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 올라탔다. 눈부신 다짐과 함께 발걸음을 내디딘 유성이지만 역시나 아쉬움은 구름이 지나가듯 순간순간 빛나는 태양을 가렸다. 꽃밭에서 꽃들과 함께한 순간들이 그것들 중 대부분이었지만 무엇보다 꿈속에 등장한 꽃이 마음에 계속 걸린다. 무엇이 이 꿈을 꾸게 하였는가. 왜 나는 이런 꿈을 꾸었고 다른 꿈들처럼 놓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붙들고 있는가, 지나치고 잊으면 되는 것을.. 그리고 왜.. 왜 꽃의 말은 나를 아프게 했을까.. 희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지던 작은 꽃의 모습에 잠에서 깼었던 유성은 가슴속 쓰라림을 느꼈다. 선명한 꿈의 기억 속을 헤매던 중 그의 정신을 깨운 것은 그를 가린 한 그림자였다.
- 안녕하세요, 꽃밭에서 같이 일하셨던 분 맞죠? 당신도 오늘 서울로 올라가시는군요.
현실로 돌아온 시선을 들자 유성의 자리에 팔을 걸쳐놓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한 여성을 발견한다. 조금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날이 더웠는지 똥머리를 머리 위에 얹어놓은 그녀이다. 선글라스에 화려한 나시와 청반바지, 아직 기차가 출발하지도 않았지만 입은 옷만큼은 이미 서울에 있는 듯한 그녀는 유성과 눈을 마주치자 아는 척을 한다.
- 저도 서울로 가거든요. 꽃밭에서 고생하셨네요. 저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성함이?
-... 유성입니다.
- 아 유성 씨, 저는 무희입니다. 강무희. 사실 저희 말고 또 이 열차를 탄 친구들이 있거든요. 아마 곧 올 거예요.
이 여자.. 얼핏 봤던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쳤던 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 물론 다 같이 밥을 먹으니 밥도 같이 먹은 사이이기도 하다. 당연히 유성과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지만.
- 그래도 한 곳에서 같이 일한 사람들인데 같이 좀 앉아도 되죠?
불안정했던 그의 내면을 위해서라도 기차가 가는 동안은 혼자 있고 싶었던 유성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여자의 꽃밭이야기도 조금 궁금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조금의 가치가 없었다. 어떠한 답도 내리지 못한 유성을 기다려줄 새도 없이 앞쪽의 열차 칸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남성이 들어온다. 먼저 들어온 남성이 고개를 돌려 뒤쪽의 남성에게 계속 무언가를 얘기 중이다. 뒤쪽의 남성은 이야기를 듣던 중 무희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부르며 다가온다.
- 무희야, 여기 있었네. 어? 나 이 분 아는데.. 아, 꽃밭에서 자주 봤었죠 우리? 안녕하세요.
유성에게 다가온 남성은 진운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꽃밭에서 일을 오래 해서 그런 것인지, 따로 운동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좋은 몸을 갖고 있었다. 유성에게 미소를 띠며 반가워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좀 전에 본 무희도, 그 뒤에 마지막으로 유성에게 인사를 건넨 월영에게도 똑같았다.
- 아니, 왜 내 말 무시해! 안녕하세요, 일하다가 몇 번 본 것 같아요. 월영이라고 합니다.
- 아 네 안녕하세요. 유성입니다.
등장할 때부터 요란스러운 그는 앳된 외모의 그에게는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를 짐 칸에 올리고서는 유성의 건너편에 진운과 앉았다. 자기 말을 듣지도 않고 무희에게 간 진운과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유성도 인사치레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곧 출발할 열차 안에서, 각기 다른 시골에서 서울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눈에 띄는, 도시에 대한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찬 몇몇의 눈빛들을 제외하고는 대개 침울해 보이는 표정들이다. 이 불타는 열정이 겉으로도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월영이다. 창문에 얼굴을 박고 오래도록 보지 못할 이 시골의 모습을 담는 그의 눈에는 이별의 아련함보다는 금의환향할 자신의 포부가 차 있었다. 이와 다르게, 무희와 진운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 도시의 실상을 아는 자들일 것이다.
- 하, 이렇게 방학이 끝나네요.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간 것 같아요. 아직은 돌아가기 싫은데...
