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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인 Sep 12. 2024

기묘한 여정

튀르키예, 괴레메-이스탄불





 나는 사람과 나라 사이 주파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스페인, 독일, 슬로베니아와 딱 맞는 주파수를 갖고 있다. 그런 나라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전생에 여기서 살았었나 싶다. 주파수가 맞는다는 표현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첫눈에 반하듯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나는 특히 슬로베니아에 갔을 때 찌릿하는 느낌을 받았다. 언덕에 누워 구름을 보다가 아아, 이대로 이 땅에 묻혀도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나와 주파수가 맞지 않는 나라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그곳은 튀르키예,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형제의 나라라고 알려진 곳이다.









 튀르키예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프랑스에서 독감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호텔방에 갇혀 지독하게 앓았다. 이대로 죽나 싶을 정도로 열이 올랐고 간병해 줄 사람이 없어 더 서럽고 아팠다. 약을 먹기 위해 주방으로 기어가 바게트빵을 우적우적 씹어 넘기는… 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 결과 일주일이나 허비했다. 여윳돈을 호텔비로 다 날렸고 유럽식 건물만 봐도 지긋지긋한 단계에 이르렀다. 몸이 괜찮아질 무렵 유럽을 벗어나 색다른 나라에 가기로 했다. 이국적인 풍경과 싼 물가. 비행기표도 비싸지 않은 곳.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나라. 튀르키예다.


 나는 마르세유에서 출발해 새벽 3시경 카이세리 공항에 도착했다. 충동적으로 온 거라 유심이 없어 핸드폰이 먹통이었고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프랑스에서 쓰고 남은 50유로뿐이었다.


 새카만 새벽 공항에 입국했을 때부터 12일 뒤 튀르키예를 떠나는 비행기에 탈 때까지 나는 늘 초긴장 상태였다. 그것부터 주파수가 맞지 않는 나라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 나라에서 유독 기묘하고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튀르키예가 안 좋은 나라라는 인상을 주고 싶진 않다. 내가 만난 배낭 여행객 10명 중 7명은 튀르키예가 최고라고 말할 정도로 매력적인 나라다. 사실 나도 돌이켜 생각해 보니 튀르키예만큼 스릴 넘치고 강렬했던 나라는 없었던 것 같다.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내 주관적인 견해가 가미된 개인적인 경험이다. 어떠한 편견도 갖지 말아 주시길.














튀르키예 국기는 정말 튀르키예답다









 택시 기사들

 사실 튀르키예 택시 기사 얘기만으로 이 책의 절반을 채울 수 있다. 앞서 편견을 갖지 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택시기사들만큼은 색안경을 끼고 봐도 좋다.

 그들의 모습과 태도는 아주 일관됐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통 중년 남성들이 택시를 모는데, 대다수가 반쯤 벗어진 머리, 짧게 깎은 수염, 케밥으로 찌운 뱃살을 장착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원색 반팔 카라티를 많이 입는다. 그들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사기꾼’이다. 남의 나라 작업군을 비난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만 워낙 많이 당해서 그렇다.


 만약 튀르키예에서 웃돈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길을 돌아가지 않으며 원하는 목적지 바로 앞에 세워주고 친절하고 영어를 잘하는(여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택시기사를 만난다면 당신은 엄청난 행운아다. 12일 동안 여러 번 택시를 이용했는데, 한 번도 그런 기사를 만난 적 없다.


 기억에 남는 사건 하나를 풀어보겠다.

 공교롭게도 튀르키예 1일 차에 만난 기사였다. 그래서인지 그 택시 기사의 얼굴이 이 나라의 첫인상이 됐다. 카이세리 공항 근처 호텔에서 만난 놈인데 제일 악랄했다.

 그때 나는 환전을 못해서 목적지인 카파도키아 괴레메에 갈 방법이 없었다. 호텔 위치를 잘못 잡아 버스터미널까지 거리가 멀었고 우버나 대중교통도 없었다. 놈은 호텔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내게 접근해 50유로만 주면 괴레메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주 선심 쓰듯 말했고 가는 길에 멋진 풍경도 보여주겠다 약속했으며 어차피 괴레메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숙소까지 또 택시를 타야 한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래도 통하지 않자 대뜸 어디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답하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는 형제의 나라야!라고 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나는 결국 그 꾐에 넘어가 72,000원이라는 거금을 그에게 쥐어줬다.


