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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만나다

8장: 코피오 너머 코피루왁까지, 2007

by 허류

이성 친구? 한 때 결혼 후에도 계속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있다. 성별과 나이를 떠나서 단지 결혼했다는 이유로 모든 인간관계를 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른 살에 결혼을 했다고 하면, 그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는 지난 30년 동안의 인간관계를 죄다 무시하는 결과와 같다. 이성 친구의 존재를 소재로 한 로브 라이너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란 작품이 기억난다. 이성 사이의 우정. 이성끼리 연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불가능하다는 논리도 있지만, 친구로서 관계를 계속 맺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오빠와 동생으로 지내는 여자가 있다. 이성으로서 전혀 매력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냥 동생 같다. 아니, 동생이어야 했다. 만약 나이가 많을 경우는 누나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인간관계란 늘 한결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성 사이에 항상 성적인 문제가 개입되는 건 아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한 오랜 벗으로서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서로 가까운 이웃처럼 지낼 수 있다. 서로 어려울 때 힘이 돼주고, 좋은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더 기뻐해주고, 슬픈 일을 겪으면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


그는 지금 어엿한 드라마 작가이다. 철학을 전공하였는데, 그래선지 말이 청산유수다. 도무지 논리로만 화제를 주도할 수 없어서 매번 자괴감을 느낄 정도이니까. 결혼 후 아내를 소개해줬는데, 요즘은 나보다 아내와 더 친하다. 아내에게 친구를 빼앗긴 기분. 난 그의 연하인 남편과 친하다. 같이 팬 로스팅을 배우러 간 클래스메이트이기도 하며, 형, 동생으로 지낸다.


여행을 가도 두 가족이 꼭 같이 가는 편이다. 어느새 20년 넘게 두 가족이 어울려 지낸다. 서로의 과거를 아는 여자와 20여 년을 만나다니, 기적 같다. 암암리에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되도록이면 과거를 화제 삼지 않는다. 그다지 감출 것도 없지만. 이 작가는 분위기가 고조되면 내 과거를 줄줄 꿴다. 민망하지만 사실인걸 어쩌랴. 그렇게 흉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여자친구 아니, 아는 여자. 단순히 알기보다 피를 나눈 동생 같은 여자. 때로는 든든하기도 하다.


대개 출장이든 여행을 가면 꼭 커피세트를 챙겨가는 편이다. 짐이 많으면 단 세 개면 충분하다. 하리오나 코노보다 칼리타 드리퍼를, 전기 분쇄기 대신에 미니 핸드밀을, 그리고 종이필터. 칼리타 드리퍼의 장점은 드립포트에 의해 조심스럽게 물줄기를 조절하지 않아도 조금은 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 미스터 클레버나 프렌치프레스도 여행길에는 제격이다. 아, 빠진 게 있다. 가장 중요한 원두커피. 여행지나 출장지에서 쉽게 살 수도 있지만, 신선하면서도 싱글 오리진의 향미를 원한다면, 원두커피도 함께 가져가는 게 백 번 낫다. 그것도 갓 볶은 것으로 엄선해서 말이다.


한 번은 두 가족의 여행길에 코피루왁을 챙겨갔다. 좋은 것은 좋은 사람과 나눠야 하는 좋은 법! 짜잔, 이 원두가 그 비싸다는 코피루왁. 평소보다 더 정성을 들여 칼리타로 추출했다. 역시 작가는 작가답게 표현을 한다.


“오빠, 코피루왁은 생각보다 별론데! 마치 어둔 터널을 지나는 기분인 걸.”


어두운 터널이라...... 맛이 깊다는 건지,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는 건지. 분명 얼굴 표정을 보자 전자는 아닐 듯하고. 그러면, 뭔가 음침하다는 얘기인가? 아무튼 커피 맛에서 이런 느낌을 들은 건 처음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보람도 없이. 분쇄된 상태라서 이미 향미가 날아간 뒤라서 그런가?


“난 향이 입 안에 오래 남아 또 다른 커피의 세계로 인도하는 느낌인 걸? 처음 접했을 때는, 심지어 다음 날에도 입 안에 코피루왁의 향이 남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거창하게 코피루왁의 진가를 힘줘서 말해도 판관의 매서운 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아무튼 난 이렇게 비싸게 주고 굳이 마실 이유를 모르겠어.”


