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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Oct 27. 2024

2. 소작농은 오늘도 동네 꽃밭으로 출근을 한다

 꽃밭에 도착했다. 오는 길이 험난하지는 않았다. 걷기에는 꽤 먼 거리와 함께 날씨도 무더웠지만 오히려 유성은 그 모든 것들에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무관심했다. 흙길을 차며 걷는 본인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고 불규칙하게 길가에 솟아나 있는 들꽃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며 걸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풍만한 꽃 냄새가 코를 통해 거의 다 왔음을 전달했다. 곧 열심히 꽃밭을 가꾸는 원예가들의 모습이 유성의 눈에 들어온다. 굽은 등과 그에 못지않게 때가 탄 손. 꽃들이 만개하도록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돌보는 그들이다. 항상 생명을 다루는 일을 관찰하다 보면 설명 못할 신비로움이 향연 하는 순간을 보게 될 때가 있다. 한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새로운 생명과 어머니의 탄생을 목도하는 순간이나, 탯줄과 같이 산소통을 연결한 해녀들이 바다 깊은 곳의 산호들 사이 미처 숨기지 못한 홍게의 얄궂은 집게발을 발견하는 순간처럼, 꽃밭의 농부들도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새로운 씨앗을 심을 때는 누구보다 신중하게 새 생명을 준비하고, 썩어버린 꽃을 파낼 때는 누구보다 아파하고 슬퍼한다. 그렇게 탄생하는 꽃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 중 하나였던 유성은 오랜만에 꽃밭에 오니 감회가 남다르다. 그들의 돌봄을 받아 서울로 떠났던 유성이기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물씬 느낀다. 농부들의 손길에 힘을 내는 새싹들과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들을 바라보며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들기 직전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감상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 있는 곳이 아니다. 농부들 중 한 명이 유성을 알아보고는 얼른 들어와서 일하라고 손짓한다. 이곳은 전적으로 꽃들을 위한 공간임을 잠시 잊었던 유성은 정신을 차리고 손짓한 농부에게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 그래 좀 막혔나 보네 할 일이 산더미야 이번에 유성이 너는..


 유성에게 일하는 법을 짧게 요약한 그는 바로 다른 꽃을 가꾸러 떠난다. 지난겨울에도 왔던 유성이라 짧은 요약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했다. 그는 곧장 옷을 갈아입었고 배정받은 꽃밭으로 향했다.


