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yroll(급여관리자)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Payroll팀 전화 응대 업무를 하게 됐다.
사실 나는 전화 응대 업무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대학생시절, 학교에서 연결해 준 실습 프로그램을 통해 시드니에서 부촌으로 잘 알려져 있는 Double Bay에 Stamford 호텔 예약실에서 예약팀장으로 9개월간 일했다. 호주에 온 지 약 3년 만에 일이었다. 잘 사는 어르신들이 많은 동네다 보니 인터넷 예약보다는 전화예약이 훨씬 많았는데, 전화로 어르신들의 영어발음을 듣다 보니 이름철자를 잘 못 알아들어서 여러 번 다시 여쭈어야 했다. 손님들께서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시고,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는 분도 계셨다. 점심시간에 혼자 밖에 나가 울기도 여러 번이었고, 다음날 출근이 하기 싫어서 내일이 안 오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 나중에서야 단골분들의 이름을 익혀 좀 나아졌지만, 전화벨소리가 트라우마가 돼서 따르릉 소리만 나도 온몸이 움찔하던 기억이 있다.
Payroll은 돈만 계산해서 주면 되지 사람을 상대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Payroll팀에 취직을 시작하자마자 전화응대 업무를 맡은 것이다. 전화벨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나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리면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전화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어가는 소리로 전화를 받고 또 받고 하다 보니 정말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하루 전화벨 공포를 이겨내가고 있는 어느 날, 다시 내 손을 벌벌 떨게 할 만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건너편에서 씩씩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 ㅇㅇㅇ씨 와이프인데 급여가 안 들어왔어요. 왜 급여를 안 주는 거예요?'
다짜고짜 급여를 왜 안주냐고 따지는 말에 나는 바로 시스템에서 기록을 찾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나는 정확한 금액이 급여날 지불이 이미 지불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계산된 급여가 이틀 전 통장으로 입금되었다고 알려드렸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 푼도 안 들어왔는데 무슨 소리냐. 어떤 계좌로 그 돈이 들어간 거냐고 따졌다. 내 온몸을 타고 흐른 식은땀이 선배의 책상까지 흘러갔을까, 나를 돌아본 선배가 나에게 전화를 홀드 하라는 수신호를 줬다. 나는 실례한다며 전화를 홀드 했고, 선배가 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끊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아무리 부부사이라도 남편의 급여 정보는 알려줄 수가 없는 거야. 만약 진짜 급여를 못 받았더라도 직원 본인이 직접 우리와 대화해야 해. 부인이 대신할 수는 없어'
전화를 끊고도 손을 떨며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보고 선배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농담을 했다. '그분이 진짜 부인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선배의 의도가 적중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맞는 말이었다. 전화로 부인이라고 한다고 목소리로만 듣고 진짜 그분이 직원분의 부인이지는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밖에 나가 심호흡하고 정신을 좀 차린 후 내 자리로 돌아왔다. 진정된 내 모습을 보고 선배는 위로를 건네면서 Payroll은 자주 그런 전화를 받는다며 상대방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막말을 하며 따지더라도 Payroll은 오픈할 수 있는 정보와 아닌 정보를 확실히 해야 한다고 가르쳐줬다. 정보유출에는 Payroll의 법적인 책임이고 그것이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날 이후로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은 내 직장생활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중에 하나가 됐다.
급여는 누구에게나 아주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이다. 돈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Payroll은 직원분들의 예민하고 즉각적인 감정을 자주 마주한다. 그분들의 격렬한 감정에 당황스럽고 억울하기도 하고, 내 감정이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정신줄을 꼭 붙들고 최대한 말을 아껴야 한다. 나의 한 마디 말이 어떠한 오해의 소지나 큰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정보도 확인 또 확인을 거치고 상사의 컨펌 후 알려주도록 한다.
호주에서는 직업마다의 업무범위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간호사는 의사 처방 없이 항생제를 환자에게 줄 수 없다. 쇼핑몰의 보안요원은 도둑이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았더라도 직접 수갑을 채우거나 도둑을 일부러 다치게 하는 경우 고소를 당할 수 있고 큰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Payroll은 직원들에게 세금, 연금에 관한 어떠한 조언도 하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직원들의 결정에 영향이 되는 말을 건네었다간 벌금을 내거나 징역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The difference between successful people and really successful people is that really successful people say no to almost everything." - Warren Buffet
성공한 사람과 진짜 정공 한 사람의 차이는 진짜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것에 'No'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 워런버핏
'죄송하지만 안됩니다'를 외치는 것은 무리한 요구에 끌려다니거나 과도하게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하다 볼 수 있는 실수나 손실을 미리 방지할 수 있고, 나의 능력을 필요한 곳과 정해진 시간에 훨씬 더 발휘할 수 있는 효율 좋은 업무 테크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