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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만나다

9장: 에스프레소와 모카포트는 형제, 2010

by 허류

세 명의 누나를 둔 덕분일까? 어릴 때다. 집에서는 누나들 등쌀에 기를 펴지 못했다. 새벽같이 가게에 나가시는 부모님 대신 누나들이 엄마 노릇을 했던 것이다. 자고 난 다음에 이부자리 정리를 해야 했고, 내 방 청소는 직접 해야 했다. 심지어 바느질도 배워야 했다. 여간 귀찮지 않았지만 누나가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집에 놀러 온 누나 친구들한테 사랑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

"안녕, 귀여운 친구!"


매번 집에 놀러 온 누나 친구들은 나만 보면 귀엽다고 했다. 정녕 귀여운 줄로만 알았다. 덩달아 나도 누나 친구들이 좋았다.


청년기에 접어들어도 그때의 기억이 남아서일까? 나이가 같거나 적더라도 응석을 부리고 기대기만 하며 자꾸만 누나를 대하듯 했다. 내게 이성은 늘 누나 같은 존재였으니까.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할 텐가?


돌이켜보건대, 3수생도, 부천의 비엔나 여인도, 청파동의 무용수도, 공무원 출신의 패션디자이너 지망생도, 친동생 같은 드라마작가나 싱가포르 여인과도 인연이 안 닿은 이유가 다 있었다. 그래서 더치커피 같은 아내는 내 삶의 구원투수다. 어쩌면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듯도 하다.


커피의 궁구를 찾아 헤맸다. 늘 새로운 커피와의 만남을 바랐듯, 천성이 만족을 모르는 걸까? 끊이지 않는 호기심. 커피를 만난다는 핑계로 여자를 만났던 시절이 보랏빛으로 아스라하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20여 년의 세월 동안 나는 '아내바라기'가 되었다.


몇 해 전에 귀천하신 마광수 선생의 영향인지, 마음 한 곳엔 (나만의) 야한 여자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무대 메이크업을 한 촉촉한 눈망울에, 머스크나 장미향이 강한 향수를 뿌리고, 모니카 벨루치처럼 담배를 피우며, 아침 햇살을 받은 채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모습. 행인지 불행인지, 에스프레소를 만날 때까지 그 여신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직장 동료와 회식을 한 후 가급적이면 2차로 커피숍을 찾는 편이다. 시원하게 맥주 한 잔 더할까? 보다는, 에스프레소 한 잔씩들 하고 가자! 는 선배 덕분이기도 했다. 프랑스 유학파인 선배가 유학 시절에 자주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서 에스프레소 마니아가 됐다는 이유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물론 맥주집으로 직행하는 부류도 있게 마련. 아무려나 불콰해진 얼굴이지만 술을 깨는 데는 에스프레소의 짙은 맛이 톡톡히 한몫을 한다. 그 진한 에스프레소를 도피오(더불)로 들이켠 후 시원한 물 한 잔과 함께면 입 안이 상쾌해지고 정신도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너도 에스프레소 좋아하니?"


커피는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말해야 하나?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듯, 심리적이자 생리적인 이유로 몇몇 커피의 종류를 꺼리긴 하지만. 흐흐.


"그럼요, 선배. 저도 에스프레소 좋아합니다. 선배와 같은 도피오 고를게요."


선배는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되 젓지 않는다고 한다. 에스프레소를 마신 후에 녹지 않은 설탕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난 뒤 물을 마셨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렇게 마신다는데, 그것도 개인의 취향이 아닐까?


커피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가 카페인이다. 에스프레소가 단순히 진하다고 해서 카페인 함량이 많은 건 아니다. 의외로 에스프레소는 공기를 압축하여 고온 고압에서 짧은 순간에 커피를 추출하기 때문에 카페인의 양이 일반 드립커피보다 적다.


커피원두의 2–3 %가 카페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커피 한 잔에는 일반적으로 60-90 ㎎의 카페인이 녹아 있다고 한다. 베트남,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나 브라질에서 많이 생산되는 로부스타 종은 아라비카 종보다 제조법에 상관없이 카페인 함유량이 더 많지만, 열대에서도 잘 자라고 병충해에도 강해서 커피 생산량의 약 30% 이상을 차지한다. 다만 쓴 맛이 강하고 향미가 아라비카보다 덜하다는 게 흠이다. 코피오의 원료이기도 하고.