 겨울.. 그래 지난겨울이었다. 유성의 하경에 의미를 부여해준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고모부의 등 떠 밀림에 이곳에 와 꽃밭 일을 돕던 지난날들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 겨울에는 존재했다. 고모와 고모부가 말로만 강조했던 꽃들과의 직접적인 교감이 유성에게도 선물같이 날아 들어온 것이다. 유성의 마음도 아마 시작부터 이전과는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노란 프리지어 밭을 처음 본 순간 그때의 날씨와 같이 검게 얼어붙어 있던 그의 마음이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의무감에서 자발적으로 본인도 모르게 변하게 된 후, 프리지어들은 유성에게는 아이가 되었다. 날카로운 추위를 막아주고, 건조한 겨울철 상온 가운데에 더 많은 물을 주며 봄에 만개하게 될 프리지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마음에서 그는 꽃들과의 교감이 시작되었다. 밭의 가에 있는 꽃들에게 밭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더 많은 정성을 부어주고, 중앙에 있는 프리지어들에게는 옆 친구들과의 싸움을 억제하며 뿌리를 관리해 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올해 봄, 유성의 자발적인 노력에 감사라도 하는 듯 활짝 만개하며 꽃밭을 떠났고 그는 이번 여름 또 다른 꽃들과의 시간을 꿈꾸며 지금 배정받은 꽃밭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꽃을 가꾸는 일은 쉽지는 않은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적당한 온도와 물과 햇빛의 조화로움과 이를 위한 농부들의 극도의 성실함이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부적인 디테일이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각기 다른 꽃마다의 성향과 특징을 잘 파악해야 하고 그것에 맞는 케어가 필요하다. 환경에 예민한 꽃에는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줘야 하고 그 꽃 때문에 다른 주변의 꽃들에게 피해가 가서도 안된다. 썩어가는 꽃에게는 응원과 격려를, 너무 일찍 만개하려는 꽃에게는 충고와 기다림을.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 이 꽃밭에서 일하는 것이다. 꽃과의 쌍방의 교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애정으로도 어느 정도의 교감을 통해 꽃을 키울 순 있겠지만, 보다 깊은 만남이 이 농부와 꽃 사이에 충족될 때 진정으로 꽃을 개화시킬 수 있다. 이것을 어려워하거나 이 단계까지 가기 전 지쳐서 포기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여럿 존재한다. 유성 같은 경우에는 꽃을 만개시켜 수확하는 일은 그 순간도, 그 순간까지의 과정도 그에게 가슴 떨리고 스스로 대견해할 일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고 그 기억으로 지금까지 꽃들을 돌보고 있는 것이다. 배정받은 꽃밭에 도착했다. 다행히 이번에 그가 맡은 꽃밭은 거의 만개해 가는 꽃들이 모인 밭이다. 아마 조금만 있으면 금방 만개해 수확될 녀석들이다. 어느 정도 다 큰 꽃들이었고 이미 피기 시작한 녀석들도 즐비했다. 종류가 다양해 한 꽃 한 꽃에 맞추어 관리해야 하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밭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새싹들에 비해서는 쏟을 것이 덜하기도 하고 활짝 피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녀석들이라 그때까지만 꽃들을 격려하며 돌봐주는 것이 끝이기 때문에 유성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꽃들의 만개가 주는 그 감동을 적은 노력으로 다시 느낄 수 있겠다는 것까지 계산이 머릿속에서 착착 진행되었다.