물론 개인의 취향이니 존중해줘야 한다. 예의 신선도 측면이나, 코피루왁은 희소성에 의해 가치가 상승한 측면도 분명 있을 테니까.


싱가포르에 살 때다. 커피도 아닌, 코피 kopi라고 적힌 원두를 산 적이 있다. 알다시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도시국가인데, 여전히 말레이 문화가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 인구의 80%가 중국계지만, 대부분의 지명은 옛 그대로 말레이어일 정도다. 주석 광산이 있었던 곳은 언덕을 뜻하는 부킷에 주석의 말레이어인 티마를 붙여 지금도 지명이 부킷 티마이듯. 당연히 싱가포르에서도 말레이어로 커피에 해당하는 '코피'를 판다. 터키식 커피에 적응하며 자연스레 그 맛에 빠졌듯 코피 Kopi의 맛에 익숙해지는 데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코피를 주문하려면 네 가지 용어 정도는 알아야 한다. 어느 가게에 가서 코피오 Kopi-O를 주문하고서 넌지시 물었다.


"코피오에는 원래 설탕이 들어가는 거예요?"


처음 코피오를 주문해서 먹었을 때의 그 달콤한 설탕커피 맛에 당황했었다.


"코피오는 ‘coffee with sugar’를 의미하죠. 여기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커피입니다. 아무래도 열대지방이니까 당분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커피에는 설탕이 당연히 들어가는 것 아닌가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면 코피 다음에 C가 붙은 건 어떤 의미인가요?"


내처 궁금한 걸 물었다.


"아, 코피오도 아닌, 그냥 코피를 주문하면 커피에 연유 condensed milk가 섞인 채 나와요. 코피씨 kopi C는 커피에 무(가)당 연유 evaporated milk와 설탕이 들어가죠. 코피, 코피오, 코피씨의 차이를 이제 아시겠죠?"


그제야 조금 알 듯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코피씨가 많이 달지 않고 부드러운 연유 맛이 스며있다 했더니.


"그러면 블랙커피를 주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니 뭐니 해도 커피는 커피 그 자체의 맛에서 결정되는 것이라 믿는다.


"코피에 'empty'를 뜻한다는 ‘코쏭 kossong’이란 단어를 더해서 '코피 코쏭'이나 ‘코피오 코쏭’이라고 하시면 순수한 블랙커피를 즐길 수 있죠. 물론 블랙커피라고 해도 여기 사람들 모두 알아듣어요. 코쏭이 기억나지 않으시면, 노 밀크, 노 슈가를 덧붙여도 됩니다."


참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네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아이스커피는 어떻게 주문하면 돼요?"


이제 이것만 알면 코피의 기본 주문법 네 가지를 독파하는 셈이다.


"그냥 아이스드 iced라고 해도 다 알아 들어요. 말레이어로 펭 peng이 차갑다는 뜻이니까 코피오 펭 kopi-O peng이라고 하셔도 돼요."


그 진하고 쓴 맛이 나쁘진 않다. 믹스커피를 즐긴다면 조금 덜 달면서도 부드러운 코피씨가 맞을 듯하다. 처음 코피오를 주문했을 때는 한 모금 마신 후에 더는 마시지 못했다. 커피라기보다 거의 떫은(?) 설탕물 같아서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더라도 블랙이나 크림커피까지는 어떻게든 마시지만, 크림도 없는 설탕커피는 마시자마자 토하고 싶을 때도 있다.


아직도 인스턴트커피에 대한 아린 옛 기억이 작용해서일까?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몸이 벌써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코피오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요즘은 한국에도 코피오를 파는 가게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서서히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융 드리퍼나 미스터 클레버로 내린 제대로 된 '코피오 코쏭'의 진한 맛을 맛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설탕이 없는 ‘코피’ 원두를 사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대형 마트에 가도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찾아보면, 로부스타 원두를 팔긴 하지만.