 이 나라 물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튀르키예 택시비는 정말 싸다(이걸 알고 나서 택시를 탈 때마다 괴로웠다). 게다가 괴레메 터미널에서 또 택시를 타야 한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괴레메는 아주 작은 마을이라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걸어서 1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카이세리 택시기사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물론 그의 얕은 술수에 당한 건 사전 지식이 없고 부주의했던 나의 탓도 있다. 나처럼 바보 같은 관광객을 만난다면 누구라도 바가지를 씌우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놈의 얼굴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괴레메에 도착하기 10분 전, 그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도로 옆 허허벌판에 아주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낯선 언어로 된 나무 간판이 달려 있었는데, 아마 휴게소 인 듯했다. 그는 여기서 쉬다 갈 거라며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도 닦달하는 탓에 놈을 따라갔다.  

 건물 안에는 중년 남성들로 가득했다. 전통 차나 인스턴트커피를 손에 든 사람들이 전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장면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기묘했다.

 그는 가장 안쪽 빈방에서 내게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 방은 해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고 철제 침대가 즐비해 있었다. 꿉꿉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썩은 나무냄새 같기도 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옆자리를 톡톡 건드리며 앉으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온 그가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너 긴장했니? 걱정하지 마. 그냥 쉬다 가자”라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10분 밖에 안 남았는데 왜 쉬냐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방에 들어갔다면 그가 어떤 짓을 했을지 모르겠다. 상상하기도 싫다.







 택시기사들이 돈을 뜯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차가 막힌다는 핑계로 길을 뺑뺑 돌아가서 추가요금을 받는 경우는 그나마 양심 있는 편이다. 어떤 나이 든 택시 기사는 대놓고 돈을 더 달라며 떼를 썼다. 그냥 내리려고 하면 차를 잠그고 액셀을 밟아버린다. 왜? 왜 더 줘야 하는데?라고 따져봤자 소용없다. 그냥 달라 이거다. 심지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도 않았다. 도로가 버젓이 있는데도 갈 수 없다고 못 박아 버리면 그만이다.


 나중에는 이번엔 어떤 수를 쓸까 기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 치다가 현금이 아예 없다고 하자 슬쩍 기계를 꺼내 들었던 기사가 제일 웃겼다. 그땐 비행시간 때문에 급해서 일단 카드를 긁고 내렸는데, 금액을 뒤늦게 확인해 보니 원금에 두 배나 받아 쳐 먹었다.


 우버라고 다를 건 없다. 어느 나라를 가도 우버 기사와 매칭되면 차가 움직여 고객이 있는 데까지 온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다르다. 분명 매칭이 돼서 근처에 있다고 뜨는데 5분 1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참다 참다 직접 차가 있는 곳으로 가보면 기사가 차를 세워두고 동료 기사들과 떠들고 있다. 나를 보고 어 왔어? 하며 손을 흔들고는 그제야 운전대를 잡는다. 되게 황당한데 때때로 재밌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한 번은 우버 기사와 추격전을 했다. 어플에 움직이는 차 아이콘을 보며 번잡한 거리를 달렸다. 마치 범죄자를 잡는 형사가 된 기분이었다. 안타깝게도 놓쳤지만 은근 스릴 있었다.


 눈치챘겠지만 튀르키예에서 택시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반쯤 정신을 놓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도 쉽지 않다. 내가 만난 튀르키예인들은 전부 대단한 고집과 끈기를 갖고 있었다. 성미 급한 한국인으로서 우직하게 견뎌 그 고집을 꺾기란 쉽지 않다.









내가 그 기사를 봐준 건 창밖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













카파도키아 괴레메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카파도키아 괴레메를 여행한 후 이렇게 말했다.