 순탄하게 일은 진행되었다. 유성이 워낙에 꽃 다루는 일을 옛날부터 억지로라도 많이 해보기도 했고, 꽃들도 어려움이 많은 꽃들은 아니었다. 꽃에게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따뜻한 말로 건강하게 만개하기를 응원한다. 흙빛에 가려진 꽃들의 생기 넘치는 빛깔들은 유성의 손을 거쳐 햇빛과 공명한다. 꽃 돌보는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허리가 저릴 때가 자주 온다. 30분에 한 번 꼴로 허리를 펴줘야 무리가 가지 않는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어주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 유성처럼 굽은 등들 뿐이다. 고개를 처박은 닭들처럼 꽃 이외에는 다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이다. 꽃들에게는 높디높은 이 봉우리들이 본인들을 끝까지 품는 산들이 될 것이다. 가끔 가다 타이밍이 맞아 고개를 들어 다른 농부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본인들의 일이 가치 있다는 확신을 서로 주고받고 다시 일에 열중한다. 이렇게 꽃 가꾸는 일을 좋아하는 유성이지만 아예 본인 전담의 밭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는다. 자기 밭을 가지고 사는 것은 완전한 농부로 직업이 결정되어 버리는데 이것이 유성의 마음에 내키지는 않는다. 그의 마음은 아직 서울에서의 평범한 삶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다. 원예가는 유성에게 성에 차지 않는 직업이기도 하고 벌이도 좋지가 못하다. 그래서 방학 때만 이렇게 꽃밭으로 내려와 꽃을 가꿀 때의 설렘과 즐거움을 느끼고 본인의 낭만을 채운다. 소작농과 같이. 이 소작농은 본인의 꽃들은 아니기에 그 순간의 낭만과 감성을 위해 그리고 조금의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한다. 자신의 꽃이 없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열심히 꽃에 물을 주고 정성으로 꽃을 돌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모두가 늘어지듯 늘어진 여름은 끝날 기미 없이 지속되었고 여느 때와 같이 나타난 태양도 이 작은 시골에서 어떤 큰일이 일어날 예정이라는 듯이 지구에 한걸음 다가가며 관심을 보였다. 태양의 관심은 아침부터 농부들에게 작열한다. 농부들은 받은 만큼 꽃들에게 돌려준다. 소작농은 오늘도 동네 꽃밭으로 출근을 한다. 꽃들에게 하나하나 물을 주며 밝게 인사한다. 근 며칠간 유성은 꽃들과 함께하며 향기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점점 다가오는 만개의 날이 꽃들을 통해 온몸으로 느껴지는 유성은 뛰는 가슴을 애써 억누른다. 애지중지하며 그들을 마음속에 품은 그에게서는 당연히 속에서부터 꽃향기가 새어난다. 그가 꽃들의 향기를 풍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꽃들과 동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 큰 문제가 있는 꽃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아마도 꽃들은 방학 때마다 오는 유성이 반가운 모양이다. 그는 마주칠 때마다 자신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본인에게 정성스럽게 물과 햇빛을 주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본인들과 같은 향기를 뿜어내는 그는 더 이상 꽃들과 기간제 소작농이라는 딱딱한 관계로 느낄 수 없다. 본인들의 주인은 아니지만 꽃들은 유성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아 힘껏 자랄 것이다. 농부들은 꽃들이 유성을 좋아하는 것 같고 유성도 꽃밭 가꾸는 일을 즐기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예상해 방학마다 그를 부른 것이기도 할 것이다. 꽃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고 사랑을 주는 법을 잘 배우고 있었다. 꽃들과 노는 유성을 보다 다음 방학 때도 유성을 불러야겠다고 암묵적인 동의를 마친 그들이다. 일을 마친 후, 농부들과 저녁을 먹으며 유성은 따스하면서도 따가운 시선들을 느낀다. 여름이라 그런지 그 사랑의 눈들은 더 뜨겁고 따갑게 느껴진다. 겨울에도 나를 부르겠구나..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그는 빠르게 밥을 비우고 자리를 뜬다.


 땀으로 젖은 몸을 찬 물로 씻은 그는 본인보다 약간 낮은 방문을 열고 머리를 숙여 방에 들어간다. 온수가 잘 나오지 않는 시골이라 찬 물로 씻는 날이 대부분이다. 이런 무더운 여름날에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지난겨울 이런 상황 속에서 지냈던 것을 떠올린 유성은 그때의 한기에 몸서리를 친다. 빨래한 옷들과 수건을 걸어놓은 그는 이불 위로 쓰러진다. 그리 큰 방은 아니지만 유성은 꽤 자신의 방을 맘에 들어했다. 적당히 아늑하고 벌레가 들어올 틈 없이 문도 정상적이었고 무엇보다 이불이 너무나 포근했다. 잠에 관련해서는 어떠한 불편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또 잘 시간이 되었는지 밖의 등불들이 꺼졌다. 원래 그런 것인지 꽃들을 위한 것인지 등불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가운데에서 유성은 내일을 준비하며 잠에 들었다.


 눈을 뜬 순간 눈앞에 가득한 오색꽃밭이 그를 압도한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이제 쉬기 시작한 그의 눈에게 꽃밭은 아름다운 과로를 강제한다. 그 찬란한 빛깔들에 꽃향기가 온몸으로 흡수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꿈속에서는 왜인지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하다. 꿈인 걸 어렴풋이 짐작하며 그는 본능적으로 이 밭이 나의 밭임을 직감한다. 나의 꽃밭. 나의 꽃들. 벅차오르는 그의 가슴을 잠재우는 듯 휘잉 하고 바람이 살랑인다. 바람과의 만남에 꽃들은 춤을 춘다. 나풀나풀, 꽃잎의 날갯짓 가운데 이전에 유성이 사랑으로 키워 만개했던 꽃들도 보인다. 아마도 이는 유성에게 보내는 감사의 살랑 거림일 것이다. 유성의 입꼬리도, 그 마음도 꽃들의 인사에 살랑거린다.