말레이시아 소도시의 어느 로컬 체인 호텔에서 조식으로 제공되는 코피가 궁금해서 보온통 안을 슬쩍 들여다본 적이 있다. 촘촘한 거름망 여러 개가 담겨 있었다. 마치 차를 우려내듯, 코피를 담아둔 것이었다.


가끔씩 생각이 나는 오, 나의 코피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는 코피오만 있지 않다. 인스턴트커피믹스에 해당하는, 이른바 화이트커피도 흔하다. 그 (지나치게) 달콤한 맛은 한국의 시골에서 맛볼 수 있는 '다방 커피'나 믹스 커피와 다를 바 없다. 로부스타를 베이스로 했겠지만 화이트커피보다는 역시 코피오가 제격이다.


코피오는 아라비카 종처럼 고산지대가 아닌, 열대의 저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로부스타 Robusta 종으로 만들어진 커피다. 로부스타는 적도가 한가운데를 지나는 아프리카 서쪽 콩고의 분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고산이 없는 말레이시아나 베트남에서 생산이 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아라비카 원두에 익숙한 커피의 맛과는 또 다른 특유의 아로마 향이 난다.


아라비카 원두가 애인이라면, 코피루왁, 코피오, 코피씨 같이 로부스타 품종으로 만든 커피는 여자친구 같다. 오로지 로부스타가 지닌 고유의 특성에만 충실한.....


20여 년 전, 첫 해외여행지가 말레이시아였다. 달랑 배낭 하나만 메고서. 수도인 쿠알라 룸푸르에 도착한 후 호텔을 예약하고는 다음 날부터 배낭을 메고 무작정 걸어 다녔다. 걷다가 지치면 근처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다. 열대지방에서 걸을 생각을 다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다. 대체로 선선한 1,2월도 아닌, 그것도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에 말이다. 그래도 걸어야 더 깊이 더 넓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젊긴 했다. 막상 걷기 시작하자, 덥기도 할뿐더러 낯선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선지 연신 땀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중동의 더위는 건조해서 건식 사우나의 열기가 느껴지는 반면에, 말레이시아는 다소 습하고 후텁지근하다. 요즘 기후이변으로 몸살을 앓는 우리나라 장마철 무더위와 엇비슷하다. 결국 잠시나마 더위를 피해 가게에 들어가서 시원한 커피를 주문했다. 흔한 테이크아웃 용기가 아니라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는데, 맛도 특이했다. 예나 지금이나 거의 설탕 커피에 가까운 건 변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커피를 주문하면, 블랙커피도 아니고, 우유나 크림 따위도 넣지 않은, 이른바 커피에 설탕만 넣은 코피오를 준다는 사실을 그때 어떻게 알았으랴.


말레이시아와의 인연은 그 후로도 이어져 지금까지 자주 찾는 나라 중 하나이다.


한 번은 직장 동료들과 싱가포르에 한 달 동안 교육을 간 적이 있었다. 막 새천년이 시작된 시기였다. 한국에서 온 네 명의 싱글즈는 리셉션에서 근무하는 아가씨와 무척 가깝게 지냈다. 4주 내내 싱글즈는 퇴근 후면 그 중국계 아가씨와 같이 어울렸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서로 메일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겼지만.


근 15년이 지나 다시 싱가포르에 발령을 받아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세상은 참 좋아졌다. 혹시나 하고 SNS에서 검색을 해보니 역시나 있었다. 그런데 메신저로 연락을 취하니까 도무지 답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으로 15년 전의 추억을 설명하니까, 그제야 기억났다며 답을 해왔다. 처음엔 스팸 문자이거나, 모르는 사람이 치근덕거리는 것 같아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렵싸리 우리는 15년 만에 재회를 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번화가인 부기스 정션에서 만나 식사를 마치자, 가져온 차를 타고 다운타운에 갔다. 그는 자주 간 듯한 커피숍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윽고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요즘에는 코피오 안 드세요?"


의외였다. 그대 때문에 처음 코피오를 알게 되었는데, 정작 그대는 카푸치노?


"코피오는 호커센터에서나 먹고요, 더군다나 이런 데는 팔지도 않아요."