 “진작 여기에 와 봤더라면 굳이 달에 갈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참 기깔나는 표현이다. 괴레메 피죤밸리에 서서 웅장한 파노라마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지구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약 3백만 년 전(가늠조차 할 수 없다), 화산 폭발과 지진 활동으로 형성된 아나톨리아 고원은 암석군 지대다. 용암과 화산재가 섞이면 검고 단단한 현무암이 되고 분말 상태로 날아와 굳으면 무른 응회암이 된다. 응회암은 경도가 약한 편이라 쉽게 깎여 날아간다. 바람의 섬세한 손길로 조각된 응회암을 보고 있으면 햇빛에 녹아내린 버터스카치 아이스크림이 떠오른다. 나는 모래바람을 우두커니 맞으며 카파도키아의 정취를 느꼈다. 건조하고 척박하지만 조용한 바람이었다.


 핵석이라 불리는 버섯 모양 기둥은 용암이 표면으로 솟아 올라가다 식어서 형성된 것이다. 먼 옛날 인간은 높고 낮은 핵석 기둥에 홈을 파 비둘기 집을 만들었다. 그때 당시에는 비둘기가 유일한 소식통이었다. 회귀본능이 있는 비둘기는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쪽지를 전하고 다시 피죤밸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날 비둘기들은 일자리를 잃고 관광객들이 주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영겁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이 빚은 조각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아마 이 지구상에 인간도 비둘기도 사라지는 그날이 온다 해도 여전히 찬란하게 존재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잠깐 스치는 이 모래바람이 어쩌면 내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














 나는 괴레메에서 꽤나 고생했다.

 스타워즈 세계를 체험해 본 대가 치고는 호되게 혼났다. 일단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나는 입맛이 딱히 까탈스럽지 않다. 맛집을 찾아다닐 정도로 식욕이 강한 편도 아니다. 그래서 여행 중 음식 문제로 곤란한 적은 없었다. 내게 음식이란 그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먹어야 하는 귀찮은 것 정도다. 맛있으면 좋고 맛없어도 배만 부르면 된다.


 내가 있었던 숙소에는 부엌은커녕 전자레인지도 없었다. 괴레메 마을 전체가 서로 합심이라도 했는지 식재료를 살 마트도 없다. 결국 불가피하게 매 끼니를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다. 

 음식이 대체로 짰다. 신선한 야채도 없었고 대부분 먹고 나면 소화가 안 되는 음식들 뿐이었다. 어떻게든 먹고 나면 배가 아팠다. 그게 문제였다. 괴레메에 있는 일주일 동안 인생 최저 몸무게를 찍었다. 기력이 떨어져 오래 걸으면 어지러웠고 거울 속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빼빼 말라갔다.


 게다가 음식 가격도 비쌌다. 괴레메가 관광지라는 걸 감안해도 비쌌다. 가격이 어찌나 자주 오르는지 메뉴판 자체가 수정하기 편한 화이트보드 재질이었고, 구글맵 식당 리뷰를 보면 3,4년 전 가격과 지금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차이 났다. 괴레메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항아리 케밥은 2만 원 대, 스테이크와 와인 한 잔에 5만 원, 한식당에서 파는 김치찌개가 12,000원(지금은 더 올랐을지도).

 프랑스에 있을 때 마트에서 파는 80센트 바게트를 먹으며 아낀 돈을 괴레메의 맛없는 레스토랑에서 다 날려버렸다. 참 바보 같다.







내 취향 아닌 쌀푸딩과 차이










 음식 값 때문에 숙소비라도 아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괴레메에서 가장 저렴한 호스텔에서 묵었다.

 그 호스텔은 응회암을 깎아 만든 동굴 형태의 건물이었다. 나는 하루에 20,000원 꼴로 잘 수 있는 10 베드룸을 택했고 그 방은 지하에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오면 어쩐지 기분이 심란해졌다. 해가 들어오지 않아 지독한 곰팡이 천국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배드버그는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창문 바로 앞에서 공사를 했다. 괴레메의 모래와 시멘트 가루가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오면 숨도 못 쉴 정도로 공기 질이 나빠졌다. 그 방에서 3일을 보냈을 무렵부터 몸 상태가 악화됐다. 건조한 탓에 목이 부어올랐고 기침이 심해졌으며 두통에 시달렸다.



