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출발했다. 어두워진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여럿 지나쳤지만 유성에게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옥상 텃밭의 새싹들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이곳 서울에서도 싹을 틔운 생명들. 그 고결한 존재들은 옹골찬 수줍음으로 유성을 맞이했다.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들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의 넓은 잎들은 춤을 추듯 나풀거리고 있었다. 왜 이런 것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유성은 괜한 자책을 한다. 분명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왜 실행하지 못했을까. 지하철을 타러 역 안으로 들어가던 중 가정용 식물을 파는 포장마차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포장마차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녀석들인데 서울의 그림자에 두려워 숨어버리고 만 것이다. 끝없이 타협만 하다 그것에 굴복한 것이다. 이들과 전쟁을 치를 용사가 되기보다는 투항하여 손실을 줄이는 비겁한 사람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꽃들을 버린 나였다. 나는 결국 그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을 위해 계단을 오르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도, 분주하게 출근하는 급한 마음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챙길 여유 하나를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요?
- 아.. 제가.. 식물을 하나 키우려고 하는데 누굴 데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유성은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 딱 보니까 직장인 같은데 잘 관리 못할 거면 여기, 이 선인장이 제일 좋을 거요. 물도 한 주에 한 번 정도 주면 되니까 편하지 않겠어요?
- 아.. 네.. 그럼 그걸로 하나 주세요.
얼떨결에 손에 선인장 하나를 들고 집까지 가게 되었다. 선인장 앞 흙 위에는 '1주에 한 번'이라는 팻말이 꽂혀 있다. 유성은 가는 내내 그 자그마한 선인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발견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허름하고 작은 식물 가게. 그곳 한구석에 무심하게 놓인 선인장은 다른 화려한 식물들 사이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시가 돋친 그 단단한 껍질 속에 무언가 견고하고 끈질긴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선인장을 바라보다 유성의 가슴속 어딘가에서 묘한 안도감이 솟구쳤다. 그것은 그와 같았다. 자신을 보는 듯한 강한 이끌림을 유성은 느꼈다. 선인장은 아담한 화분의 크기에 알맞게 작고 어려 보였다. 예상에 없던 식물 장만이었지만 유성의 눈빛은 꽤나 애틋해졌다. 그에게 서울에서의 첫 식물이 생긴 것은 그의 이상으로의 첫걸음이자 현실에게 날린 카운터 펀치였다. 불가능해 보였던 병행의 시작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찬란했던 꽃밭으로의 나아감이었고 하나만을 고집해야 했던 갈림길로부터의 물러남이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선인장을 들고 있는 수상한 작자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유성은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그들도 이내 자기들 할 일로 돌아갔다.
그는 선인장을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작은 화분에 심어진 그것을 창가 위에 두었다. 아직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사막에서 자라는 것으로 유명한 친구인 만큼 누구보다 태양을 좋아할 것 같았다. 이제는 완전한 밤이 되어 이 녀석이 그토록 바라는 태양은 내일이 되어서야 볼 수 있겠지만 유성에게는 이제 집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꿈이 생겼다. 이 또한 그에게 꽃이었다. 짐 정리를 하면서도, 씻고 누워서도 그는 창가 위의 아이를 힐끔거린다. 내일은 월요일이 아니기에 유성은 침대에서 일어나 인터넷으로 선인장을 검색해 본다. 화면을 보면 유성은 나지막이 속삭인다.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생명. 그게 유성에게는 작은 희망처럼 느껴졌다. 도시라는 사막에서, 회사라는 무한 반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였다. 선인장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한 주에 한 번, 적은 양의 물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한 식물. 그러나 그것은 유성에게 오히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 천천히 성장하는 식물로 유명한 선인장은 관리를 소홀히 해도 잘 자랄 것 같지만 나름대로의 관리법과 주의사항들이 있다고 나와있었다. 이들도 당연히 적정 온도와 습도가 있고 적절한 돌봄이 필요한 녀석들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한 인터넷 글을 보며 유성은 이 어린 선인장을 절대 말라비틀어지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넘치는 애정을 적절히 쏟아 천천히, 그러나 무럭무럭 자랄 선인장을 상상해 보며 다시 침대에 눕는다.
