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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Oct 27. 2024

8. 하지만 그것은 물들일 것이다

 조금은 미안했다. 약속 당일 심지어 바로 직전에 취소하는 것은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라 선임들의 화가 전화기를 넘어서까지 느껴질 정도다. 유성은 거듭 사과하며 있지도 않은 사정을 꾸며낸다. 빠졌다느니 이 자식은 군대에서도 이랬다느니 별의별 욕은 다 듣고 다음에는 꼭 함께할 것을 맹세하기까지 하니 그제야 그들은 유성을 놔주었다. 그래도 자신을 아끼는 그들이기에 이렇게까지 아쉬워하겠지 생각한다. 그래봤자 그러고 오래가는 것 없이 본인들끼리 그 자리를 또 즐길 것이 분명했다. 유성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 통화에서의 대화만으로도 그 모임에 참석한 것만큼의 본전은 다했을 것이다. 통화를 끝내고 혼나느라 바닥에 놓지도 못한 가방을 걸쳐놓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맡긴다. 푹 꺼지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조금씩 흘려보냈다. 회사에만 모든 것이 묶여있던 근 일주일 간의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끝까지 무시했었던 내면의 소리에 드디어 응답한 것이다. 결국 실패해 버린 유성의 목표에 대한 조금의 실망과 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해방감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치는 서늘한 이불과 함께 유성을 물밀듯 감싼다. 그 한 번의 경험을 잊지 못해 이렇게 자유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담담하게 칭찬한다. 이것은 내 안의 나에게 협의된 패배를 당한 것이다. 내가 악마라고 이름을 붙인 천사에게 해방의 항복을 던진 것이다. 몸을 돌려 바로 눕고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뱉는다.


 창문 밖의 저녁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에 접어들어 퇴근 시간만 되어도 어둡게 저무는 하늘은 유성을 위해 도시의 모습을 얼른 가려주었다. 하늘을 보니 꽃들이 생각난다. 꽃들 입장에서는 쌀쌀할 수 있는 가을을 잘 보내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특히나 저렇게 해가 빠르게 떨어지면 더더욱 고독해질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미어졌다. 어린 꽃이 보고 싶다. 꿈은 자신의 현재 가장 큰 꿈을 안 꾼 지도 너무나 오래되었다. 너무 감성적으로 변했다 느낀 그는 침대에 일어나 앉는다. 목표를 수정해야 한다. 이상을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졌다. 아니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내면 속에서 미약하게 외친 자유의 소리에는 숨결이 있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그것은 날개를 펼치며 발아하여 싹이 되었다. 새싹이 탄생하여 유성의 마음에는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하다. 중심부에 있던 상경의 꿈은 새싹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새싹은 유성에게 그 정도의 녀석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굳건히 지키던 터줏대감들에게도, 꿈으로 부푼 새싹에게도 불편한 공생이 시작된 셈이다. 공생이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중심을 완전히 바꾸어 목표를 갈아엎는 것은 아니다. 아직 유성의 꿈은 유효했다. 성공에 대한 그의 갈망은 계속해서 줄기를 뻗고 있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꿈이 충돌한다. 무엇 하나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 다 이루기엔 유성의 몸은 하루라는 시간 안에 갇힌 하나뿐인 몸이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 하는 고민도 이미 일주일을 지내며 무의미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서울에 온 이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자살 행위와도 같다. 그리고 꽃밭에 다녀온 이상, 구름을 알고도 무지한 척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많은 것을 경험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는 곧 울적해졌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은 고통이었다. 자신의 자유가 억압된 새장 속의 새였다. 새장 밖을 경험한 새. 자유롭게 나는 것의 기쁨을 아는 새. 그러나 새장 안에서 생을 보내야 할, 그런 날개 묶인 존재가 자신이었다. 점점 새장 속 생활에 적응해 가더라도, 창살 사이로 푸른 하늘을 가르며 파닥이는 비둘기를 볼 때면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새장 문을 열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날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새장 안으로. 나는 새장 속이 안전하니까.