 신선한 공기를 찾아 나간 밖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거리 어딜 가나 모래 바람이 분다. 뷰가 보이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둔 카페에 가면 테이블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점원은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는 나를 보고 머쓱한 듯 웃어 보였다. 첫날에는 청소를 안 하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다. 자주 닦아도 눈 깜빡할 사이에 쌓이는 거다. 괴레메 주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거리에서 담배를 뻑뻑 핀다. 이미 모래 바람에 망가진 폐니까 막 쓰는 건가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의 본질이란 공기를 마시는 일이 라고 했다. 기억은 사라져도 여행을 할 때 들이마셨던 그 나라의 공기는 오랫동안 몸속에 남는다며. 나 역시 괴레메에서 들이마신 모래 섞인 공기가 아주 오랫동안 내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음을 느꼈다.











웬만해선 참겠는데 말이야









 불운은 떼를 지어 온다는 말이 있나? 없다면 내가 만들어보겠다. 여기 그럴만한 증거가 있다.

 나는 괴레메에 열기구를 타러 왔다. 그것만 기대하며 모래바람과 맛없는 음식과 썩은 숙소를 견뎠다. 컨디션이 회복된 날 자그마치 35만 원을 내고 열기구 투어를 예약했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열기구를 타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 시간 동안 버스에 앉아 기다리기만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날씨 때문에 취소된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투어 사무실로 갔다. 직원은 내일도 날씨가 흐려서 열기구가 못 뜰 거라고 했다. 나는 내일모레 이스탄불로 가는 일정이라 열기구를 포기하고 돈을 돌려받았다.  


 그날 혼자 숙소 옥상에서 맥주 3병을 깠다. 거하게 취했을 때쯤 다른 투숙객 무리에 껴서 2병을 더 마셨다. 그 무리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아저씨가 며칠 전 열기구를 탔을 때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그는 인생 최고의 경험이라고 했다. 인크레더블, 원더풀, 어썸, 판타스틱. 좋은 말이란 말은 다 갖다 붙여서 열기구 투어 후기를 전했다. 아아, 정말 타고 싶었는데. 정말 정말 간절하게 말이야.

 나는 열기구를 타러 괴레메에 다시 올까? 모르겠다. 이스탄불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드디어 벗어난다는 해방감을 느꼈기에 확신할 수 없다.











갑자기 눈이 떠진 어느 새벽, 옥상으로 올라가 봤던 풍경










이스탄불

 가장 튀르키예스러운 곳이 있다면 아마 이스탄불이 아닐까 싶다.

 이스탄불에 가면 왜 여기가 수도가 아니지?라는 의문이 생긴다. 유럽과 중동을 통 틀어 가장 큰 도시고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거리 어딜 가나 달과 별이 그려진 빨간 국기를 볼 수 있어 튀르키예의 짙은 정체성도 느껴진다. 심지어 부루마블에 앙카라는 없어도 이스탄불은 있다.


 실제로 과거엔 이스탄불이 수도였다. 술탄을 중심으로 한 오스만튀르크 왕조가 나라를 통치할 때, 터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백 번 들어도 까먹을 듯한 이름이다) 근대 국가인 튀르키예 공화국을 설립하기 위해 수도를 앙카라로 천도하여 구 세력을 떨쳐냈다. 그게 1923년 10월에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앙카라 여행을 추천하지 않는다. 그곳은 온통 잿빛이고 볼 게 없어 관광객 대부분이 이스탄불로 모여든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굉장히 들떠 있었다. 드디어 작은 마을을 벗어나 도시로 왔는데 그 도시가 이렇게나 크다니! 로션이 없어 핸드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바디워시가 없어 샴푸로 몸을 씻는 생활이 이제 끝난다는 게 좋았다.


 첫날, 대형 백화점부터 갔다.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날씨가 추워질 것을 대비해 털 재킷도 구매했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현지인들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다. 선글라스, 가죽재킷으로 멋을 낸 여자, 명품으로 휘감은 커플, 위아래 청청 패션에다 금장이 박힌 벨트로 포인트를 준 남자. 유행하는 스타일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각자 최선을 다해 꾸민 태가 났다.


 이스탄불에서 거리를 걷다 보면 눈과 귀가 쉴 틈이 없다. 오토바이, 택시, 승용차, 버스, 트럭, 트램 등 인간이 탈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으로 정신없는 도로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수 백,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엔진소리와 매연, 클락션 소음이 그들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어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무지막지하게 바빠 보인다.