호커센터는 푸드코트와 같은데, 천장에 팬만 달려 있는 노천 식당이다. 그는 이미 마흔 중반을 넘기고도 독신으로 살고 있았다.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니고, 주말에는 댄스 모임에 나가며 인생을 즐긴다고 했다.


15년 전에는 그랬다.


매번 우리 싱글즈를 바쿠테 전문 식당에 안내할 때나, 호커센터에 데려가서 같이 식사할 때나, 꼭 코피오를 주문했다. 그럴 때면 나도 늘 따라 주문했던 코피오. 유독 카페인 함유량이 많다는 흠은 있지만, 은근히 중독되는 맛이었다. 지금 싱가포르의 번화가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안타까운 마음에서 다소 비유가 거칠지만, 이미 아라비카가 독버섯처럼 퍼진 상태였다.


코피오 하면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의 고집이 엿보인다. 아라비카 종이 대세인 서구의 보편적인 취향에도 아랑곳없이 고유의 맛을 꿋꿋하게 지켜가고 있어서다. 조금씩 젊은 세대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만.


스타벅스도 로부스타가 잠식해 간 미국의 커피시장에 아라비카로 승부를 걸어서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하는데, 코피오의 운명도 그럴까? 그럼에도 무난하고 익숙한 맛과 가격면에서 장점이 있으니까 건재하리라 믿는다. 최근에 찾은 말레이시아의 한 식당에서 주문한 코피오 가격이 500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는데 (코피씨는 연유가 들어가서 800원 정도), 스타벅스는 거의 7, 8배 가까이하니까. 그렇다고 꼭 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싱가포르에 머물 때 주말을 이용해서 인도네시아에 자주 갔다.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코피루왁 Kopi Luwak’과 만델링 원두를 살 목적도 컸다. 아무래도 원산지이고, 물가를 고려하면 싱가포르보다는 훨씬 더 쌀 테니까.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부족 이름에서 따온 만델링은 특유의 남성적 향미가 나는 고급 싱글오리진 커피이다. 어떤 이는 만델링의 맛은 ‘흙맛’이라고 에둘러 표현하는데, 내겐 외려 묵직한 바디감이 느껴져서 좋아하는 커피품종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코피루왁은 분쇄된 것만 팔아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델링 홀빈 원두와 분쇄된 코피루왁을 사서 싱가포르에 돌아왔다. 만델링은 익히 그 맛을 아니까 싱가포르에 돌아와서 곧바로 코피루왁부터 시음에 들어갔다.


한 문장이 페이지를 넘기기 일쑤인 박상륭의 문체를 흉내 내서 시음 결과를 평해 본다면, 이렇다.


'마치 커핑 cupping 테스트를 하듯,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드립포트로 내려서, 서버에 담긴 커피를 컵에 붓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우선 컵 속 칠흑 같은 색과,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와 강렬한 향에 취해서, 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혀 끝에서 대뇌를 향해 궁극의 맛을 전하면서, 눈물 한 움큼 떨궈도 좋을 환희에 온통 마음이 들썩거렸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카모메 식당>에 코피루왁에 얽힌 에피소드가 나온다. 로브 라이너의 <버킷리스트>에는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라는 대목과 함께, 예의 그 리스트 중에 코피루왁을 마시는 게 포함돼 있다. 두 영화가 우연히도 2007년에 제작된 것도 신기하지만, 그 해에 나도 처음 코피루왁을 만났다. 인연이라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코피루왁도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몇 년 전에 세계에서 제일 비싼 커피는 블랙아이보리라는 토막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코피루왁이 사향고양이의 위를 지나 화학적 변화를 거친 뒤 배설물에서 추출한 것인데 반해, 블랙아이보리는 코끼리의 배설물에서 추출한 것이라고 한다. 사향고양이는 가장 신선하고 잘 익은 커피 체리를 골라서 먹었을 테고, 과육과 달리 미처 소화시키지 못해 배출된 콩은 최고의 맛을 지녔다는 얘기다. 아무래도 코끼리보다는 사향고양이의 커피콩에 대한 감별안이 높다고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블랙아이보리도 접하고 싶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놔야 할 모양이다.


