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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Oct 27. 2024

9. 나 또한 이들에 의해 살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잠에서 깨자마자 꿈의 잔상은 뚜렷하게 유성의 머리에 남아있었다. 나름대로 그들의 세상을 누리고 있던 꽃들에게 재앙이 찾아왔다. 잔인했던 마지막 장면이 유성의 머릿속을 괴롭힌다. 그 그림을 곱씹어보면 꿈속의 어린 꽃에게는 그저 뿌리에 힘 한 번 주면 지나갈 바람 정도였던 것 같다. 재앙까지는 아니었고 살면서 여러 번 있을 만한 어려움 정도였다. 문제는 들꽃은 버스의 바퀴에 짓밟히는 찰나였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점은 그렇게 꿈이 끝났다는 것이다. 이후에 들꽃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럼에도 살아남았는지, 아니면 그 인간의 발길질에 생명이 파괴되어 처량하게 눌려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살아있길 바라는 것은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눈에 밟히는 꽃이 하나 더 늘었다. 들꽃은 또 무엇인가.. 꿈속 꽃들에게 계속해서 마음속의 무언가를 부여하게 된다. 의미가 없거나 어떠한 상징조차 존재하지 않는 꿈도 여럿 있지만 전부터 이어져 오던 어린 꽃의 이야기는 그냥 꿈은 아니었다. 기다릴 때는 나오지 않다가 오랜만에 등장해 섬뜩한 장면을 연출한 아련한 이야기는 유성을 불안하게 하면서도 본인의 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더해준다. 유성은 자신이 신통한 것은 아닌지 잠깐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주말에 보기로 한 월영이 떠오른 것은 그다음이었다. 밝으면서도 그 속에 무지갯빛 뿌리를 둔 녀석. 결국 서울의 회색빛에 서서히 젖어들 월영에게 갑작스러운 오염된 물이 퍼부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뿌리를 뽑아낼 정도의 쓰나미가 덮치게 된다면 그는 색이 남아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도 마지막에는 유성처럼 될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압도적인 크기로 월영을 밟게 된다면 그는 찢어질 것이었다. 자아가 부수어져 살아도 죽은 자들처럼 뿌리 없는 조화의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 꿈만으로도 하루빨리 월영을 만나야 했다. 어린 꽃이 등장하면 이 세상 어딘가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어렴풋이 받아왔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오늘 자신을 초대한 사람 같다는 확신이 강하게 든다. 가야 했다. 가서 나도 무엇이 그를 밟을지 봐야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우리가 그것을 마주할 때, 그와 나에게 그것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것에 눌려있다. 생기를 잃어가고 있고 그들에게 빼앗기기 직전이고 굴복하며 서서히 그리고 거의 모든 고개를 그들에게 숙이었다. 밟혀봤자 큰 타격이 없을 것이다. 이미 패배한 자에게 승부를 걸어오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유성은 어설픈 패배를 완성하기 위하여 월영의 집으로 출발한다.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버스와 같은 것이 그들을 덮칠 것이다. 어떠한 모양의 현실이 그들을 서서히 죽일지 스스로 배워야 했다. 문을 닫으며 월영에게 출발한다는 문자를 남긴다.


 주말이라 그런지 지하철은 적당하고 다양하게 붐볐다. 일렬횡대의 직장인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자리는 가을 데이트를 떠나는 풋풋한 커플들이나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화목한 가족들이 대체했다. 어딘가로 떠나는 길의 무게는 길의 상태보다는 목적지가 어디냐가 중요한 듯하다. 전날만 해도 전쟁터로 향하는 패잔병들의 칸이었던 지하철이 여행을 떠나는 크루즈 안처럼 변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좋은 것은 순식간이라고 그렇게 월영의 집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월영이 사는 건물에 가까워지자 마중 나와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멀리서 걸어오는 유성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가 사는 건물은 대학생들을 위한 좁고 높은 빌라였다. 대학가였기 때문에 유성은 이곳으로 오면서도 이런 형태의 건물들을 많이 지나쳤다.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대학생들이 이곳에서 상경의 꿈을 실현시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서울에게 집어삼킴 당하고 있을 것이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유성은 밝게 인사하는 월영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지만 애써 숨겨본다.


 - 어서 와요, 형. 오랜만이에요. 오면서 하늘 봤어요? 오늘날이 너무 좋네요 


 - 그러게 오랜만이네. 안 그래도 지하철에 놀러 가는 사람들 많더라


 -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누추한 곳에 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형님. 따라오시죠.