이 트램은 과연 몇 살일까








 나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맛집만 찾아다녔다.

 괴레메에서 워낙 음식 때문에 고생한 탓에 이스탄불에서 설욕전을 펼친 것이다. 나는 뒤늦게나마 튀르키예가 왜 미식의 나라라고 불리는지 알게 됐다.


 이스탄불 카이막 맛집을 찾아가 꿀이 들어간 우유, 오믈렛과 함께 브런치를 먹었다. 천상의 맛이라고 불리는 카이막은 그 명성대로 부드럽고 쫜쫜하고 달콤하고 고소하고 촉촉했다. 맑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따서 가장 진한 부분만 긁어모아 빵에 발라먹으면 이런 맛이 날 것 같았다.


 갈라타 다리 근처에서 먹은 고등어 케밥도 기억난다. 

 갈라타 다리 근처 항구에 가면 코발트블루 색 바다 위 형형 색색으로 꾸민 배들이 둥둥 떠있다. 그 위에서 수 십 마리 고등어가 동시에 구워진다. 이곳에서는 작은 배가 주방이다.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등어 케밥을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배 앞에 있는 주인장에게 고등어 케밥 하나를 주문하면 거진 10초 만에 나온다. 그곳을 천천히 둘러보면 왜 빠른지 알 수 있다. 고등어를 굽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가히 생활의 달인에 나옴직하다. 그들은 커다란 불판 위에 빽빽하게 누워있는 고등어를 쉴 틈 없이 뒤집는다. 결코 살이 부서지거나 타는 법이 없다.


 조리법도 간단하다. 바게트 빵을 갈라 구운 고등어 한 마리와 생양파를 넣으면 끝이다. 배 앞에 펼쳐놓은 간이 테이블에 정체 모를 소스가 있는데 뚜껑이 너무 더러워서 그냥 먹었다. 맛이 오묘한데 계속 먹게 된다. 분명 아는 맛인데 처음 먹어보는 맛. 어쩌면 맛있기 위한 최적의 조건 아닐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 입 먹을 때마다 가시가 2,3개씩 나왔다. 뭐, 가시를 발라주는 대신 줄을 서서 먹으라 하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사실 튀르키예 레스토랑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크나큰 스트레스였다.

 혼자 가서 밥을 먹고 있으면 직원들이 와서 1분에 한 번씩 말을 건다. 맛있나? 더 필요한 건 없나? 디저트를 원하나? 내가 대접할 테니 먹어라. 그것은 그냥 친절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어떻게든 해보려는 수작이 그득그득했다. 5번, 6번 거절해도 기어코 차이와 전통 디저트를 내왔다.


 눈치를 보다 남기고 계산을 하러 가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본다. 거절해도 플리즈- 라며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진다. 한 번은 내가 화장실 가는 것을 보고 따라와 외진 복도에서 인스타 아이디를 달라 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때는 둘 뿐이라 무서워서 아이디를 줬다. 레스토랑을 나가자마자 그를 차단했고 작은 동네에서 그 레스토랑 앞을 피해 다니느라 매번 길을 돌아서 갔다.





 이스탄불 숙소 근처 레스토랑에서도 황당한 일을 겪었다. 밥을 다 먹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직원이 나를 다급하게 붙잡더니 앉으라 했다(나는 내가 무슨 도둑인 줄 알았다).

 계산이 잘못됐나 하고 기다리기를 몇 분. 갑자기 어떤 중년 남자가 나와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대뜸 내가 여기 사장인데 얘기 좀 하자 라며 차이를 내왔다. 그러고는 직원과 얘기하는 척 은근슬쩍 돈다발을 꺼내 부를 과시했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미국 여행 썰을 풀었다. 나는 그 아저씨가 미국에서 어떤 바비큐를 먹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계속 간다고 일어나도 “나 유명한 사람이야. 그런 내가 지금 너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라며 못 가게 막았다. 한참 동안 이어진 실랑이 끝에 다음 날 다시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그 레스토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그 중년 사장 마음을 훔친 죄로! 그 집에서 먹은 생선구이가 참 맛있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사장님, 생선만 구우시죠









