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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상 Oct 20. 2024

교육과 상대평가? 1

- 교사를 옥죄는 것

'아이들이 시험을 너무 잘 봐 큰일났다.'


아이들이 시험을 잘 봐도 문제, 못 봐도 문제입니다. 과목별 시험 점수 평균이 80점 이상 나온 교사들이 호출당합니다. 너무 높은 점수 분포라는 것이죠. 이래서는 1등급을 추려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너무 잘 봤다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초임교사의 걱정도 이 맥락에서 웃지 못할 걱정이 됩니다. 중간고사를 아이들이 너무 잘 봐서 1등급 4%, 200명에서 8명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현행 제도로는 1등급 제한 명수가 넘어가면 모두 2등급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물론 나름대로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 거르는 장치는 있지만, 하여튼 교사들이 시험 때마다 몸살을 앓습니다. 9등급으로 나눠지는 성적 제도로 인하여 아이들은 최대한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이것저것 꼬투리 잡아 교사를 물고 늘어지고, 교사는 교사 나름대로 1등급 4%만, 2등급 7%만... 등등 각 등급에 학생들을 몰아넣기(?) 위해 기를 써야 합니다. 


나도 논술형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됩니다. 유력한 상위권 학생의 답안지에서 예상치 못하게 확실히 틀린 진술을 발견하고 다행이라는 의미의 미소입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아이의 틀린 답안을 보고 다행이라는 미소를 짓는 교사라니... 올해 따라 유난히 상위권 학생들의 내신 경쟁이 치열합니다. 더구나 선택 과목이라 듣는 학생 수도 적은데, 거기서 1등급 4%, 2등급 7%로 적절히 분배가 되도록 평가 결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골라내야 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는지 모릅니다. 교사가 무의식적으로 각 등급에 해당하는 아이들 명수를 염두에 두고 시험문제를 내고, 채점을 해야 하는 참 웃픈 현실입니다. 결국 교사들은 아이들의 성장을 격려하면서도 동시에 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어떻게 차별화 시키나 하는 걱정을 동시에 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인성이니 감성이니, 독서니... 하면 좋은 것인지 알고, 왜 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이 정의하고 있는 '정상인'이라는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틈이 나는 대로 교과 성적을 올리려 바둥거려야 하는 아이들에게 보다 가치 있는 교육적 활동들조차 무의미하고,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아이들을 고기 등급 나누듯이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기괴합니다. 고기를 직접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고기 등급 나누는 것이 더 수월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등급으로 나눈다는 발상, 그것도 소수점 이하의 점수 차이로 인해 대학과 더 나아가 인생이 결정되는 등급이 결정된다는 발상, 제도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단위 학교마다 그 집단만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모든 집단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당연히 그 기준의 무모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확실한 통계적 오류를 전국 모든 학교에 제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답답하게 만듭니다. 


교육과 상대 평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요, 있어서는 안 될 조합입니다. 앞에서 교육이란 개념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아이들의 잠재력을 찾아 충분히 발휘케 한다는 의미라고 언급했습니다. 의외로 교육분야 관련자들이 이 의미를 모르는 것인지,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한다면서 왜 꼭 아이들을 등급을 나눠야 하는지 반문할 수밖에, 아니 반문이라기보다는 반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우열을 가리는, 평균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정상으로 여기는 상대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요, 난센스입니다. 상대평가의 치명적인 단점이 아이들 나름으로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그 노력을 제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잠재력을 아무리 갖고 있고, 최대한의 노력을 펼쳐서 해보려고 해도 나보다 잘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소위 말하는 ‘루저’가 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대들이 더 잘하면 나는 항상 밑바닥에서 그네들을 위한 희생양이 될 뿐임을 의미합니다. 


상대평가의 한계입니다. 즉, ‘하면 된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좌절감을 심어주고 있는 제도입니다. 실제로 1학년 때 나름 능력을 보여주며 반짝반짝하던 아이들이 2학년 올라가서부터 서서히 교실 구석진 곳을 찾아가며 수업을 회피하고 엎드리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단지 내신 성적에서 밀려났다는 것만으로 점차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고, 그 결과 모든 영역까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전인적 발달과 미래의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고자 하는 교육이 얼마나 무지하고 야만적으로 진행되고, 고착화되고 있는지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상대평가를 고수하는 이유는 오직 대학입시에서 서열을 가리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입시만을 위한 서열화를 위해서 우리 교육은, 그리고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의 개혁을 현재 가장 강력히 주장하는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 혁명이 필요하다’는 한 강연에서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고 주장한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철학을 기반으로 성숙한 민주시민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경쟁교육을 멈춰야만 한다는 1970년대 독일 교육개혁을 소개합니다. 교육에서의 경쟁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교육에 반한다는 원리에 기초한 접근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파시즘 이데올로기, 즉 경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적을 통한 줄 세우기식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등수, 석차를 매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쟁교육을 지양하는 것이 오늘의 독일을 만든 핵심 요인이라고 합니다. 경쟁을 안 시킴으로써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하였고, 그 결과로 지금의 유럽 선도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경쟁을 하지 않고도, 등수를 매기지 않고도 노벨상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성취하였다는 것이 성적만으로 모든 성취를 가름하는 우리 교육의 입장에서는 부럽기만 합니다. 성적 대신 나름 질적인 측면에서 교육 본연의 접근을 했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한 명이라도 뒤처지는 아이가 없도록 하는 개인별 접근을 최우선으로 매진하는 핀란드 교육처럼 말이죠. 반면에 학교마다 매 학기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객관식 시험, 그리고 각 교육청마다 당연하듯이 강조하는 전체 학교 진단평가인지 일제 고사인지 하는 객관식 평가 성적만을 뚝 던져주고 ‘너 성적이 이러니 뒤처진 만큼 알아서 더 노력해라’식의 개개인별 피나는 노력만을 요구하는 학교, 교육제도. 최근에 발표된 제도 개혁에도 9등급제에서 5등급으로 변화했을 뿐 상대평가는 여전합니다. 아이들에게 참 부끄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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