 유성을 보며 나사가 빠진 듯 헤헤 웃는 월영은 뒤를 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월영을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곧바로 오래된 건물 냄새가 유성을 반겼다. 허세 하나 없는 쿰쿰한 이 향은 언제 맡아도 항상 함께한 듯했다. 앞장서던 월영은 갑자기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가 수리에 들어가 계단으로 가야 한다고 미안해하며 이야기한다. 그의 얼굴은 열악한 건물 상황이 자신의 상황인 듯 의기소침해 있었다. 유성은 괜찮다며 계단의 위치를 묻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들어온 입구부터 오르는 계단이며 모든 것이 좁고 가팔랐지만 유성의 말은 진실이었다. 유성도 이런 곳에서부터 상경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불편하기보단 오히려 익숙했다. 힘들 새 없이 자신이 처음 상경했을 때의 집을 떠올리며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중이었다. 그래서 3층에 있는 월영의 집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그마저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월영이었지만, 유성은 괜찮다고 해도 그가 변하지 않을 걸 알아 그냥 두기로 했다. 월영이 문을 열고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뒤로 기웃거리며 들어가는 유성은 생각보다 아늑해 보이는 월영의 원룸이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흰 침대와 손님이 오는 것 때문에 광이 나게 닦인 바닥은 평소에도 이렇게 깨끗하게 산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침대 앞에 놓인 책상 위에는 어제 새벽까지 중간고사 대비 공부를 하다 잤는지 전공책과 필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침대가 놓인 벽면 위 작은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햇빛에 작은 먼지톨들이 반사되어 떠 있었다. 그만큼 신비롭기도 하고 아늑하기도 한 월영의 방이었다.


 월영은 유성을 방 한가운데 앉히고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컵에 따라 유성에게 갖다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대학생활과 지금까지 경험한 서울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들어오자마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월영의 이야기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되는 유성은 그의 참을 수 없는 설렘을 잘 들어주었다. 동기들과 함께 한강에 간 이야기, 학교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졸다가 순식간에 끝나버린 이야기, 서울 토박이 선배의 집에 놀러 가 서울에서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은 이야기 등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왔는지 불쌍할 정도로 월영은 쉬지 않고 그의 신세계를 나열했다. 유성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쳐가는 기억들이 여럿 있었다. 봄의 꽃이 만개해 있을 계절, 동기들과 수업을 빼고 한강에 놀러 갔던 기억이며 중간고사 기간 공부하다 말고 다 같이 노래방에 가 새벽까지 놀았던 기억이며 자신도 참 어지간히 공부 아닌 다른 것, 쾌락일 수도 우정일 수도 있는 그것에 몰두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비본질적이던 시기를 유성도 중간중간 월영에게 이야기했다. 현재의 1학년과 과거의 1학년의 대화는 무궁무진했다. 사이다를 담은 컵 주위에 물방울이 맺히고, 그것이 흘러 컵 아랫부분에 동그란 원이 생기기까지 다른 시간대의 같은 시간을 나누는 시간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학에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꽃밭으로 시간을 거슬러 한참을 이야기하던 월영은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제가 깜빡하고 있었는데 형 제가 보여주기로 한 거 있죠? 그거 지금 보여줄게요, 따라오세요.


 그는 주섬주섬 들어오면서 의자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는 신발을 신으며 유성이 따라 일어났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벙쪄 앉아있는 유성에게 빨리 일어나라며 재촉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문을 잡고 유성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월영이다. 유성은 뭘 보여준다는 건지, 나가기까지 해야 하는 건지 귀찮음과 미심쩍음을 잔뜩 품은 채로 월영을 따라나섰다. 월영은 유성이 미적거리며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빠르게 문을 닫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위로 올라가며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성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또 다른 집이 있는 것이 있거나, 이 건물에만 거주자들을 위한 휴식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면 옥상밖에는 없는데 생각하다 그를 뒤따라 갔다. 그렇게 3개의 층 정도를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우리가 옥상으로 향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월영이 옥상 문을 열고 유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 계단이 조금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금방 왔네요. 이거 좀 보세요, 형.