 그런 튀르키예에서 최고의 레스토랑을 뽑는다면 아야 소피아 사원 근처에 있는 양고기 케밥 레스토랑을 택하겠다. 나는 그 레스토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안’하고 맛있는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 안은 북적였다. 관광지 근처에 있는데도 현지 사람이 눈에 띄게 많았다. 흰색 벽지에 의자, 테이블, 시계, 문, 몰딩까지 진한 갈색톤 우드로 통일되어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그러나 자리를 잡고 앉아 자세히 살펴보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테이블에 난 흠집, 벽면에 걸려있는 무스타파 케말의 자화상, 코팅이 벗겨진 타일 바닥, 오래전 유명인사가 남기고 간 누레진 싸인 종이. 모든 부분에 숯불향이 진하게 배어있다.


 그 레스토랑은 정신없고 복잡할지언정 정감이 있었다. 특히 활기차게 레스토랑 안을 누비는 직원들이 눈에 띈다. 홀서빙 직원만 4명 있는데 다들 정해진 것 없이 일한다. 주문을 받는 사람과 소스를 가져다주는 사람, 메인 요리를 내놓는 사람 그리고 계산하는 사람까지 계속 바뀐다. 그러나 모두 친절하고 빠르다.


 나는 양고기 케밥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잠시 기다리자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양고기와 이상하리만큼 기다란 고추 절임이 나왔다. 양고기 케밥은 추가 주문을 망설이게 될 정도로 너무 맛있었다. 불향이 밴 촉촉한 양고기와 고추 절임을 곁들여 매운 소스를 찍어 먹으면 환상이다. 계산할 때 주인장에게 너무 맛있었다고 말하자 그가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괴레메와 이스탄불. 극과 극인 이 두 곳의 공통점을 꼽아보자면 바로 코딱지다(먹는 얘기 하다 이래서 미안하다).

 괴레메에 있을 때나 이스탄불에 있을 때나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쌓이는 코딱지 때문에 놀랐다. 12일 동안 생긴 코딱지를 한데 모았다면 조그마한 잉크병 정도는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먼지와 모래바람, 매연으로 점철되어 건조한 곳들이었다.








뭔가가 떠오른다












 최악의 사건

 11일 간 튀르키예 여행을 마치고 이제 또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슬로베니아에 가기로 했다. 하도 난봉꾼과 호객 행위, 도둑놈 같은 택시 기사들에게 시달려서 그런지 가장 안전한 유럽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슬로베니아에 가서 진정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아침 9시 비행기라 새벽 6시에 일어났다. 부스스한 몰골로 짐을 전부 방 밖으로 옮겼다. 내 숙소는 4인 여성 도미토리였다. 다른 투숙객들이 전부 자고 있어 깨우기 싫었다. 마치 좌판을 깐 상인처럼 계단이 있는 복도에 짐을 늘어놓았다.


 통로가 좁아서 사람들이 지나다닐 틈도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투숙객들이 내 짐을 피해 깨금발로 지나다녔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카메라와 돈, 비행기 안에서 쓸 립밤을 찾아 작은 가방에 옮겼다. 물건을 다 찾고 마지막으로 여권을 찾는데, 늘 여권을 넣어두던 주머니가 텅 비어있었다.

 뭐지? 내가 다른 데에 옮겼나? 하고 배낭을 뒤졌다.

 없었다. 

 에이 있겠지 하며 다시 캐리어를 뒤집어엎었다.

 없었다.

 순간 찌릿하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캐리어 속에 깃든 악령을 물리치는 퇴마사처럼 짐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 옷이고 노트북이고 뭐고 다 꺼내 놓고 속 주머니까지 열어보며 여권을 찾았다.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진한 카페인 원액을 들이켠 것처럼 심장이 쾅쾅 뛰더니 식은땀이 등에 쫙 나고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각해 보니 벌써 며칠 째 여권을 꺼낼 일이 없었다. 이스탄불 백화점에 갔을 때도 여권을 가져가지 않아 사진으로 세금 면제를 받았으니까.


 내가 왜 여권을 잊어버리고 다녔지? 한 번쯤은 찾아볼 수 있지 않았나?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랬지. 누가 훔쳐간 게 분명해. 괴레메 숙소에 별의별 사람들이 드나들었잖아. 난 분명 배낭에 넣은 뒤로 꺼낸 적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외출하거나 자는 사이에 누가 훔쳐간 거야. 중국에서 한국 여권이 비싸게 팔린다던데.