창문에 비치는 초록빛 산을 바라보며 무희는 말 끝을 흐린다. 유성도 같이 밖을 바라본다. 열차가 곧 출발한다는 방송 소리와 옆 사람과 떠드는 사람들, 아직 짐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의 우왕좌왕한 모습들까지 왁자지껄한 듯하면서도 모두들 귀를 닫은 듯 고요한 마음 정리의 시간을 가지는 중이다. 여행이 끝나갈 때쯤 빠르게 다가오는 현실에 대한 공포가 지금 이 열차칸에 드리운 모양이다. 이대로 더 가다간 하차할 사람이 생길까 기차는 서둘러 경적을 울린다. 정신 차리고 현실을 살라는 기차의 경고와 함께 상경인들은 서서히 서울로 향한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이제는 보지 못할 맑은 하늘과 생명 가득한 밭을 미련 넘치게 바라본다. 몇몇 사람들은 멀어져 가는 산과 바다를 잊어보려 애써 창 밖을 무시하며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유성도 창 밖의 구름을 보며 머릿속에 카메라를 놓은 듯 사진으로 남기려 한다. 서울에서 가끔씩이라도 생각나길 바라며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모든 자연을 눈에 담아본다. 이를 몰라주는 기차는 더욱 속도를 내며 도시로 향한다. 유성은 무희와 대화하며 그녀와 옆자리에서 두 대학생들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되었다. 우선 무희와 진운은 각각 23, 25살로 현재 대학교 4학년, 월영은 20살로 대학교 1학년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유성이 놀란 점은, 월영이 밭일 때문에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이번이 처음 서울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지 좀 지난 아직까지도 월영의 눈이 빛나는 이유를 알게 된 시점이었다. 셋 다 서울에 위치한 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알고 난 유성은 이들이 그래도 공부 좀 하는 친구들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입력해 둔다. 무희는 영문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과가 잘 맞지 않아서 고생했지만 어차피 다른 관심 있는 분야도 없고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4학년들이 그렇듯, 무희도 이제는 어딘가에서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서울의 현실 가운데에서 고뇌하던 중 대학교에서 진운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듣던 교양수업에서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말하는 표정을 보면 현재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진운은 공대생이었다. 사실 외적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와 대화를 나눠본 유성은 그가 뼛속까지 이과라는 것을 느꼈다. 서울에서 쭉 공부하며 평범한 대한민국의 사교육에 흠뻑 물든 학생의 학창 시절을 보내온 진운은 대학교에 진학하고 끝없는 경쟁사회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사회 구조를 직면하고 극도의 회의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중 알게 된 것이 꽃밭에서의 소작농 일거리였고 그는 그때부터 군생활 기간을 제외한 매 방학마다 꽃밭으로 내려와 물들었던 도시생활의 때를 조금이나마 씻겨내곤 했다고 한다. 무희는 교양수업에서 진운과 가까워진 후, 유성이 예상했듯이 서로 알아가며 좋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고 전에 이 꽃밭에서 일해본 적이 있는 진운을 따라 이번 방학기간 함께 내려온 것이다.
- 그 꽃밭은 뭔가 새로웠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이전에 몇 번 꽃을 키워봤어요. 집에서 창문에 화분을 두고 꽃의 성장 하나하나를 지켜봤었죠. 좀 어릴 때긴 하지만... 저 정말 진심이었어요. 꽃잎이 폈을 때 방방 뛰며 온 집을 뛰어다니고, 꽃이 시들 때는 부모님을 부여잡고 펑펑 울기도 했었어요.. 하하.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랑 비슷하기도 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나의 땀이 꽃들의 뿌리에 스며드는 느낌이 직접적으로 들었달까.. 사실 집에서 화분에다 물을 주는 것과 이 한여름에 꽃밭에서 수많은 꽃에 물을 주는 것이 아예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그래도 노동의 강도와는 다른 저도 그 밭에 심긴 식물 같았어요. 함께 뿌리를 공유하고 꽃들의 꽃잎에 나의 땀방울이 맺히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진운이 덕분에 너무 좋은 경험한 것 같아요. 솔직히 많이 아쉬워요. 다음에 꼭 다시 오려고요. 겨울철은 또 느낌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유성 씨도 겨울에 또 오실 거죠?
유성은 말이 없었다. 사실은 무희의 질문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다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어버렸다. 그도 무희처럼 꽃밭에서 꽃들과 함께 성장함은 확실했다. 이른 새벽 꽃잎에 핀 이슬이 꽃의 눈물이 아닌 칠흑 같은 밤을 이겨낸 땀방울임을 배웠다. 꽃들도 그저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밤마다 끝없는 어둠과의 사투를 벌이는 생명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다만 꿈속 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 꽃도 안개와 함께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또다시 그 꿈속으로 아득히 빨려 들어가는 유성을 보며 무희는 공감 어린 눈빛으로 다시 말을 잇는다.
- 유성 씨도 많이 아쉬우신가 보죠? 어떻게 안 아쉬울 수가 있겠어요. 그럼 겨울에 또 가요. 진운이한테 자주 오셨다고 들었어요. 저는 사실 이것보다 그때까지 또 기다릴 수 있을까가 더 걱정이네요. 휴학도 한 번도 못하고 대학생활을 달려와서 그런지 이번 하경은 저한테는 너무나 필요했던 휴식이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힘들긴 했지만요. 서울에 올라가기 싫어요. 또 그 수업을 들으려고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것이 벌써부터 괴롭네요. 그래도 출근하는 사람들은 보면 부럽긴 해요. 직장에 다니시는 중이라고 했죠? 저도 빨리 어디 하나 들어가서 여유롭게 이렇게 내려오고 싶네요.
