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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Oct 27. 2024

13. 그 소리가 유성에게는 어떠한 부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유성은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의 눈은 다른 것은 보지 못한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마음속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그 분노는 뾰족하게 가시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던 월영이었는데, 그가 선인장을 들고 서있던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 불꽃이 피어오르게 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토록 단단하고 소중한 것들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의 눈에는 길가에 핀 작은 풀조차 무너지는 회색빛으로 보였다. 선인장은 알아서 잘 산다는 말. 그것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무언가를 놓게 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염원하던 꿈이 그저 바람에 스쳐지는 잡초와 같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유성의 속은 터질 듯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도망치듯 걷고 있는 유성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공허한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분노는 거세게 타올랐지만, 어디로 가야 그 불길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기차역에 다다라 있었다. 먼 길을 걸어 도착한 그곳은 어딘가 쓸쓸하고 허전했다. 유성은 기차역 앞에 서서 텅 빈 레일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그의 마음속 분노는 갈 곳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뒤덮은 불길은 이미 다 타버렸고, 남은 것은 희미한 재와 고요한 쓸쓸함뿐이었다. 기차는 그의 마음처럼, 떠나지 못한 채 정적 속에 갇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기차에 앉아 있었다. 고독한 침묵에서 벗어나고자 기차는 출발한다는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가 유성에게는 어떠한 부름이었다. 생명은 모조리 불타 사라질 듯한 고요함에서 벗어날 부름. 그 포효에 그의 무의식이 응답하였다. 어디로 가는 표를 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표를 샀던가. 지갑을 꺼낸 기억이 없다. 지금 지갑은 있나. 짐은 다 꽃밭에 있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방에 들렀다 나올 걸 그랬나. 내가 원래 이렇게 기분파는 아닌데. 그나마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그래도 핸드폰은 있다는 안도감을 선물해 주었다. 한창 자신의 상황을 인지해가고 있을 찰나, 기차는 유성을 태우고 천천히 출발했다. 유성은 덜컹하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미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창가를 통해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타게 된 기차.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의 마음은 아직도 잔잔한 물 위에 파문을 그리듯 분노의 여진을 남기고 있었다. 기차는 차가운 철길 위를 달리며 일정한 진동을 전해주었다. 그 진동 속에서 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힘을 빼며 기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시골의 산과 들이었다. 저마다 자리를 차지한 나무들이 일정한 속도로 흘러갔다. 생명이, 그토록 고귀하게 여겼던 생명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저것을 왜 모를까. 저 빛나는 것을 왜 보지 못할까. 갑작스레 또 차오르는 불길에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분노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유성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마치 깊은 우물 속에 던져진 돌처럼 가라앉았다. 차창 너머로 펼쳐진 들판과 나무들은 그에게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빠르게 스치는 기차까지 닿을 수 없었다. 어쩌면 스쳐서가 아니라 유성도 함께 가라앉아 듣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차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달렸다. 유성은 기차의 떨림에 몸을 맡긴 채 흐릿한 풍경 너머로 생각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지조차 알 수 없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알 수 없는 그저 깊고 고요한 감정 속에 잠겨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있는 선인장도 유성에게 묵묵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정거장에서 기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보도블록 사이로 풀들이 무성히 자라 있는 기차역은 더 이상 역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자연과 융화되어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들 틈으로 햇빛이 그 정거장에 내려앉았다. 풀들이 햇빛을 반사하여 유성의 눈을 강타했다. 그 빛은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다만 어떠한 순간을 그의 머릿속에 닿게 했다. 그 순간에도 그는 상경 중이었다. 기차의 창가 자리에 있었고, 따스했던 태양도 동일하게 어떤 역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과 다른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조화의 사람들. 아무도 없는 현재와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자연과의 융화. 유성을 말없이 감상에 빠지게 만든 그림은 중간에 내리던 무희와 진운의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무희의 환한 웃음과 그것을 지켜보던 진운의 미소였다. 구름 위에 사는 자들의 모습.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룬 자들. 그들은 나의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그들이라면 답을 알까. 그들도 사실은 월영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온실 속 화초처럼 예쁜 것만 본 이들이 아닐까.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어. 그들도 같을 거야. 또 날 배신하겠지. 유성은 그들을 잊으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무릎 위에 놓인 선인장이 보였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 한다.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미소. 온실보다 따뜻해 보였던 그 미소를 믿어보자. 한 번 더 속아보자. 거짓을 믿는 죄악의 길을 걸어보자. 너를 위해서 기꺼이 그 길을 걷겠다. 유성은 선인장을 끌어안았다. 그의 의지인지, 의무인지 모를 마음으로 무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가장 우려했던 율촌 꽃밭에 있는 것은 다행히 아니었다. 그녀는 예당역에서 내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아직 예당역을 지나치지 않은 것 또한 다행이었다. 그녀가 경이로움에 넋을 잃어 내렸던 기차역. 그녀가 그곳에 또 있는 것은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무엇인지는 유성도 그때 함께 봤다. 내면의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 그를 막았을 뿐, 그도 그 청량하면서도 장엄한 자연 앞에 무너졌다. 그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떠올리다 곧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겨울은 또 어떤 모습일까 유성은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 창문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앙상한 나뭇가지들로 물든 산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은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며 빛과 그림자를 뿜어냈다. 그 구름 속에서 하얀빛이 솟구쳐 오르고, 산은 나뭇가지들 사이사이 남아 있는 붉은빛으로 자신의 생명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무들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그 속에 숨어 있던 온전한 생명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유성은 마음속 어딘가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이게 진짜 살아있는 것들이구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창문을 넘어 그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기차가 서서히 멈추며 예당역이라는 글씨가 유성의 눈 안에 들어왔다. 이곳이었다. 그들은 저 생명의 떨림 속으로 이끌렸던 것이었다. 그의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고, 차가운 공기 속에 홀린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차는 잠시 멈춰있었지만 그 정적 속에서도 유성의 마음은 요동쳤다. 그는 창밖에 펼쳐진 그 강인한 생명의 꿈틀거림을 느끼며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끌리듯 문을 열고 플랫폼으로 내려서자,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깊은 흙냄새와 나무 향기를 실어왔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모든 우울과 분노는 그 순간 사라지고, 오로지 눈앞의 일렁임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만이 남아 있었다.