 나는 한동안 멍하니 주저앉아있다가 이내 찾는 것을 포기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손이 덜덜 떨렸고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이스탄불 여권 분실 사건. 이것을 내 여행 인생 통틀어 최악의 사건으로 뽑겠다.







 슬로베니아행 비행기 표는 50만 원이었다.

 변경 가능 티켓도 아니었다. 급하게 항공사 측에 변경 옵션을 확인해 봤지만 무려 200달러를 추가 요금으로 내야 했다. 문제는 그마저도 못했다. 내일 슬로베니아에 가려면 긴급여권으로 입국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게 먼저였다. 슬로베니아에는 한국 대사관이 없어 오스트리아 한국 대사관을 통해 긴급여권 입국 가능 여부를 물어보자 1시간이나 기다리라는 답변이 왔다.

 결국 티켓 변경 가능 시간이 지나 딱 비행기 보딩 타임 때 슬로베니아에 긴급 여권으로 입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해 받았다.


 자,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끔찍한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래, 일단 긴급여권으로 입국이 가능하니까 오늘 이스탄불 대사관에 가서 재발급받으면 돼. 어쩌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다행이지. 더 최악의 일은 많아. 내 몸 하나 건사하면 돼.


 이런 식으로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내게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중얼거린 듯하다. 비록 내가 한 말이지만 귀로 전달되어야 진정할 수 있었다. 의지할 사람이 없어 나 자신에게 의지했다.











(사진 넣을 대목이지만 지금 한가로이 사진 고를 때가 아니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정보를 토대로 긴급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두 가지 준비물이 필요했다.


 '여권 발급 수수료'

 여권을 분실한 지역 내 경찰서에서 발급받을 수 있는 ‘여권 분실 신고서’


 나는 숙소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경찰서부터 찾아갔다. 이스탄불 경찰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우리나라 파출소 분위기가 절대 아니다. 안에 들어가는 것부터 철장으로 된 게이트를 통과해야 했고 유리로 된 부스 안에서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여권 분실 신고서를 발급받으러 왔다고 하자 험상궂은 인상의 경찰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내게 통역사 없이 아무것도 발급해 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지금 여기서 튀르키예어 통역사를 어떻게 구해요? 라며 발을 동동 굴러도 소용없었다. 나는 경찰관 핸드폰을 빌려 대사관에 전화해 상황을 전했다. 그러자 분실 신고서는 대사관에 와서 작성해도 좋으니 발급비만 현금으로 준비해서 오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애초에 호스텔에서 전화를 빌려 미리 물어봤다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해외에서 이런 상황이 터진 게 처음이라 잔뜩 당황해서 무작정 경찰서부터 찾아 간거다. 


 침착해야 한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몸을 이끌고 다음 단계로 갔다.






 이번에는 ATM기를 찾아 돌아다녔다. 다시 숙소 쪽 골목으로 들어가 큰 길가를 향해 걸었다. 21인치 캐리어가 내 걸음을 늦추고 10kg 배낭이 내 어깨를 짓눌렀지만 걸어야 했다. 어제 아침 내 배를 채워준 카이막 맛집을 지나쳤다. 오늘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골목마다 걸려있는 빨간 튀르키예 국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 국기를 보며 나에게 왜 이리 잔인한 거냐 소리치고 싶었다. 여권이 사라진 건 네 잘못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겠지. 억울한 마음을 누르며 앞만 보고 걸었다.



 신호등을 건너 ATM기로 갔다. 체크카드를 넣고 금액란에 우리나라 돈으로 6만 원 상당인 1400리라를 입력했다. 그런데 돈을 인출할 수 없다는 문구가 뜨더니 체크카드를 뱉어냈다. 옆칸 다른 기계에 다시 카드를 넣어보았다. 이번에는 아무런 문구도 뜨지 않았다.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보았다. 기계는 반응이 없었다.


 어떤 버튼을 눌러도 내 체크카드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망할 ATM기가 내 체크카드를 홀랑 먹어버렸다.


