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평화였다. 유성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 채였다. 그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그녀는 한결같은 손길로 동백나무의 잔가지를 손질하고 있었다. 나무에 흐르는 수액을 그저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듯, 그녀는 과거의 흔적을 남기며 그 나무를 보살피고 있었다. 그 나무를 사랑하고 지키던 진운의 흔적들 역시 그렇게, 동백나무 사이에 묻어두고 있었다. 무희는 자신에게 밀려든 조개껍데기들을 반짝이는 그대로 두었다. 다시 바다로 던지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에는 깊고 성스러운 담담함이 있었다. 자신의 해변에 떠밀려 온 조개와 바위, 돌멩이 하나하나를 모아두는 모습에서 유성은 불현듯 깨달음의 파문을 느꼈다. 그녀의 조용한 손길, 흐트러짐 없는 눈빛이 그의 사고를 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완벽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성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껏 선인장을 돌보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이제껏 지켜온 선인장은 마치 그의 인생의 전부였던 것처럼 여겨졌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흘러가고 있던 그 순간에도, 그는 선인장 하나에 죽고 살았다. 그는 자신의 해변 위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밀려드는 부유물들을 하나씩 쓸어내고, 쓰레기를 버리고, 먼지 한 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내쳤다. 나는 나의 해변에 티끌 하나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희는 여전히 동백나무를 돌보고 있었다. 그녀의 담담한 손길은 거친 잔가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며, 어떤 파편도 다시 물에 던지지 않고, 소중히 남기고 있었다. 무희는 미역을 말리고, 조개껍데기를 반짝이게 두고, 그 모든 흔적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유성은 그 순간, 자신이 쌓아 올리던 모래성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서서히 알아갔다.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선인장이 생명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생명은 아니었다. 선인장을 그토록 완벽하게 지키고자 했던 이유는 오히려 자신을 닫고자 하는 강박에 불과했다. 나는 광적으로 모든 것을 밀어내고 버리고 있었다. 그의 생명이었던 것은 단지 하나의 식물이 아니라, 그가 무희를 통해 마주하게 된 열린 생명의 모습이었다. 유성은 동백나무를 돌보는 무희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밝게 퍼지는 이 감정은 신성함이었다. 그는 순간 들었던 인간적인 마음을 회개했다.
그는 지금까지 단단히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때임을, 여정을 떠나는 이유가 그저 방향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은 그저 놓아두어도 흐르고 자라나는 것인데.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유성은 자신이 생명을 붙잡고 너무도 애달프게 지켜온 것은 아니었는지 되물었다.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것처럼, 생명 또한 그 스스로의 방식으로 피고 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것은 아니었는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조차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제자리에서 피어나는 것을. 그것을 모르고 열을 퍼부었던 월영이 생각났다. 그도 생명이었던 것을 나는 왜 자각하지 못했을까. 선인장에 사로잡혀 나 역시 가시가 돋아 주변을 아프게 했던 거였어. 정작 이 아이의 가시는 이렇게 부드러운걸. 마당에 앉아 선인장을 쓰다듬던 그의 눈에 변색된 듯한 부분이 들어왔다. 아직 마음 깊숙이 남아있는 분노의 찌꺼기들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찌꺼기였다. 마주하니 어리기 짝이 없는 뜨거움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남아 있던 분노는 마치 물가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파도처럼 고요하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는 도시와 시골에서 맞닥뜨린 모든 생명들이, 사실은 단순히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유성은 흩어져 가는 분노 속에서 한줄기 평화를 느꼈다. 월영을 다시 보고 싶었다. 가서 그의 생명을 돌보고 싶었다. 그는 다시 꽃밭을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따로 챙길 것은 없었다. 사실 이미 그의 마음속에 다 있었다. 무희에게 인사하기 위해 동백나무밭으로 갔다. 챙이 큰 밀짚모자를 쓴 그녀는 여전히 묵묵했다. 그녀에게 떠나는 것을 이야기했다.
- 또 와.