 잠에서 깨며 비로소 모든 감각들이 숨을 내쉰다. 몸을 일으켜 곰곰이 그 아름다운 꿈을 곱씹어본다. 내가 정말로 꽃밭 일을 좋아하는구나 느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을 꿈꾸고 나니 씁쓸해졌다. 그럼에도 꽃들을 향한 나의 진심은 언제나 같으리 다짐하는 그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밭으로 떠난다. 길을 걸으며 다른 밭들을 바라본다. 꿈에서는 이곳까지 모두 유성의 밭이었다. 오색빛으로 물든 꽃들로 가득한 꽃밭. 이게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인가 고민하다 꽃밭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 그를 환영해 주는 친척들과, 무언가 그들처럼 자신을 반겨주는 것 같은 꽃들을 보며 지금은 그저 이들로도 족하다는 생각이 다시 자리 잡는다. 잡념을 버리고 힘을 내 꽃들에게 다가가며 일을 시작한다.


 그는 이런저런 고민들의 무게가 꽃들에게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다짐했다. 불현듯 가까운 미래가, 또는 그의 인생의 다음 걸음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현실의 잿빛 고민들 말이다. 유성의 또래라면 누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고민이겠지만 그는 지금만큼은 그것을 삐져나오지도 않도록 나중으로 미뤄놓고 있는 중이다. 물론 꽃들을 보고 있으면 그것들은 깃털이 되어 날아간다. 그 싱그러움은 모든 것들을 가볍게 하고 따뜻하게 품어준다. 반영하지 않기로 했지만, 결국에는 그들은 유성의 무게를 함께 품는다. 유성은 한참이 지난 후에 이것 또한 꽃들과의 쌍방 교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몰랐던 지금의 유성은 그저 이 따뜻함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무더위도 이기지 못할 따스한 나날들 중 하루의 밤, 유성은 다음 날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오늘은, 꿈에 꽃 한 송이가 유성을 애타게 부른다.


- 유성아 유성아


또 꿈이구나. 이제는 꿈에서도 꽃이 등장하는 것도 모자라 말까지 하는 지경이라니, 유성은 이런 진심인 자신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은근히 싫지 않다. 자세히 보니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어린 꽃이다.


- 안녕, 꽃아. 무슨 일이야?


- 난 나중에 커서 너 같은 꽃이 될 거야


 당돌함으로 가득 찬 꽃은 의기양양하게 유성 앞에 서서 말한다.


-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줄 아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야. 상대방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훨씬 더 대단하지. 너처럼.


 어린 꽃의 말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이 꿈은 아주 기분 좋은 꿈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 또 커서 서울로 갈 거야. 꿈만 같은 서울로 가서 공부도 열심히 할 거야. 스펙도 잘 쌓아서 남들보다 훨씬 좋은 대학에 갈 거야. 너처럼.


곱게 물든 꽃 주위로 희뿌연 연기가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다.


- 좋은 대학에 가야 나중에 다른 애들보다 쉽게 취업할 수 있으니까. 넌 참 좋겠다. 그러면서 이렇게 가끔 내려와서 꽃을 돌보는 일을 할 거야. 너무 낭만 있는 삶이 될 것 같아. 취업도 대학에서 학점 잘 쌓고 열심히 하면 무난하게 잘 가겠지.


 꽃 주위에 있던 연기는 꽃을 에워싸며 어린 꽃은 유성의 시야에서 점점 흐려진다.


- 돈을 많이 벌면 좋겠다.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 나도 너처럼 될래. 나도 너 같은 삶을 살고 싶어, 유성아.


 꿈에서 깼다. 그리고 그날 밤은 유달리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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