'카페인 = 커피'를 연상할 만큼 커피는 카페인과 동일시하지만, 의외로 차, 코코아, 콜라 등에도 상당량의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다. 굳이 카페인에 그렇게 민감해질 필요는 없다. 카페인은 중앙신경계와 대뇌 혈액순환에 영향을 미치는 흥분제의 일종으로, 인체의 활력을 높여주는 한편 두통을 감소시키는 효과도 있다. 이뇨효과, 정신을 맑게 하는 각성효과, 집중력을 향상해 주는 효과도 두루 지녔다. 과다하게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으면 신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커피 한 모금만 마셔도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피를 마시고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 카페인의 영향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싶다.


커피의 매력 중의 하나는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즐기는 것. 에스프레소도 좋지만, 누긋한 순간을 즐기려면 넉넉한 양도 중요한 요소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면 꼭 샷을 추가하는 편이다. 에스프레소에 가까우면서 동시에 커피를 마시는 시간도 확보한다. 외국에 나가면 에스프레소와 레귤러가 일반적이다. 한국에도 메뉴에 레귤러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경주라 불릴 만한 고도 말라카 Malacca에 갔을 때다. 16, 17 세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가 근대에 들어 영국의 식민지배도 받은 이유로 복합적인 문화가 곳곳에 스며있는 꽤 근사한 곳이다. 신비스럽게도 도시 전체가 5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말라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밖에 없었나 보다. 외형뿐 아니라 문화도 고스란히 남아서 그런지 코피오도 당연히 있지만 외려 유럽의 커피문화와 더 닮았다. 무엇보다 메뉴에 아메리카노가 없다는 사실! 그 대신 롱 블랙과 에스프레소에 해당하는 숏 블랙으로 구분돼 있다. 롱블랙은 레귤러와 비슷하다. 말라카에 와서 보니, 우리나라의 일반 커피전문점에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사이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는 생각을 다시 들게 했다. 언제부터 진한 커피를 선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밋밋한 맛은 매력이 없다.


퍼시 애들론의 <바그다드 카페>는 비디오로, DVD로, 최근에는 감독판까지 30년에 걸쳐서 세 번이나 본 영화다. 이라크가 아닌, (황막한?) 켄터키 주에 있는 바그다드가 배경인 영화다. 바그다드의 풍광을 잡아낸 영상미도 극치지만, 무엇보다 제베타 스틸 Jevetta Steele이 부른 “Calling you”라는 주제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감미롭게, 때로는 호소력 짙은 간절한 목소리로, 그저 제베타 스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멋진 영화다. 재즈 싱어인 홀리 콜이 부른 “Calling you”도 좋지만, 제베타 스틸의 음색이 이 영화의 배경과 더 어울린다. 하나의 연쇄효과라고 할까,

기어코 제베타 스틸의 가스펠 음반인 'African Portraits'를 사기도 했고, 블루스의 여왕으로도 불리는 에타 제임스의 “Calling you” 버전이 포함된 CD까지 샀으니, 뭣에든 하나에 꽂히면 뿌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바그다드 카페>는 음악도 매력적인 영화지만, 커피와 관련하여 무척 인상적인 두 대목이 나온다.


바그다드 카페의 주인인 브랜다(CCH 파운더)와 독일에서 온 야스민(마리안느 세이지브레트)의 이질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커피에 관해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야스민의 남편이 고장 난 트렁크 문을 고정시키려고 커피 보온병을 길가에 버린다. 브랜다의 남편인 살은 고장 난 커피기구를 고쳐오는 대신, 이 보온병을 주워온다.


카페의 단골손님인 콕스가 커피를 주문하자, 종업원은 살이 가져온 그 보온병 속의 커피를 건넨다. 물론 야스민의 것이다. 콕스의 첫마디!


“이게 커피야? 저건 독약이야.”


콕스는 과장된 듯 연신 기침을 하며 물을 들이켠다. 미국인의 입맛에 레귤러커피조차 독약처럼 쓴 모양이다.


마침내 커피기구를 고친 후 바그다드 카페의 손님으로 온 야스민에게 커피를 내놓는다. 야스민은 콕스와 사뭇 다른 반응이다.


“이건 커피가 아니라 갈색 물이야.”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야스민이 한 말이다. 레귤러커피를 독약이라고 부르댄 콕스. 아메리카노 커피를 '갈색 물 brown water'로 표현한 야스민. 너무 대조적이다. 아메리카노가 흔한 미국과 유럽 커피문화의 극명한 차이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예를 본 적이 없다. 내 입맛도 야스민을 그대로 닮았다. 갈색 물을 마실 바에야 그냥 물을 마시겠다.


