City 이상으로 로스팅한 원두를 반반씩 섞어요. 이를 분쇄할 때 바로 카더몬과 기호에 따라서 설탕을 넣죠. 무엇보다 터키식 커피는 분쇄를 아주 곱게 한답니다.”


그러고 보니 터키식 커피원두를 처음 봤을 때, 밀가루만큼이나 고왔던 기억이 난다. 내처 설탕도 안 넣는 경우도 있는데 왜 스위트라고 표현하냐고 물었다.


“카더몬을 넣고 갈아놓은 커피의 냄새가 너무 달콤하지 않나요? 그래서 스위트라고 부르죠. 카더몬 너무 맛있어요.”


카더몬과 커피를 분쇄한 향이 달콤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사람들이 터키식 커피를 처음 접할 때도 이 카더몬 향 때문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이제는 아랍식 커피를 설명할 차례다. 한참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아랍식 커피를 분쇄한 상태와 추출한 커피가 함께 실린 사진을 먼저 보여줬다.


“아랍식 커피는 사진처럼 원두를 굵게 갈죠. 대신에 스토브나 숯불 위에서 40분 정도 둔답니다. 터키식 커피와 달리 설탕은 넣지 않고요.”


이제야 둘의 차이를 조금 알 듯하다. 인터넷에서도 차이를 읽었지만 이 친구처럼 설명해 준 데는 없었다. 아무튼 아랍식 커피는 커피라기보다 엷은 홍차나 생강차에 가까운 모양이다. 굵게 분쇄하는 것은 아랍식 커피제조법과 프렌치프레스가 묘하게 닮았다. 어느 날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프렌치프레스에 아라빅 원두를 넣으면 맛은 어때?”


물론 괜찮다고 하면서 덧붙인다. 이미 시도해 본 모양이었다.


“그래도 40분을 스토브 위에서 우려낸 맛과 같을 리가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두의 종류는 달라도, 심지어 차 tea 종류까지 제각각 맛을 척척 뽑아내는 꽤 기특한 녀석임을 다시 확인한 순간이다.


그런데 얘가 의외로 장점이 많다. 우선 휴대성이 좋다는 사실. 드립 커피만 해도 필터, 드리퍼, 서버, 드립포트를 들고 다녀야 하는데 반해, 프렌치프레스는 이 기구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핸드드립도 제한적으로 필터와 드리퍼만 있어도 그런대로 가능하지만, 그건 드리퍼의 종류가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프렌치프레스를 통해 맛본 커피는 독특하고 깊었다. 커피 고유의 유분에 아로마까지 빠뜨리지 않고 모두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커피뿐 아니라 차도 우려낼 수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소위 전천후 브루잉 brewing 장비라 할 만하다.


단점이라고 하면 역시 성가신 후처리를 꼽아야 한다. 추출한 후 매번 커피찌꺼기와 함께 필터에 잔류돼 있는 커피 가루도 일일이 세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주방에서 세척하면 곧잘 싱크대가 막힌다. 터키식 커피처럼 커피가루가 잔에 남는 경우도 있어서 커피와 함께 미세한 파우더가 입 안으로 섞여 들어오기도 한다. 깔끔한 핸드드립 커피에 적응돼 있다면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최대한 거름망을 천천히 내려야 하고, 잔에 따른 후에도 가루 Grounds가 가라앉을 시간 동안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커피의 분쇄도도 일반 핸드드립보다 굵어야 해서 바디감이 약해질 수 있지만, 이는 추출 시간을 늘려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다. 2, 3분 이상 기다리면 의외로 특유의 커피유분 coffee oil과 함께 아로마 향과 바디감이 묵직하게 되살아나서 다른 방식보다 외려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요즘은 일부 커피전문점에서 프렌치프레스가 메뉴에도 등장했다. 주문하면 기구와 함께 나와서 순서에 따라 스스로 제조한 후 즐길 수 있고, 여기에 뜨거운 물만 추가하면 한두 번 더 내려 마실 수도 있다. 본인의 취향이 가미된다는 사실이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처음 접했을 때 그 맛에서도 이끌렸다.


다양한 커피제조법으로 인해 커피 맛의 미세한 차이를 즐기느라 이것저것 장비를 사둔 것이 집 안에 한가득 쌓여있다. 핸드드립 세트, 더치커피 기구, 에스프레소 기계, 모카포트, 터키식 커피 용 체즈베와 이브릭, 미스터 클레버 그리고 프렌치프레스까지.


프렌치프레스의 휴대성마저 미스터 클레버한테 자리를 내주게 생겼지만, 원두커피든, 차든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것은 프렌치프레스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출장지에서 산 프렌치프레스 기구를 집에 갖고 왔더니, 크기만 다르지 똑같은 게 집에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내가 차를 우려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커피추출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했기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씩 아내로부터 눈썰미가 없다는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아뿔싸, 미용실에 갔다 온 다음 날이었다.


"헤어스타일 바뀐 것 같네."


슬쩍 운을 뗐더니, 차가운 반향만 돌아온다.


"어제 했거든!"


참, 빨리도 알아챘다며 눈을 흘긴다. 아내는 이미 세상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프렌치프레스로 커피를 즐길 때면 괜스레 아내를 힐끔거린다. 아무려나 색다른 커피 맛을 느끼려면 후처리가 성가셔도 충분히 시도할 만하다.


덴마크의 보덤 Bodum에서 개발한 것인데, 프랑스인들이 즐겨 사용한다고 해서 프렌치프레스라고 불려진 만큼, 프랑스의 일반 가정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모카포트가 이탈리아 가정을 휩쓴 것처럼 말이다. 스타벅스에서 이 기구를 처음 접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프렌치프레스는 스타벅스 창립멤버들이 기장 즐겼고 또 추천하는 추출방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프렌치프레스와 드리퍼의 장점이 결합한, 그야말로 똑똑한 기구인 미스터 클레버가 새삼 기억난다. '참을 수 없는 이 간편함'이라는 수식어는 충분이 매력적이다. 딱히 드립의 테크닉도 필요 없다. 물을 콸콸 부어도 상관이 없으니까. 나날이 진보하는 커피의 신세계. 그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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