 하늘이 완전히 검게 꺼질 때까지 유성은 그렇게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유성은 보이지 않는 창살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무거운 한숨에 침묵한 듯 고요했다. 어둠은 유성의 시야를 사방으로 차단시키고는 숨을 죽이며 사방으로 압박한다. 그것은 어둠이 아닐 수 있다. 어둠 속 무언가일 수 있다. 그것은 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색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들일 것이다. 서서히 그리고 깊숙이. 그 맹수의 사냥법에 숨이 막히는 듯 그는 연거푸 기침을 하다 심호흡을 한다. 그가 고요한 압박으로부터 무너지기 직전, 그를 구해준 것은 빛을 뿜으며 진동하는 그의 핸드폰이었다. 침대 한가운데서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핸드폰 쪽으로 다가가 눈을 찌푸리며 화면을 보니 투명한 유리면 속 쓰인 이름은 월영이었다.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몇 번 연락을 주고받고는 한동안은 연락이 없었던 그였다. 이 야밤에 무슨 일로 전화가 왔을까 생각하며 유성은 물끄러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버린 것을 인지하고는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와! 유성이 형이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전화기 너머 월영의 목소리로부터 진한 알코올의 향기가 나는 듯하다. 한창 새 학기를 시작한 월영에게 술은 가까울 수밖에 없겠지. 물어보니 역시나 동기들과 한 잔 한 모양이다. 듣다 보면 옆에서 신나게 웃으며 떠들고 있는 동기들의 목소리도 흐릿하게 들린다. 유성의 걱정과는 다르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여 동기들과도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학교에 오자마자 형성되어 있던 무리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간 월영은 그렇게 대학생활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과제도 미루고 미루다 데드라인의 언저리가 되어서야 초인적인 힘으로 제출해보기도 하고, 선배들의 족보로 전공 퀴즈도 손쉽게 풀어내기도 했다. 현재는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어 열심히 공부 중에 있다고 한다. 열심히 공부만 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잠깐 나와서 술 한 잔 했다는 그의 변명에 유성은 피식 웃으며 침대에 몸을 눕힌다. 1학년은 새로운 시작보다는 이전의 12년에 대한 보상의 학년으로 다가오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공부와 수행, 수능 그 모든 것들이 끝난 시점인 것이다. 시작하는 것은 끝을 충분히 축하한 후에 돌아보아도 늦지 않다는 책임감 없는 마음이 대부분의 한국의 대학교 1학년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유성도 이들과 같았다. 도서관은커녕 시험에 참가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학교생활을 감당하고 있다 판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었던 1학년이었다고 유쾌한 후회를 떠올리는 그이다. 하지만 월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잿빛의 과거는 없는 듯했다. 묶여 있던 것이 이제야 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날아다니던 들꽃이 드디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전공 수업이 어떻고, 교양은 어떻고 월영이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그가 현재의 대학공부에 얼마나 빠져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 그래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겠네. 다른 친구들은 아직 다 놀고 있을 텐데.


 - 엥 형 여기 다들 장난 없어요. 도서관 자리 잡기도 얼마나 힘든데요.


 대학에서 끝나던 청소년들의 꿈이 현실의 바람으로 더 부풀어 올랐나 보다. 그들은 더 큰 보상을 위해 더 오랜 기간을 달리려고 한 모양이다. 누군가는 취업까지, 또 다른 누군가는 결혼, 다른 누군가는 이미 그 이후의 노후까지 보이지도 않을 끝을 설정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 당연한 것이라고 월영이 덧붙인다. 월영은 그들과 같은 마음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등굣길 아침 햇살을 맞으며 적절히 데운 뇌세포들로 듣는 전공 수업이며, 서울역과는 다른 왁자지껄함 가운데에서 먹는 학식이며 그 순간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그와 다르게 뛰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어봐도 어디를 보고 있는지 그 시선이 월영의 눈에 들어왔다. 학점을 위해 공부를 하기보다는 족보를 구해 해당 부분만을 달달달 외우는 동기들과 벌써부터 자격증 공부를 하며 겨울방학 계획을 공유하는 동기들의 시선은 월영은 보지 못하는 머나먼 끝에 향해 있었다. 그도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비틀어진 이질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가 달리는 것은 변하진 않았지만 그들과 대화하며 본인들의 끝에 대해 듣다 보면, 땅과 하늘만을 보던 그의 눈도 그 순간에는 앞을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너무도 먼 것을 느끼고는 그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달리는 것은 유성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는 달리고 있다. 하루종일은 아니고 중간중간 쉬기도 하며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의 끝에는 성공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가물가물하지만 군대에서 복학할 때 즈음이었고 확신을 갖고 달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면서였다. 유성은 20살의 나이에 벌써부터 그렇게 달리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잠깐이라도 온실을 벗어날 기회조차 묵살해 버리는 그들이었다. 정확히는 이들을 죽이는 것은 이 사회다. 온실 밖에 대해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고 끝까지 그 속에 취해 살게 하는 마약을 뿌린 것이다. 월영도 이미 같은 마음인 것인가. 벌써 그것에 젖어버린 것인가. 아무리 그여도 그 속에서 취하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진한 알코올 향이 풍기는 목소리 속에서도 썩지 않은 뿌리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월영이었다. 유성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고 있는 월영을 보며 조금의 안심과 많은 부러움을 느낀다. 


