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칼 같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재빨리 문을 닫고 무희와 진운에게 우렁찬 작별인사와 함께 기차는 나아갔다. 유성은 여전히 눈을 감고 그 역을 벗어나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그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각진 보도블록 위에서의 아메리카노 한 잔, 퇴근하는 지하철에 드리우는 석양의 위로, 칠흑의 밤 속 빛나는 도심 속 별들... 그것을 유성은 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 속에서 살게 될 그에게 그것이 그가 현재 생각하는 최선의 서울이었다. 그러나 사이사이 새록 피어나는 푸른 구름들은 도시가 내세우던 것들을 너무나 쉽게 정리시켰다.
- 형, 여기 앉아도 되나요?
유성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고 복도 쪽을 바라본다. 시선의 끝에는 복도에 서서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월영의 모습이 있었다.
- 아, 네..
- 참,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저는 20살입니다! 무희 누나한테 들었어요. 저보다 형이시라고. 형도 저한테 편하게 해 주세요. 괜찮죠, 형?
- ... 그래, 월영아.
월영은 유성에게 싱긋 미소를 보내고는 짐을 챙기러 본인 자리로 돌아간다. 무희가 떠나고 나서, 이제 좀 혼자 지내겠구나 한숨 돌리던 유성에게는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영은 해맑은 모습으로 유성의 머리 위로 본인의 짐을 올리고 그 자리 옆에 앉았다. 그런 월영을 유성은 어정쩡하게 찢어진 웃음으로 환영한다.
월영에 대해서는 무희와 대화하며 어느 정도 전해 들었다. 모든 것이 새로울 나이, 스무 살의 그는 그의 인생 스무 해를 그곳에서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만개한 꽃 한 송이를 쥐고 자라며 꽃밭 속에서 꽃들의 총애를 받는 꽃 중의 꽃이었다. 그는 들꽃이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관심이 가는 곳에 머물러 뿌리를 내렸다. 그곳은 대부분 꽃밭이었고 때로는 강가였으며 가끔은 어두운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뒷산이었다. 그가 지금도 이렇게 본인 앞에서 뛸 것 같이 발을 구르며 앉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자유분방하게 자란 그는 학교에서도 여전히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몇몇 선생님들은 너무 지나치다며 그를 나무랐지만 대부분은 그 에너지에 힘을 얻었다. 자유로움은 동갑내기 학생들에게도, 선생들에게도, 손에 쥐고 싶은 찬란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월영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품으려 했다. 그렇게 사랑받는 환경에서 지냈기에 공부에는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의 경험상, 그리고 논리적으로 대부분 아이가 잘 자라기만을 바라는 집의 아이들은 공부를 잘 못했고, 못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까지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필요하다. 선천적인 재능이 탁월한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발판은 부모가 만들어낸다. 과목별로 다니는 학원, 강제로라도 시키는 독서, 끊임없는 잔소리로 위로 오르기 위한 발판들을 그 부모가 본인들의 돈과 노력으로 마련해 놓는다. 결국 아무리 발판을 번지르르하게 쌓아놓아도 그것을 오르는 것은 학생 본인이지만. 그래서 유성은 좋은 대학교에 간 사람들을 볼 때,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 사람 너머의 부모들을 생각한다. 얼마나 이 아이가 쉽게 오르도록 발판을 쌓았을까, 오르기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얼마나 자신들을 갈았을까. 물론 아무 재능 없이 본인의 노력으로 스스로 높은 곳에 올라 위태롭게 서 있는 자들도 있겠지만 서울에서 어느 정도 지낸 유성은 그것을 예외로 치기로 한 지 오래다. 유성의 예상과는 반대로 월영은 선천적인 녀석이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천재를 날뛰게 만드는 장이 되었다. 월영이 대학을 서울로 갈 것은 그 동네 모두가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월영 자신도 이번에 뿌리를 내릴 곳은 서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작년 겨울, 계절과는 맞지 않는 산들바람이 들꽃을 서울로 불어 올렸다.
월영은 꽃을 좋아한다. 꽃밭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기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이 또한 남달랐다.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공부를 싫어하는 학생이더라도 그 해만큼은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고3시절, 월영도 그때에는 다른 동기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했다. 1년간 곧게 한 길로만 가는 일은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들꽃에게는 고통이었다. 길을 걷는 중간중간 뒤처져 있는 꽃들을 구슬픈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시험을 잘 마친 월영은 내내 마음에 걸렸던 그들에게 달려갔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그는 그들을 떠날 수 없었는지 첫 학기를 휴학하기까지 하며 꽃들 옆에 남아있었다. 6개월 간의 이전 세상에 대한 작별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준비를 마친 후, 지금 유성의 옆에서 그의 첫 상경을 떠나고 있는 중이다.