나른한 아침 햇살이 유성의 방을 비춘다. 옆으로 누워 자던 유성은 매일 아침 방바닥에 그려지던 네모난 창문에 다른 그림자 하나가 생긴 것을 반쯤 뜬 눈으로 확인한다. 그 그림자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그는 고개를 들어 창가를 보고는 옅은 웃음을 짓는다. 그는 그의 방에 새롭게 추가된 생명이 뿜고 있는 생기에 피곤함을 녹인다. 또 다른 생명이 자신과 방을 공유한다라.. 생각보다 설레는 공생의 시작이었다. 가족 말고는 동거해 본 적이 없던 유성은 동거에 대해 아주 반대하는 입장이다. 함께 사는 것은 그에게는 서로의 심연을 나누는 것이었다. 삶이란 참으로 개인적이다. 보일 것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을 것, 볼 수 없는 것들이 그것의 몇 배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누는 것이 삶을 함께 하는 것이다. 단순히 서로의 울타리를 공유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집에 들락날락거리는 침해의 현장. 그렇기에 함께 사는 것은 존중이 필요하고, 각자가 보이게 될 심연에 대해서 그만큼의 깊은 협상이 필요하다. 존중과 협상은 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낼 것에 대한 요청이고, 그 사람을 심연을 들여다볼, 그리고 그것을 보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에 대한 서약이다. 그것이 원활히 이루어질 때, 침해는 초대에 응하는 수락이 되고 두 심연은 만나 하나의 빛이 된다. 그럼에도 유성이 동거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부재한 두 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마는, 대부분이 책임이 없는 쾌락을 좇다 이 순간을 살곤 한다. 서로의 심연을 볼 생각이 없는 사람들. 개살구만 보고선 그 겉면만 갉아먹으려는 자들. 존중과 타협의 마음이 없는 자들의 협상 테이블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유성은 몇 년 전 동거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반대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던 자신을 바라본다. 이렇게 편안한 것을 왜 그렇게 안달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었던 것을 왜 간과했던 것일까. 여태껏 변할 생각 없는 돌덩이들만이 그를 스쳐갔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선인장이 그의 공생의 대상이 될 것을 그때는 몰라서였을까. 유성은 덮고 있던 이불 속에 들어가 온몸을 비틀며 소리 없이 기쁨과 설렘의 포효를 내뱉는다. 그의 심연이 그토록 고대했던 것임을 내면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벅참이 증명했다. 저 아이가 나를 구원한 것이다. 희뿌연 매연 속에서 질식하여 죽지 않도록 손을 내민 것이다. 포기가 아닌 병행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젠 그것이 가능해졌다. 가슴속에서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겨왔던 그것을 이제는 꺼낼 수 있다. 이상으로만 여겨졌던 삶과 죽음의 병행이, 빛과 어둠의 공존이, 흑과 백의 합일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검은 아스팔트를 뚫고 새싹이 고개를 내민다. 유성의 이상의 씨앗이자 꿈들의 집합체는 미래를 모른 채 그렇게 삶을 시작했다. 한 주의 시작을 선인장에게 물을 주는 것이 새싹에게 붓는 첫 번째 물이었다. 한 주를 버티게 하는 이 월요일 아침의 순간은 선인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어나서 한 번, 나가기 전 한 번, 퇴근하고 나서 한 번, 씻고 나서 한 번, 자기 전 한 번 보다 보면 닳아 사라질 법도 했지만 선인장은 본인이 받는 것보다 큰 것을 유성에게 주었다. 그것을 알고 계속해서 보는 유성이었고 그는 분명히 그것을 받았다. 받고 나서도 그는 그것을 또 한 번 보았다. 그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삶은 그가 받은 이것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 그들이 패배한 것이다. 아스팔트 위에서도 새싹을 피우는 것이 그의 승리 선언이었다. 매일 새싹에게 물을 부으며 이것의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회사에서의 평판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이미 그의 변화를 알아챈 한참 뒤였다. 유성의 머릿속 톱니바퀴들이 교체되니 출력되는 행동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생각이 정리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바퀴에 짓이겨진 꿈속 들꽃 때문에 월영을 찾아간 것이었는데, 그를 보았을 때 위태로운 어떠한 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우연일 수 있다. 어쩌면 나의 상황에 맞춰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나일 수도 있다. 