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났다. 잠깐 사이에 또 잠이 들었나 보다. 사실은 꿈이길 바라며 계속 다른 세계로 가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차는 결국 까만 증기를 내뿜으며 서울역에 정차한다. 누군가는 비장한 표정으로 몇몇은 무표정으로 짐을 들고 기차에서 내린다. 유성도 가방을 메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간다. 좁은 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짐을 들고 서울의 땅을 밟길 기다리고 있다. 유성도 곧 발을 디딘다. 처음 서울에 도착하는 기차문 앞에 서 있던 과거를 떠올려본다. 산업과 정보의 집합체이자 모든 한국인들의 꿈의 직장이 가득한 곳. 서울에 드디어 내가 왔다 생각했던 그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짐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으로 역에 들어선다. 올 때 그대로 서울역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누군가는 또 떠나고, 누군가는 또 돌아온다. 누군가는 설레고, 누군가는 울적하다. 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유성은 이를 달래 보려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울의 하늘은 서울역의 천장이 막고 있지만 이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하늘을 보는 것을 애초에 포기하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하늘을 보는 것은 사치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유성은 그 말에 인정하며 치열할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월영도 짐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 땅을 밟는다. 한 길 뿐이었던 고향의 기찻길과는 다르게 열 개가 넘는 기찻길이 쭈욱 열거되어 있는 서울역은 그에게 마음껏 돌아다니라는 이야기와 함께 상경에 대한 환영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다. 굳은 걸음으로 역내로 앞장서는 유성을 따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월영도 역 안으로 들어선다. 사람 수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하던 역의 모습만을 보던 그에게 펼쳐진 서울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와... 하며 입을 벌리고 자신들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역내 사람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그이다. 유성의 예상이 기분 좋게 빗나간 것이다. 압도적인 인간들의 움직임에 이것은 본인이 이야기했던 해변의 모래알들이 아니라 바람에 휘날려 불규칙적으로 날아다니는 사막의 모래알들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해보는 낯선 사람 구경을 즐기다 그 사이에서 익숙한 듯 사람들을 뚫는 유성을 발견한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월영도 위를 쳐다본다. 하늘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놓은 서울역은 오직 인간들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그런 인간들의 기술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기술력의 집합체인 서울에 온 것, 그 자체만으로 월영의 심장은 터질 듯 뛴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리저리 고래를 돌리며 함박웃음을 짓는 자신은 누가 봐도 갓 상경한 시골 촌뜨기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의 첫 상경을 감추려 방방 뛰기보다는 찢어질 듯한 웃음을 짓는 월영이다.
서울역에서 바로 지하철을 타며 하늘과는 더욱 멀어졌다. 유성은 월영에게 지하철을 타는 법과 환승하는 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괜스레 마음이 더 쓰인다. 사실은 설명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보이고 온 얼굴로 들떠있던 그가 어딘가에서 헤멜 것이 유성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자명했다. 뭐 문제가 생기면 연락이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신경을 끄기로 한다. 아니, 꼭 내가 이 정도로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나도 내 삶이 그 정도의 여유가 없을뿐더러, 초반에 그렇게 도시에서 어려움을 마주하는 것은 이곳에 적응하기에 많은 도움을 준다. 걱정을 털어낸 유성은 나름 오랜만에 탄 지하철을 둘러본다. 낯설 줄 알았지만 금세 익숙해진 덜컹거리는 열차에서 그는 그가 챙겨두었던 꽃향기를 떠올려본다. 기억을 되돌려보지만 기억만으로는 지하철 속 냉방의 향과 열차의 쇠 향 속에서 그의 도피처를 되돌려낼 수 없었다. 유성의 옆에 일렬로 서 있는 정장차림의 직장인들이 눈에 보인다. 유성이 도착한 건 퇴근 시간까지 몇 시간 전이었지만 출장인 것인지 반차를 쓴 것인지 그들이 유성의 옆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가지의 경우 중 어떤 것에 해당하는지는 몰라도 그들 모두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운 느낌이다. 짓누르는 피곤함과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눈동자.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것들이 터져 나와 그 얼굴들에 드러나 있었다. 아까 기차를 타고 올라오던 길에 지나쳤던 한강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앞뒤로 높이 솟은 빌딩들도 유성의 기억에 함께했다. 분명 그곳들 중 어딘가에서 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추측해 본다. 이어서 처음 기차를 타고 상경했을 때 그 건물들을 보며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지금 옆에 유성과 함께 서있는 이들이 그의 목표였고, 과정이고, 또 다른 목표였다. 그가 바라는 삶이자 지금도 그가 이 서울까지 그 꽃밭과 자연을 버리고 온 이유다. 힘이 빠지지만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운을 내보는 유성이다. 이제 시작이다.