코피루왁은 원래 야생 사향고양이가 배설한 것을 채집했기에 양은 턱없이 적었다고 한다. 모름지기 비싼 까닭이 있었다. 맛을 떠나 공급 자체가 부족하니까. 최근에는 사향고양이를 아예 가둬두고 사료대신 커피열매만 먹여서 채취한다고 하니, 이미 좋은 콩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인간의 이기심과 물욕이 빚은 코피루왁의 퇴보인 셈이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의 기분이 들 만도 하다.


코피오는 말레이반도, 베트남, 브라질 산지의 로부스타 종으로 만든 일종의 신토불이 커피품종이라 할 수 있다. 부디 외국계 프랜차이즈에 의한 아라비카 종의 공습에도 오래 그 향미와 문화를 지켜냈으면 좋겠다.


커피의 체리에서 과육을 벗겨내면 생두라고 불리는 커피콩 Green Bean이 나오는데, 우리가 흔히 마시는 품종은 아라비카이지만 그 외에도 로부스타, 리베리카 등이 있다. 70% 이상이 아라비카 종이지만, 요즘은 로부스타도 생산량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로부스타는 아라비카에 비해 저가여서 인스턴트커피의 원료로 쓰거나, 블렌딩에도 은근슬쩍 들어간다. 내친김에 세계커피협회(ICA)의 2017년 말의 통계를 찾아봤다. 어느새 아라비카와 로부스타의 생산비율이 62 : 38로 바뀌었다. 30%에도 못 미치던 로부스타의 생산량이 많이 성장한 셈이다.


커피를 마시며 15년의 간극을 메우기는 힘들었다. 주롱섬에서 일한다는 얘기, 주말에는 싱가포르 곳곳을 찾아 조깅하고, 가끔씩 부킷 티마에 있는 산에도 오른다는 얘기도 했다. 빠뜨릴 수 없는 커피 얘기도 했다. 아라비카 품종 중에서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의 커피존에 있는 나라의 커피 맛도 구분한다며, 이른바 커핑 전문가라도 된 듯 자랑도 했던 것 같다. 한참이 지났다. 우리는 커피숍을 나왔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이윽고 집 앞. 이젠 헤어질 시간.


"잠시 들어올래요? 뭐 줄 게 있어요."


끝인가 했는데, 집까지 가자는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혼자 사는 추억 속 여인의 집으로 들어가다니! 딱히 주차할 데가 없어서 머뭇거리니까 소방용 비상 공간에 두라고 한다. 아니, 벌금 Fine의 나라에서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시키는 대로 주차하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갔다. 거실 소파에 어색한 듯 앉아 있으니, 싱크대 상부장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커피 원두였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제가 안 먹는 원두라도 드릴까 해서요."


영화에서 보듯, 커피를 받으며 고맙다며 키스라도 했어야 했나? 그런 뒤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너무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런데 어쩌죠? 주차 금지구역에 주차를 해놔서 얼른 가야겠네요."


바보같이 그만 마음에 없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아, 어쩔 수 없네요."


무언가 실망한 듯한 표정이 슬쩍 비쳤나?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우리 언제 또 볼 지 모르는데, 포옹이라도 해요."


한 번 더 주어진 기회인데, 용기는커녕 시키는 대로 가만히 안기만 했다. 두근두근. 요동치듯 뛰는 심장소리를 들킬까 봐서 팔을 풀었다. 고작 3초 정도였을까?


어느새 10년이 또 훌쩍 지났다. 요즘도 SNS에서 종종 소식을 접하지만, 그 싱가포르 여인은 이미 타인이 된 듯하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를 놓친 나를 까맣게 잊은 듯하다. 예순은 넘어 보이는 백인과 식사하거나 함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도 더러 보였다.


로부스타를 기본으로 하는 코피오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커피다. 코피오를 소개해준 그 싱가포르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처음 내게 코피오를 알게 해 줬던 고마운 인연이다. 부디 행복하기를.


소량 생산이라도 좋으니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코피루왁의 본모습으로 되돌아오기를 빈다. 자연을 거스르며(?) 그리움만 품고서 25년을 흘려보낸 내 모습을 닮지 말고. 내게는 여전히 코피오 너머에 코피루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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