- 아, 네. 직장에 다니고 있기는 한데, 그렇게 부러워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좋은 곳에 가시고도 남으실 겁니다... 겨울에 기회가 된다면 또 와야죠. 꽃들은 무희님 말처럼 저희에게도 엄청난 걸 몰래 주니까요.
유성은 말을 마치고 잠시 뜸 들이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희는 그런 유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옆 자리의 사내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대화에 합류한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달린 열차는 곧 예당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을 한다. 서울은 아니고 중간에 정차하는 역이다. 유성은 졸았던 건지 멍을 때렸던 건지 모르지만 방송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기차는 생각보다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의자도 뒷사람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조금 뒤로 젖히면 상당히 편안한 자세로 있을 수 있었고 다리도 피고 갈 정도였다. 열차 가운데 칸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유성은 가지 않았다. 배도 별로 안 고팠지만 먹는다고 이 꺼림칙한 기분이 나아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칸에 여러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먹을 걸 들고 오는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가 보다 생각이 든다. 옆을 보니 무희는 중간에 잤는지는 몰라도 진운과 이야기 중이다. 저럴 거면 둘이 그냥 같이 앉지 생각하지만 월영을 내 옆에 붙이기에는 좀 부담스러워할 수 있어서라는 나중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마웠다. 속도를 줄이던 열차는 중간 정거장 앞에 잠시 섰다. 열차가 멈추며 관성에 의해 유성과 열차 안 사람들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조금이라도 빨리 서울로 가기 위한 그들의 몸짓은 짜인 듯 참으로 기계 같았다. 아직 도시에 도착하지는 못해서 여전히 다른 시골 어딘가였다. 창밖을 바라보는 유성에게 파란 하늘과 푸른 산이 나오라며 손짓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광경 속에 결국 참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사람들이 유성의 눈에 들어온다. 그도 내리고 싶지만 이젠 더 이상 이상을 좇을 시간이 없는 그였다.
무희도 유성과 같은 마음인 듯 창밖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중이다. 진운은 그런 무희를 바라본다. 이미 꽃밭 일을 하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지금 무희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꽃밭에서 무희는 변했다. 확실히 변했다. 아마도 그녀를 변하게 한 그것은 순식간에 찾아왔을 것이다. 그도 이전에 느꼈던 사회와의 완전한 단절의 순간, 콘크리트 하나 없는 흙과의, 열이 가득한 여름 바람에 힘겹게 살랑이는 새싹과의, 물아일체의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이 무희에게도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녀는 그 찰나였지만 완벽했던 자유를 경험하고야 말았다. 그도 안다. 자유에 한 번 발을 적신 순간, 갈증이 시작된다. 온몸이 젖어들 때까지 그 갈증은 끊이지 않는다.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희도 이제 진운이 걷던 길에 들어섰다. 뒤돌아설 수는 없다. 그전까지는 그만의 꽃밭이었지만, 이제는 그녀도 그의 동반자이자, 하나의 꽃이 되었다. 그렇기에 창밖을 바라보는 시들어가는 무희의 눈빛은 진운을 아프게 했다.
-... 우리도 나갈까?
- 잠시만.. 잠시만 나갔다 오자.
잠시라고 하지만 이미 짐을 꺼내고 있는 진운이다. 무희는 이미 의자에서 몸을 빼 문을 향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뒤따라 진운이 무희의 짐까지 끌며 자동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따라나간다. 이 모든 순간을 유성은 지켜보고 있었다. 무희의 눈빛부터 진운의 퇴장까지 그는 그의 두 눈으로 그 순간을 함께했다. 잠시 후 밖에 나온 무희와 진운의 모습이 창밖에 담겼다. 푸른 하늘을 보며 환한 미소를 띠는 무희와 그녀를 바라보는 진운은 만개한 꽃과 같이 빛난다. 처음엔 그들의 중도 하차에 속으로 혀를 끌끌 차는 유성이다.
- 저 나이에 이제는 저럴 시간이 없을 텐데.. 아직도 저걸 참지 못하다니 아마 나중에 남들보다 뒤처져서 꼭 후회할 거야.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씁쓸함에 창밖에서 행복해하는 그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자연과 함께 뛰노는 그들은 구름 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구름 위에 사는 자들.. 구름 위에서 살기에 땅의 일은 땅에 두고 온 듯 보였다. 그래서 유성은 그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그도 조금은 경험했었고, 그렇기에 그 갈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지켜보다 문득 본인이 느낀 부러움이 얼마나 본인의 현실에 위험한 것인지 깨닫고는 창에서 고개를 빠르게 떼어낸다. 아, 위험했다. 서둘러 눈을 감고 달리기 시작하는 기차 속에서 그는 나름 서울에 도착하고부터의 계획을 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