유성의 예측이 이번에는 적중했다. 기차역에서 지하철역으로 넘어온 월영은 역 한가운데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그는 이전의 본인의 호들갑을 자책한다. 유성이 그에게 무어라고 알려주긴 했는데 단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 접하는 서울의 모습, 혼잡한 서울역의 광경, 사방에서 시끄럽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서울로 담아내던 월영이었다. 유성의 말도 수많은 서울의 소리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본인의 역이 어느 쪽인지 핸드폰에 검색해 보며 올바른 입구를 찾는다. 알맞을 확률은 50퍼센트지만 월영은 자신의 선택은 그보다 낮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결국 역무원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최대한 지방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무희와 진운의 말투를 떠올리며 쭈뼛쭈뼛 역무원에게 다가간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도 제대로 된 열차를 타게 된 월영이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다가오는 지하철을 보며 서울은 모든 것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지하철 내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지독하게 습하고 더운 때에는 그만한 천국이 없다. 시골에서는 냉수로 샤워를 할 때 말고는 느끼지 못할 차가움에 신기해한다. 찬 공기를 만끽하고 내부를 둘러보니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난 후다. 뭐든지 급한 도시인을 따라잡으려면 한참은 남은 듯한 월영이다. 어느 자리에 가 앞에 있던 손잡이를 잡고 자리 잡은 그는 창문을 통해 쏜살같이 지나치는 벽면들을 넋 놓고 보았다. 흰 빛의 조명들이 규칙적으로 지나가다 한강을 지나기 위해 야외로 나온 지하철은 월영의 설렘을 극대화시켰다. 빠르게, 하지만 천천히 한강을 지나는 지하철 속에서 월영은 첫 서울의 낭만을 즐긴다.
나름 길었던 휴가가 무색하게 회사생활에 다시 적응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밀린 업무는 유성의 어깨를 짓눌렀다. 쌓여있는 업무량보다 점점 밀려나는 본인의 퇴근시간을 무력하게 떠나보내는 것이 그를 다시 도시인으로 개조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꽃들의 자리에는 톱니바퀴들이 들어서게 되고, 퇴근이라는 오늘의 일과를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심연으로 던져버린다. 그것이 오늘이 되고, 내일이 되고, 매일이 된다. 그렇게 도시인이 된다. 유성도 정신없이 일과를 달성하며 찬란했던 것들이 심연 어딘가에서 휩쓸리고 있었다. 이 도시 속에서 유성의 자아는 매일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다. 모래 위에 흘러내리는 물처럼 자아는 어디론가 흡수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빈 껍데기였다. 그러나 유성은 매일 그것을 다시 채우기 위해 스스로를 속였다. 괜찮아, 내일은 나아질 거야. 그러나 내일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유성의 마음속 깊은 곳, 잔잔하게 흐르던 물은 어느 순간부터 고요하게 멈췄다. 더 이상 소리 없는 흐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 물은 이제 죽은 강처럼 침묵했다.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유성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나 대답은 없다. 그저 도시는 계속해서 그의 눈앞에 있기를 강요한다. 하늘은 어둠 속의 별처럼 가끔 반짝이며 유성을 깨웠지만 그는 하늘을 볼 시간이 없었다. 색깔을 쫓는 삶은 배고프고, 회색빛 삶은 공허하다. 소작농은 배고프지 않을 미래를 위해 형형색색이던 그의 삶을 본격적으로 회색빛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났다. 유성이 밭에 있을 때 연락이 오던, 매연을 불어넣던 그들이었다. 잠깐 이야기가 나와 밭에서의 일들을 열거한다. 이렇게 나열할 것들이 아닌데.. 이렇게 단편적인 것들이 아니었는데.. 속에서 후회가 점점 쌓인다. 빠르게 화제는 전환되었다. 주제는 계속 바뀌었지만 다를 것은 없었다. 