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로 곳곳을 떠돌아다닌 바람에 한창 애들이 자라고 방황하던 사춘기에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다.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 성장에 보탬이 된다는 우스개를 믿지 않는다. 변명 같지만, 애들과의 소원함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함께 했던 시간의 양' 때문이라고 믿는다. 다 세월이 해결해 줄 테지.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부족분이 채워질 테니까.
오랜 외국생활 끝에 한국에 머물 때였다. 또 나갈 테지만, 모처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오붓한 시간. 퇴근 후 집에 와서 아내가 만들어 줄 지상 최대의 요리, 이른바 '집밥'을 기다릴 때다. 학창 시절, 도서관의 조용한 골방을 찾던 나와 다르게, 요즘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어폰을 낀 채 공부하는 장면을 더러 봤다. 제대로 집중이 될까 싶지만...... 요즘 대학교 도서관도 비슷하단다. 의자도 없이 쿠션 역할의 조형물이 있는 자유열람실이 가장 먼저 찬다고. 조금 소음이 나도 그러려니 하며, 꼭 의자가 없더라도 편안하게 책 읽고 공부하는 이런 공간이 인기라고?
거실에는 TV가 켜있고, 거실과 이어진 식탁에 앉아서 이어폰을 낀 채 공부하는 수험생 딸. 공부하는 건지 음악을 듣는 건지는 알 도리가 없다. 딸이 아내에게 묻는다.
"엄마, 이 단어 뜻이 뭐야?"
딸은 음악감상이 아니라 영어 공부 중이었다. 그러자 아내는 부엌에서 음식 준비하다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네가 휴대폰으로 단어 찾아봐. 엄마 지금 바빠."
아내는 모르는 눈치다. 내가 아는 단어다.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을 안다. 왜 외국에 나다니는 내게 묻지 않고, 영어를 손 뗀 지 30년은 넘었을 엄마에게 묻는지 궁금할 뿐이다. 아마도 그 순간 딸에게 아빠의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투명인간 같은.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여전히 외국으로 떠돌다가 잠시 휴가차 귀국한 뒤다. 멀리 제주에서 대학생이 된 딸이 방학이라고 집에 와 있었다. 딸과 관계 회복을 모색할 절호의 기회였다. 넌지시 물었다.
"아빠랑 동남아 패키지여행 갈래?"
이제 수험생이 된 막내와 아내는 안 간다는데, 뜻밖에 좋다고 한다.
"푸껫에는 가족여행 가봤으니, 이번엔 베트남이나 라오스 어때?"
두 나라 모두 공산국가이지만, 어쩐지 한갓진 라오스가 끌렸다. 무엇보다 라오스에 있는 한상기업 하나가 '라오스의 삼성'으로 불리며 국민기업이 되었다는 소식도 듣고 해서. 그 기업은 현대기아차 판매대행을 하고, 카카오택시와 같은 모빌리티 사업도 하고, 골프장에다 대형 마트나 편의점 사업도 하는, 라오스 세수의 20%를 차지하는 거대기업이었다. 물론 패키지여행이어서 자유롭지 않을 테지만, K-푸드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딸도 동의해서 이제 스물이 된 딸과 둘이서 라오스에 가게 되었다.
여정 동안 여느 패키지처럼 두어 군데 쇼핑해야 했다. 그중 한 곳이 커피매장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등지에서 유명한 위즐커피를 파는 가게였다. 이름 그대로 사향 족제비 Weasel의 배설물에서 골라낸 커피다. 인도네시아의 사향고양이도 아니고, 태국의 코끼리도 아닌, 사향 족제비가 커피세계에 등장한 셈이다. 이윽고 가게 주인은 빙 둘러 서 있는 우리 일행 앞에 두고, 핀 필터 Phin Filter로 불리는 미세한 구멍이 난 기구를 사용하여 위즐 커피를 추출했다. 아니, 여행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건지 이미 추출 중이었다.
이윽고 시음 시간. 내 차례가 와서 한 모금 입속에서 혀를 굴리며 제법 전문가인 양 음미하자, 와, 기대를 뛰어넘는 이 깊은 맛이라니! 잴 것도 없이,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커피도, 핀 필터 기구도 샀다.
이른바 침출식 추출법인데, 가게 주인은 핀 필터로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물론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1. 핀 필터는 기구에 원두를 넣은 뒤 필터프레스로 눌러준 뒤 그대로 둔다.