 - 아 형, 언제 한 번 제 집에 오셔야 해요. 보고도 싶고 또 제가 보여드릴 것도 있고.


 매연만 가득한 이곳에서도 구름 위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그는 새장 속에서 어떻게 구름 위를 날까. 혹시라도 그가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탁한 서울에서도 형형색색의 꽃들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 좋지..


 유성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긴다. 그의 첫 상경의 순간도 월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자신을 조금 과대평가해 본다. 빌딩과 빌딩 사이의 구름을 발견할 줄 알았고 길을 걷는 와중 주변을 살필 줄 알았다. 막연한 끝이 기억의 저 편 어딘가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힘은 정말로 강했다. 그것은 치밀했고 은밀했다. 한 순간에 우르르 유성을 침략하기도 했고, 서서히 말라 죽이기도 했다. 정말 서울에 구름이 존재할까. 어쩌면 월영도 아직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직 그것이 시작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은밀하게 조금씩 그 마약을 불어넣는 중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젖어들겠지. 어느새 구름은 매연이 되고 주변을 볼 시간에 앞을 보고 뛰게 되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그것을 우리는 이길 수 없다. 나의 두 꿈은 결국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 ... 그래그래. 서울에서 보면 또 다르겠네. 시간 되면 만나자.


 - 시간 되는 날 바로 잡아보죠. 언제 오실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가 대학생이니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결국 월영의 추진력으로 유성은 주말에 월영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확실히 올 것이라는 확답까지 유성에게 받아내고는 월영은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꺼지고 다시 어둠뿐인 유성의 방은 모든 소리들을 잡아먹듯 고요했다. 유성은 월영에게서 보이는 이전의 유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 그리는 중이다.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예고된 희생양을 보러 가게 된 그는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그때만큼은 찬란히 반짝일 그를 볼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어느새 촉각이 몽롱히 곤두서며 느껴지는 수상한 기운에 눈을 떴다. 선명하면서도 흐릿하게 아스팔트 도로 옆 여러 잡다한 풀들 사이에 자리한 어린 꽃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 중 몇몇은 꽃 같기도 하고 잡초 같기도 하다. 해바라기 같기도 하고 그저 무언가를 바라보는 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의 시야 정중앙에서 그를 사로잡는 꽃은 그들 사이를 비집고 살아남아 싸우고 있는 어린 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어린 꽃이라 유성은 반가움이 가득하다. 어디 좋은 곳에 갈 것 같았는데 이런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옆에 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안갯속으로 들어가며 당당히 밝혔던 어린 꽃의 포부도 이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치열히 싸우고 있었다. 또 다른 환경에서 어쩌면 처절히, 또 어쩌면 그의 꿈에 한 발짝씩 가고 있다는 희망으로 자라고 있었다. 어린 꽃을 지켜보다 유성은 그가 아스팔트를 뚫고 뿌리를 내린 들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스팔트와 흙의 경계에서 아스팔트를 뚫고 뿌리를 내린 채 위태롭게 피어있는 꽃이었다. 기울어져 피어있는 들꽃의 모습은 누구보다 생명력이 넘쳐 보였지만 이대로 자라다 가는 뿌리내리는 데 힘을 다해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줄기나 이파리, 꽃에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또 차가 잘못 지나가다 들꽃을 밟고 지나갈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러한 걱정에도 들꽃은 생녹빛 빛깔을 뿜으며 차가 지나갈 때마다 일어나는 바람을 버티고 서 있었다. 어린 꽃은 도로 위에 핀 생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에게서 흘러넘치는 기운이며 빛깔이며 투지에서 오는 그 영롱함은 실제로 차가 밟고 지나가도 그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랜 시간 떨어지지 않는 어린 꽃의 시선을 유성도 놓치지 못하고 말없이 담는다. 평화인지 씁쓸함인지 알 수 없는 고요함 가운데 빵하며 굉음을 울렸다. 순식간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버스 한 대에 모든 평화가 무너졌다. 쏜살같이 지나간 버스의 바람에 뿌리에 힘을 주며 버티는 어린 꽃. 굉음과 함께 잠에서 깨기 직전 그 찰나, 버스의 앞바퀴에 짓눌리는 들꽃. 그 찰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유성은 잠에서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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