학생이라면 공부할 땐 열심히 하고, 쉴 땐 취미생활도 하고 친구들과 추억도 쌓아야 한다. 직장인이라면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사람도 만나고 역시 취미생활도 해야 한다. 가끔 휴가로 여행도 다녀보고, 평소에 안 해본 경험도 해보고. '일정상'이라는 틀에 각자가 어떻게 이것들을 끼워 넣었는지 역시나 열거한다. 언제 누구를 만났고, 만날 것이고, 이번 휴가에 어디를 갔다 왔고, 어디를 갈 것이고. 유성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본다. 우선 휴가를 이번에 많이 써버렸으니 한동안은 회사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친구들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볼 것이고, 다가올 추석에는 잠깐 어디를 가야지. 바다를 가면 좋겠다. 머릿속으로 하반기의 자신을 완성시켰다. 빽빽하게 채워진 그의 삶의 계획에서 그는 공허함을 느낀다. 이곳엔 없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로 주제는 넘어갔다. 해외에 떠나 있는 친구, 육아휴직 중인 친구, 몇 년 전의 모습으로 기억이 멈춘 사람들의 이야기다.
- 또 해외를 갔어? 걔는 진짜 돈이 많나 보다. 나도 돈만 있으면 바로 비행기 표 끊는 건데. 부럽다, 부러워.
- 출장인 거 아니야? 이제는 회사 때문에 출장 아니면 어디 길게 갈 수가 없어. 그만두던가 해야지.
유성도 서울에서 생활하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낭만을 몰라서 회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낭만을 알지만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결국은 살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다. 슬프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곳에서의 현실이다. 다시 그때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때의 하늘과 유성과 교감하던 흙과 꽃들. 낭만 없이도 살아갈 순 있지만 그것이 정녕 삶을 살아가는 걸까. 그는 잠깐 고민해 보고 다시 회색으로 그 생각도 칠해버린다.
이른 아침, 조그마한 원룸의 문이 열린다. 안에 있던 시원한 공기가 밖의 공기와 맞닿아 사라진다. 작은 책가방을 멘 월영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계단으로 몸을 돌린다. 상쾌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누군가에게는 피곤한 하루의 시작일 수 있겠지만, 밭일을 하면서부터 일찍 일어나는 것이 당연했던 그에게 대학교 등교는 너무나 가뿐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려가는 계단과는 다르게 날로 올라가는 그의 마음은 가뿐한 그를 구름 속으로 더 올라가게 했다. 건물 밖에 나오자 새파란 하늘이 월영을 알아보는 듯 맞아준다. 아직 도심으로 들어가지 않아 높은 건물들보다는 자취방으로 가득한 주택가이다. 학교로 가는 길은 다양하고 시끄럽다. 건물들은 점점 높아지고, 사람들은 꾸준히 많다. 구름만 가득하던 그의 시야에 건물이 하나하나 차지하기 시작한다. 월영이 타는 버스도 그가 탈 때부터 사람이 가득했다. 그와 같은 대학인 듯한 자기 또래의 학생들과 정갈한 옷차림으로 일터로 향하는 직장인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신나는 음악을 듣고 있는 듯한 고등학생과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중학생들. 사람이 많은 버스의 모습은 월영이 살던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라 그는 자주 한 사람 한 사람을 구경하기도 하고, 눈을 감고 그 소음들을 귀에 담기도 한다. 학교생활은 그에게 더 찰떡이었다. 한 학기를 늦게 가 이미 형성된 관계망 안에 스며들 수 있을까 걱정했던 월영이었지만 그의 타고난 친화력은 학교 동기들에게 너무나 환영받을 요소였다. 가자마자 친구도 여럿 생기고, 선배들과도 밥 두어 번 얻어먹으며 빠르게 그의 관계망도 넓어지고 있었다. 전공 같은 경우마저도 가끔은 졸기도 하며 수업을 듣긴 했지만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의 현재 상태는 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것마저 그에게는 즐겁고 새로운 일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 강의실에서 그렇게, 한 파릇파릇한 들꽃이 힘을 내며 만개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