2. 컵이나 서버 위에 올리고 뜨거운 물을 적실 정도만 붓고 1분 정도 뜸을 들인다.
3. 뜨거운 물을 필터프레스 위로 천천히 붓고 뚜껑을 닫는다.
4. 10분 정도 기다린다.
미세한 구멍으로 천천히 우려내기 때문에 깊고 진하다고 하는데, 뜨거운 물을 붓자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마 더 오래 조금씩 천천히 정성을 쏟으면, 어마어마한 맛이 탄생할 테지.
그 비싼 위즐 커피가 동난 뒤, 아라비카 원두를 곱게 갈아서 핀 필터에서 내려 본 적도 있다. 곱게 간 커피지만 신기하게도 그라운즈 하나 없이 진한 커피가 추출된다. 마치 깊은 동굴 사이로 흐르는 석회수처럼 은밀하게 혀 끝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위즐커피도 코피루왁만큼 깊은 맛을 줬지만, 내게는 핀 필터가 더 와닿았다. 아마도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람들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이 기발한 커피추출법을 개발했을 테다. 뜻밖에 후처리도 간단하고 커피의 풍부한 맛을 체험하게 해 줬다. 단 하나 흠이라면 진득하게 기다려야 하고, 에스프레소 두피오 한 잔만큼의 양을 얻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 그래도 이런 맛을 준다면, 충분히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위즐커피를 만나고, 핀 필터를 얻게 된 것도 어쩌면 딸 덕분이다. 핀 필터만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딸.
나흘이 지나 집에 온 뒤 딸과의 관계가 더 틀어지고 말았다. 처음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돈과 나흘이라는 시간이 회복할 수 없는 틈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 다니는 회사 분위기는 MZ세대가 입사한 뒤부터 알게 모르게 많이 바뀌었다.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우선 30대 중반까지는 동료끼리 횡적 교류가 거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율출퇴근제라서 근무시간이 제각각인 까닭이 클 테다. 이미 지각이라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출근해도 인사 한마디 없이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서 일하다가, 근무시간을 채우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모처럼 귀국해서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우리 오랜만에 다 모였는데, 같이 식사할까요? 저녁엔 다들 바쁠 테니까."
여덟 명 중에서 셋 정도는 거의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죄송해요. 전 선약이 있습니다."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 점심은 안 먹습니다."
"저는 그냥 혼자 먹을게요."
공통점이 있다. 모두 MZ 친구들이다. 호의에도 아랑곳없이, 너무나 멋쩍게도, 내 제의에 평소 해오던 루틴을 고집한다. 하물며 저녁에 회식하자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니, 술자리는 언감생심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MZ 세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중이다.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지금은 스스로 묻지 않았는데, 선배랍시고 무언가 일러주는 것도 '꼰댓짓'이라고 해서 그마저도 눈치를 본다. 한쪽에서는 지식 공유를 외쳐대는데 말이다. 회식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 하며 건배했던 옛 기억이 오롯하다. 지금은 "우리가!"라고 건배 제의를 하면, 당연히 "남이지!"라고 외칠 판이다.
그러고 보니, 내 딸이 바로 그 MZ세대인 줄 몰랐다. 심지어 M과도 엮이지 않으려는 Z세대는 젠지 Gen. Z라고도 부른다고.
지금이라면, 베트남에서 내가 한 '꼰대스러운'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을 떠도느라 너무 내 세계에 갇혀서 세상이 이렇게 바뀐 줄 몰랐다. 아마도 계속 한국에 있었으면, 그나마 시대의 흐름을 읽었을 텐데. 결국, 이놈의 역마살이 딸과 고약한 추억 하나만 더 뿌려놓은 셈이다. 전화위복은커녕, 엎친 데 덮친 꼴이랄까?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된 딸이 제주에 간 지도 오래다. 방학 때도 아르바이트하느라 '육지'에 갈 생각도 않는다. 용돈이 필요하면 '아빠 찬스'를 쓰라고 했건만, 연락도 뜸하다. 그래도 가끔 집에 오면 서로 껴안으며 반가워한다. 언제나 딸바보인 아빠는 그저 아빠라고 불러만 줘도 잎을 다물지 못한다. 라오스 여행의 악몽은 까마득한 옛일이 된 채. 어쩌면 그 망각이 외려 다행스럽다.
제대로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한, 그 라오스에서의 슬픈 추억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핀 필터는 집에 있는 조그만 '커피박물관' 깊숙이 숨겨진 채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그 깊은 맛을 내는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딸바보의 슬픈 사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