몇 해 전 고발을 주로 하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에스프레소 기계의 청결상태를 접한 후 약간의 오해가 생기긴 했다. 그럼에도 에스프레소를 원할 때나, 에스프레소의 베리에이션인 카페라테 혹은 카푸치노를 즐기려고 할 때는 에스프레소 기계는 최고의 발명품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고가의 에스프레소 기계를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손쉽게 에스프레소의 맛을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간편 기구가 있다. 바로 모카포트이다. 모카포트는 에스프레소와 가장 근접한 맛을 낸다. 결국 모카포트를 두고서도 드롱기의 에스프레소 기계를 덜컥 샀지만, 가끔씩 모카포트에서 추출된 커피도 즐기곤 한다. 하나씩 사모은 모카포트가 어느새 세 개나 된다. 디자인이 다른 두 개와 전기 레인지 전용 모카포트까지. 기계에 의존하기보다 조금이나마 내 손길이 필요한 기구란 점은 외려 더 끌리는 요소이다. 드롱기에서 크레마 crema가 나온다는 사실, 그 신선함 혹은 완벽한 추출의 바로미터는 무시할 수 없지만, 크레마가 없어도 모카포트는 충분히 매력이 있다. 모카포트로 만든 커피를 마실 때마다 든 생각. 90%가 넘는 이탈리아 가정에 모카포트가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귀엽게도 ‘에스프레소 포트’라고도 불린다고 하니……


모카 Mocha는 예멘의 항구 이름이지만, 그것이 일반명사로 쓰여 커피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카포트는 곧, 커피를 만드는 주전자라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모카의 유래와 전혀 다르게 초콜릿이나 코코아의 의미와 가깝게 쓰이지만 말이다. 검다고 같이 부르는 건 대단한 착각이요, 오만이다.


요즘 예멘은 치안이 불안해서 외교통상부에서 여행제한국으로 지정돼 있지만, 예멘의 모카 항구는 모카커피의 모태이자 오랜 커피 유통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멘 고유의 커피와 커피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커피의 고도이다.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 하와이안 코나와 더불어 세계 3대 커피의 하나인 예멘의 모카 마타리를 모카항구의 가장 오래된 커피하우스에서 옛 방식 그대로 맛보고 싶은 바람이 너무도 간절하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도시 일순위에 모카를 올려놓은 지 오래다.


예멘의 커피는 생두의 과육을 벗기지 않고 그대로 말리는 특이한 공정을 거친다고 한다. 과연 그 맛은 어떨까. 문득 커피 열매를 그대로 수입해서, 예멘처럼 제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예멘은 최초로 커피가 유통되고 중동 전역으로 확산된 커피의 중심지여서 독특한 커피 추출의 전통이 근근이 이어져왔으리라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독특한 맛을 찾아 떠나는 커피 여행. 그 생각만으로도 늘 설렌다.


상상만으로 이상형을 그렸다가, 다시 아내 품으로 돌아왔다. 모카포트를 사용할 때면 늘 아내에게 혼난다.


“또 레인지 주변이 온통 홍수네!”


불을 꺼야 하는 한 순간을 놓치면 어김없이 넘쳐서 레인지 위는 흥건해지고 만다. 모름지기 과하면 탈이 난다는 사실을 모카포트는 자주 경고한다.


“매번 타이밍을 놓치네. 미안. 거품이 생기기 전까지만 추출하고 불을 끄라고 하는데, 한 순간이거든. 그래도 오랜만에 진한 맛 좀 즐겨보시지.”


아내는 다양한 커피의 세계를 접하려는 마음보다 내가 주는 커피만을 좋아한다. 딱히 최상의 추출 노하우를 지닌 이유는 아닐 것이다. 서비스 자체에 만족하는 눈치다. 자기 전에 더치커피를 준비해 놓고 다음 날 아침에 숙성도 하지 않은 채 마시기도 한다. 더운 날에도 뜨거운 커피만 고집한다.


편하게, 무엇보다 빠르게 커피를 즐기라고 드롱기의 에스프레소 기구를 샀는데도, 주말이 아니면 거의 방치돼 있다. 에스프레소보다는 야스민이 말한 대로 ‘갈색 물’이나, 그 빈 공간에 설탕과 크림을 넣은 달콤함이, 아직은 좋은가 보다. 부드러움을 즐기고 싶다면, 당연히 동남아나 인도처럼 크림보다는 연유가 더 낫다고 믿는다.


아무려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는 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커피라고 한다. 누구든 최고는 남이 타준 커피라고도 하니까. 그래도 주는 마음이 외려 더 신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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