그뿐이었다. 두 글자뿐이었지만 유성은 그 말이 참 좋았다. 선인장을 챙기고는 집을 떠났다. 무희는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조금 걷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선인장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 있던 그는 발걸음을 돌리더니 다시 마당에 선인장을 놓았다.
- 다음에 가지러 올게. 알아서 잘 봐줘.
무희는 마당으로 돌아와 말없이 선인장을 쓰다듬었다. 괜히 그에게서 진운이 겹쳐 보였다.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매연이었다. 선인장을 집어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이다. 가벼워진 그의 걸음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지금에서야 국화들이 생각났다. 자주 물을 줘야 할 필요가 없는 녀석들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기차역에서 표를 끊었다. 처음 심은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가 떠오른 유성이다. 가슴속에서는 묵직한 감정이 터져 나왔었던, 이건 내가 창조한 생명이라며 그 작은 것에 경외를 느꼈던 그때. 작고 여린 싹이 땅을 뚫고 나와 세상을 향해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유성은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한순간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씨앗에서부터 자라나는 그 생명은 이제 그의 손끝에서만 직접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작은 선인장에게만 의지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는 온전한 녹색의 세상이 있었다. 기차에 탔다. 창문 너머로 멀리 동쪽 하늘이 희뿌였게 개어 왔다. 태양은 조금씩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 밝아오는 아침하늘 아래로 충만한 것들이 있었다. 유성이 애쓰지 않아도 가득 차 있는 것들. 기차는 이제는 사라진 그의 분노를 뒤로 한 채 멀리 달렸다.
율촌역에 도착했다. 빨리 그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기차에서 내렸다. 기차 밖의 공기는 가볍고 상쾌했다. 그런데 역 앞에 나오니 캐리어를 끌고 오는 월영이 있었다. 일찍 온 만큼 더 일찍 서울에 올라가야 했나 보다.
- 어.. 안녕하세요.
의기소침한 그의 인사는 유성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손이었다. 그 와중에도 먼저 손을 내미는 월영이 존경스러웠다.
- 월영아.. 그.. 미안했다.
- 아니에요. 많이 힘들면 그럴 수도 있죠.
생명은 빛이 났다. 나는 아직 어린 꽃이었고 들꽃은 짓밟힐지언정 빛을 잃지는 않았다. 그 빛이 나를 씻겨낸 것이다. 무희의 빛이, 지금 내 눈앞의 이 아이의 순수한 빛이.
- 고맙다, 진심으로.
월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하겠는지 몸을 베베 꼬았다. 유성은 이를 바꿔보려고 애썼다. 실제로도 그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 아, 그 무희네에 갔다 왔어. 그때 그 예당역 있잖아. 거기서 동백나무를 키우더라고. 나중에 같이 한 번 가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네. 시간 좀 괜찮나?
- 아, 형 그 제가 지금 서울에 빨리 가봐야 해서 가야 해요.. 서울에서 만나요. 이번엔 제가 형네 집에 갈게요.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그 과제도 그렇고 1학년 때부터 공모전이나 이런 것도 해야 할 것 같고, 복수전공도 고민하고 있긴 한데.. 어쨌든 지금 기차가 와서 가봐야 해요. 죄송해요..
아,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버스에 밟히던 들꽃이 스쳤다. 이 아이에게도 현실이 다가오는구나. 거대한 서울의 그림자가, 짙은 안개가 드리우는구나. 자신도 그 상황에 놓여봤기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초연했다. 그 고뇌와 아픔의 시간이 그를 성장시키고 꽃을 피우게 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강박과도 같이 한 주에 물을 한 번 주든, 모든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든 그것은 전혀 그를 빛나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일어설 것이다. 스스로 찬란히 빛날 것이다. 나는 모르는 깊은 뿌리를 내릴 것이다.
- 또 봐.
유성은 미소를 띠며 월영을 보냈다. 꾸벅 인사를 하며 들어가는 월영을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부신 구름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생명의 품처럼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