- 무희 누나랑 진운이 형은 거기서 조금 더 있다가 올라오려나 봐요.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형도 보셨죠? 이건 비밀인데, 제가 보기에는 진운이 형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첫날 저 커플 봤을 때...
본인이 연애하는 듯 온 얼굴에 흥을 보이며 얘기하는 월영은 확실히 그들보다도 어린 티가 났다. 검은 것들이 흰 것들을 집어삼킬 만큼 활개 하는 큰 눈과 함께 그 입술은 꽃잎과 같이 생동한 붉은빛이었고 햇빛 가득한 시골이었음에도 그의 피부는 이상하리만치 뽀얀 백옥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사랑받아온 이의 얼굴을 찾는다면, 지금 본인 앞에 있는 월영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는 않는 유성이지만, 그가 무희와 진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 수 있는 듯했다.
- 아무튼 형도 서울로 돌아가시는 거죠? 저는 서울이 처음이라 너무 설레요. 아침이면 해변의 모래알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고 높디높은 빌딩들로 배분되는 것을 항상 듣기만 했었는데... 제가 그것들을 처음 봤을 때 어떨지 여러 가설을 세워봤는데요. 역시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압도되어서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요. 절대로 설레서 방방 뛰거나 눈물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유성은 월영이 아마 방방 뛰며 좋아할 것이라고 90퍼센트 정도 확신한다.
- 형이 생각하는 서울은 어때요? 여러 사람에게 들어봤지만 형한테도 물어보고 싶어요. 다들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두루두루 말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서울... 서울은 참 별로다. 그래도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서울은 언제나 시끌벅적하지. 네가 말한 그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만 해도 그 꽃밭에서의 어떤 순간보다도 클 거야. 건물들도 높이 솟아 인간이 이룩하게 된 첨단의 단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지. 아침뿐인 줄 알아? 오후가 되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도시에도 잠깐의 휴식의 시간이 찾아와. 공원 곳곳에는 그 시간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 그래도 가장 좋은 건 밤이야. 조금만 지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 뒤를 돌아보면 밤하늘이 내 눈앞에 펼쳐지게 되거든. 별들보다도 더 환한 도시의 빛깔들이 밤의 칠흑을 밝게 색칠할 거야. 서울에 가게 되면 넌 아마 처음은 압도되고, 이후 설레고, 그 이후엔...
유성은 말을 멈췄다.
- 사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서울이 밝진 않을 수도 있어.
말을 꺼내고 나서 유성은 바로 후회했다. 상경의 설렘을 안고 있는 이 아이에게 괜한 찬물을 끼얹은 것은 아닌가 자책했다.
- 뭐 물론 서울도 나름대로의 안 좋은 게 있을 수 있죠. 그래도 지금의 저는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눈이 많이 갈 것 같아요. 나중에 그곳에 적응해 버리면 점점 그것들도 눈에 들어오겠죠. 하..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최대한 서울을 즐기려고요. 저는 일단 학교에 가면 서울 친구를 하나 만들 거예요. 그 친구한테 서울의 명소들을 다 가볼 거예요. 아, 한강, 한강은 꼭 가볼 거예요. 한강에서의 치맥이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형도 시간 되면 같이 가요. 그리고 또...
들꽃은 그 도시에서도 날아다니기를 원했다. 그곳에서도 그 마음속의 바람에 이끌려 도착할 여러 아름다운 것들에 뿌리내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높은 건물들에 치여 결국엔 추락할 월영을 유성은 걱정한다. 그도 계속해서 부딪히고 떨어지다 어느 한 곳에 자리 잡았고, 이제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삶은 그렇게 서울의 한 회사에 깊이 뿌리내렸다.
- 그래. 한 번 약속 잡아보자. 난 퇴근하면 뭐 안 하니까 연락해.
- 와, 정말요? 우선 한 명 생겼네요, 서울사람 친구. 잘 부탁합니다 형!
월영이 밝아질수록 그가 맞닥뜨릴 어둠에 사그라들 불꽃의 재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 밝은 아이가 빨리 현실을 깨닫는 것이 나을까 그의 말처럼 추락하기 전의 그를 마음껏 날게 둘까 고민한다. 물러나자. 아직 어리니까. 아직은 시간이 많으니까. 나는 아니지만.. 침울한 기분이 그의 뇌를 지배했다.
여러 정거장을 지나 기차는 서울로 계속해서 달려간다. 여럿이 타고 여럿이 내리며 대부분은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열차에 의해 흔들리는 몸들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고민들로 채워진 머릿속 때문에 더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유성도 처음에는 바깥구경도 하고 사람구경도 하며 기차 안에서의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몸을 흔드는 기이한 칼군무에 합류하였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이 매연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구름으로 살기에는 무거운 매연이다. 하지만 그 매연 덕분에 지금의 서울이 세워지고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에 유성은 어서 빨리 서울에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몸을 기차에 맡긴다. 이제 곧 서울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