 방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했는지 태양은 가장 높을 때를 지나 떨어지며 옥상에 나온 유성의 눈높이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밝은 하늘을 바라보다 월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가 가리킨 옥상 한편에는 서너 개 정도로 보이는 직사각형의 바구니들이 있었고 그 위에 흙들이 넘칠 정도로 잔뜩 쌓여있었다. 그 흙들 사이에서 유성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구니들마다 정갈하게 얼굴을 내민 초록빛의 조그마한 새싹들이었다. 그들은 작고 이 도시에서 살기에 너무나도 약해 보였지만 분명한 생녹색이었다. 그들은 분명한 생명이었다. 회사 창가에 있는 녀석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싸우고 있었다. 주변 건물들에 둘러싸여 더 적은 햇빛 속에서, 삭막한 도시의 회색 빛 속에서 조그맣지만 찬란하게 그들은 혈투를 다하고 있었다. 


 유성은 감탄과도 같은 탄식을 내뱉으며 새싹들에게 다가갔다. 싹을 틔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새싹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되어버린 이 옥상 텃밭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월영은 이곳에 오자마자 옥상에 텃밭을 만들 계획을 했다고 한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에게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에 가져다 넣는 정도의 일이었다. 곧바로 직사각형의 화분들에 흙을 채우고 씨앗을 심었다. 도시의 환경에 맞게 그들을 돌보기를 연구하며 등교하기 전, 하교한 후 부지런히, 또 세심히 키우다 드디어 세상에 발돋움을 한 것이다. 발돋움의 순간은 보지 못했지만 새싹들의 발자국은 제법 쌀쌀해진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잎사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더 굳세게 자랄 것이다. 건물들에 의해 더 날카로워진 바람에 줄기가 베이고 설령 잎이 떨어져 나가도 그들은 오히려 더 질겨질 것이다. 광야와도 같은 환경 가운데에서 자라는 이들은 더 강인해져 모든 의심의 회색빛 성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들은 살 것이다. 나 또한 이들에 의해 살 것이다. 새싹들을 넋을 놓고 보던 유성은 곧장 월영에게 달려가 이 친구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이곳에서 어떻게 식물을 키우는지,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월영의 귀와 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질문들을 쏟아낸다. 월영은 눈이 반짝이다 못해 광이 나는 유성의 눈을 보며 그를 진정시키고는 하나씩 대답한다. 흙과 씨앗은 꽃밭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받았고 이곳 대학가 원룸촌 옥상에는 생각보다 텃밭이 꽤 있고 이 건물 주인도 반기며 화분 같은 것들을 지원해 주었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유성에게는 그 답들이 모두 그의 이상들이었다.


 그들은 옥상에서 그렇게 한두 시간을 더 보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유성의 모습에 월영도 신이 나 또 한참을 이야기했다. 좋은 이야기들 뿐이었지만 제법 현실적인 이야기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중간중간 대화의 끝자락이 생길 때마다 새싹들을 물끄러미 보는 유성은 월영이 참 잘 보여줬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렇게 몇 번의 침묵과 대화가 반복되다가 월영은 또 다른 정적 이후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 사실은 계속 옆에 붙어있고 싶은데 학교를 다니면서 얘들을 신경 쓸라니까 쉽지가 않아요. 잘 자라고 있어 보기는 좋지만 완전히 충족되지는 않는 느낌이랄까. 사실은 학교보다는 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의무는 아니지만 하고 싶은 것들. 아까 이야기한 동기들과의 시간이나 술자리 같은 거 몇 번 가다 보면 얘네들 돌볼 시간이 사라진다니까요.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이 친구들이 잘 자랄 수 있을까 걱정이 하루하루 쌓여가요. 그런데 신기한 건 얘네들이 그걸 아는지 아니면 꽃이 피기에 험난한 환경인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적응한 것인지 이곳에 맞게 바뀌었더라고요. 잎사귀가 조금 더 넓어진 대신 줄기가 조금 얇아졌어요. 줄기가 얇아졌다고 비실해 보인다기보다는 철사처럼 곧아있는 게 영양분은 천천히 오래 주려고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게 햇빛이 건물들 때문에 완전 위에 떠 있을 때만 제대로 받을 수 있어서 잎이 넓어진 것 같고요. 신기하긴 한데 이런 게 제 걱정을 덜지는 않아요. 얘네가 변한 건 제가 모르는 부분이라 그냥 저한테 다행인 부분인 거죠. 암튼 그래서 학교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가 많아요. 집중도 잘 못하고. 맘 놓고 꽃들을 보러 다니던 때가 그리울 때가 많아요. 일어났을 때부터 해가 지기까지 꽃들만 보던 그때 있잖아요. 형도 여기 있으면 많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형 겨울에 저 방학하면 저랑 꼭 같이 다시 꽃밭에 갔다 와요. 약속해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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