 나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실소가 터져 웃다가 눈앞이 또 흐려졌다. 하지만 아까와 다른 느낌이었다. 똑같이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이제는 눈물이 고였다.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며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눈앞에 각자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다. 그 수많은 다리들은 빠른 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나를 도와주려 걸음을 늦추는 다리는 없었다. 내가 아는 다리도 없었다.


 바로 이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채, 걷고 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저 멀리 어딘가 편안한 곳을 찾아 도망갔다. 이제 더 이상 이 몸에 오는 충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내 정신은 꽤나 화를 내고 떠났을지도 모른다. 너무한 거 아니야? 일을 이렇게 한꺼번에 떠 맡긴다고? 난 잠시 파업을 선언하겠어하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 보니 다른 카드로 현금을 인출했고, 나는 택시를 타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었다. 폐에 40% 부분만 사용해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얕은 숨을 쉬며 택시 좌석에 몸을 반쯤 누인 채 천장을 응시했다. 텅 빈 머릿속에 깜빡이던 단 하나의 문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뿐이었다.


 그러자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불렀다. 그때는 왜 갑자기 노래를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노래는 내가 오래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늘 불렀던 노래다. 나의 뇌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멈추었지만, 본능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의미하는 노래를 떠올렸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이 부분만 반복해서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사관 앞에 도착했다. 택시기사는 어김없이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나는 아무 지폐나 꺼내 쥐어주며 가지라고 했다.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거짓말 아닙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다음 날 나는 무사히 슬로베니아에 도착했다.

 이 사건으로 내가 날린 돈은 120만 원에 달한다. 비행기 표, 슬로베니아 첫날 숙소비, 이스탄불 추가 호텔비, 여권 발급비, 오며 가며 쓴 택시비, 이스티클랄에서 찍은 여권 증명사진 비용, 거기다 날린 체크카드 하나.


 그때 당시에는 내가 날린 돈을 강박적으로 세어보며 괴로워했다. 배를 곯리며 가장 싼 호스텔만 찾아다니는 배낭 여행객에겐 배때지를 칼로 쑤신 것 마냥 큰 출혈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몇 년이 흐르고 더 많은 여행을 하고 난 지금. 나는 120만 원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경험의 가치를 느낀다.

 나는 튀르키예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 낯선 땅에서 느꼈던 절망감은 아주 강력한 기폭제가 되어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 그 사건을 혼자 이겨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여권 분실은 죽어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잃어버렸던 나라가 우당탕탕 튀르키예라 다행이다. 강렬한 도화지에 강렬한 사건 한 점을 찍어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이 됐다. 나는 그 그림을 추억이라 부르고 싶다.



 마지막으로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고백하자면…

 일주일 뒤 슬로베니아 호스텔에서 짐 정리를 하던 중 숨어있던 내 여권을 발견했다. 허탈감에 말문이 턱 막혔지만, 내 모든 고생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웃어제꼈다. 하하, 이스탄불 여권 분실 착각 사건으로 정정하겠다.  


 내 방에는 여권 3개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나의 첫 여권인 초록색 구 버전과 이스탄불 대사관에서 발급받은 긴급여권,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새 여권. 그 여권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누구보다 바보같이 느껴지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기묘한 쾌감이 느껴진달까.

 그나저나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날 아침 이스탄불 호스텔에서 분명 여권을 발견한 주머니를 몇 번이고 뒤졌는데, 왜 못 찾았을까?


















 이렇듯 살다 보면 주파수가 맞지 않는 영역에 발을 들이는 일이 생긴다.

 스스로 선택했거나 어쩔 수 없이 흘러들어 갔거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모래바람 휘날리는 불모지에서도 푸른 추억을 쌓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목전에 두고도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떠난다.

 그래서 나는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질문이 가장 어렵다. 안전한 유럽을 원한다면 슬로베니아, 아 근데 맥주 좋아해? 그럼 독일에 가야 하는데. 모험을 원한다면 튀르키예만 한 곳이 없어. 근데 역시 프랑스가 낭만 있지. 9월에 갈 거면 그리스를 빼놓으면 안 돼. 이렇게 되어버리니 도무지 추천을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에게 맞는 곳이 어딘지 내가 어찌 알까. 나도 나에게 맞는 나라가 어딘지 찾아가는 중인데.


 가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오랜 시간 기억에 남았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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