그 들꽃은 선인장을 들이기 전의 나였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꿈은 필연일 것이다. 나는 그 버스를 피한 것이다. 밟혀 죽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어린 꽃은 서울에 짓밟힐 나를 구원하기 위해 기억 저 편의 누군가가 보낸 천사일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살게 되었다. 삶을 살고 죽음도 살게 되었다. 어둠 가운데에서도 빛을 보게 되었다. 나중에 적응이 된다면 식물을 몇 개 더 들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삶을 진작에 알지 못한 것이 그에게 화가 되지는 못했다. 그만큼 현재가 향기로운 것인지, 과거가 기억하기 싫은 만큼 고약한 것인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영혼은 회복되었고, 흐렸던 것이 걷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개가 사라질수록 형체였던 것은 분명해진다. 유성에게 형체는 안갯속에서 사라졌던 어린 꽃이었다. 하지만 병행은 그의 체력을 담보로 계약된 것이었고 그의 잠은 육체의 회복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시간은 제한되었고, 그 시간 안에 두 가지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어린 꽃을 볼 밤을 휴식의 밤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게 했다. 꿈을 꿀 새도 없이 아침이 찾아오고 이제는 루틴처럼 선인장에게 물을 주며 일주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행동이 습관이 되기까지 21일이 걸린다는 시각과 6개월은 걸린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3주라는 시간은 의식이 기억 저편의 무의식으로 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강제로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 헬스장에 가는 일이나 아침에 일어나 공부를 하는 일 같은 것들은 6개월도 부족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유성은 이미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야근을 하고 집에 늦게 들어올 때에도, 늦잠을 자는 주말에도,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하고 돌아와서도, 그는 꼭 선인장에게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것은 물을 주는 것도, 선인장의 자리를 옮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살게 하는 것이자 어찌 보면 신성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 그것이 그가 하루에 5번 습관처럼 하는 일이었다. 퇴근 후 방 안에 들어서면 선인장에게 다가가 작은 가시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곤 했다. 그 가시는 따끔하면서도 어딘가 위로가 되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를 붙잡아 주는 듯한 느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성은 점점 더 선인장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을 통해 얻어내기도 하고 털어내기도 한다. 털어내는 것 또한 얻어내는 것일 수 있다. 또 시간을 멈추기도 하고, 삭제시키기도 한다. 정지시키고는 잠기기도 하고, 삭제되어 날아가기도 한다. 그가 주로 잠기는 곳에는 어린 꽃이 있었다. 옆에는 언젠가는 짓밟힌 들꽃이 있었다. 언젠가는 건강한 들꽃이 있었다. 또 언젠가는 온실 속 화초들이 있었다. 가끔은 노란 프리지어가 있었다. 또 가끔은 선인장도 있었다. 그가 날아간 곳에도 꽃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종종 월영도 있었다. 종종 그의 집 옥상에 있었다. 가끔은 무희와 진운이 있었다. 언젠가는 꽃밭에 있었다. 그곳에는 고모와 고모부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날개가 있거나 지느러미가 있었다. 그러나 구름이 있지는 않았다. 그 시간에,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에, 꿈은 유성에게 걸음을 더디 했다. 오늘은 가시가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아, 혹시 물을 너무 적게 준 걸까, 햇빛이 부족한 건 아닐까. 점점 유성은 선인장을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첫 번째로 확인하는 것이 선인장의 가시였다. 혹시나 무언가 변한 것은 없는지, 물을 더 줘야 하는지, 공기의 습도가 맞는지. 이 작은 생명은 나에게 달려 있어. 유성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선인장이 잘 자라면, 그 역시 이 도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