 무희는 역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성의 얼굴을 기억하는지 그가 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를 알아보고는 손짓했다. 유성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너무 오랜만이라 얼굴이 가물가물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녀는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신성한 존재 같았다. 숨결 하나조차 가볍고 잔잔하게 흐를 것 같은 존재. 새로운 생명체를 보듯 벙찐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성의 모습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막 피어난 새싹과도 같은 그녀의 미소는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린 유성에게 보내는 수줍은 찬사와도 같았다. 그녀는 싱긋 웃고는 뒤로 돌아 햇빛을 품어 빛나는 흙길을 걸어갔다. 아직까지도 발걸음을 떼지 않은 유성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다그치는 그녀이다. 유성을 허겁지겁 무희의 뒤를 따라갔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듯 그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유성은 본능적으로 몇 걸음 떨어져 그녀의 뒤를 밟았다. 마치 이 장면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몸은 자연의 리듬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치 자연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루는 무희처럼 그녀의 발끝이 땅에 닿을 때마다 땅은 흔들리지 않고, 잎새들은 그 발길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조용하고 단아했으나 동시에 강렬했다. 유성은 그 뒤에서 숨조차 삼가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가로수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감쌌고, 그 모습은 무성한 초록빛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새싹처럼 아련하고 신비로웠다. 그렇게 그녀의 집까지 걸었다.


 둘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게가 다른 두 발걸음 소리만이 그 공간을 채웠다. 유성은 살랑이는 무희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흰 지붕을 둔 벽돌집이었다. 무희가 설명하길 중도하차를 했던 그날 진운과 동네를 돌아다니다 이곳 땅을 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유성은 마당에 선인장을 놓고는 무희를 따라 집 뒤편으로 갔다. 집 뒤쪽에는 만개한 새빨간 동백꽃들로 가득한 밭이 있었다. 유성은 동백꽃들을 바라보며 온몸이 숨 막히는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여성의 입술과도 같은 달콤한 동백꽃들의 모습은 유성의 가슴속에 경이와 경탄이 물결처럼 일었다. 꽃향기와 햇살에 물든 동백나무 아래, 무희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서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을 마주하는 그 얼굴은 아침 이슬에 빛나는 화초처럼 맑고 고요했다. 눈빛 하나가, 그녀의 손짓 하나가 마치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듯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자연이구나. 그가 속삭이듯 생각했다. 이제 막 피어난 새싹처럼, 그러나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켜온 나무의 일부인 듯했다. 그녀는 생명의 시작과 끝, 그 모든 것을 내포한 존재처럼 보였다. 유성은 그녀의 설명과 움직임을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모든 생명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저 진운이랑 헤어졌어요.


 그녀는 흙을 만지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곳에 함께 집을 짓고 꽃을 심으며 지내다 결국 서로 엇갈려 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잠시 흔들리다 잔잔히 가라앉은 잎사귀 같은 이야기였다.


 - 우리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뿐이에요. 그도 나도 다만 서로에게 더 이상 머물 수 없었을 뿐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다시 땅을 만졌다. 그녀의 손끝에 닿은 흙 속에서, 유성은 그곳에 스며든 무수한 이야기와 시간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흙을 만지고 나무를 돌보는 그녀의 곁에 있었다. 유성은 무희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기로 했다. 무희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새빨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그를 사로잡았던 그녀의 모습은 무아경에 빠져 춤을 추던 신성한 존재였다. 대지의 일부가 되어 빛과 어둠을 함께 품은 그녀는 마치 자연과 일체가 된 신비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경외를 넘어, 거의 숭배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유성은 그 모든 신성함 너머에 또 다른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움은 이제 온전한 한 사람의 것이었다. 자연이자 경외의 상징이었던 그녀는 이제 하나의 꽃을 품은 여인으로, 온전히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웃음, 조용한 말투, 그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서서히 풀려 나가고 있었다. 유성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희. 그의 마음속에서 이름이 속삭여지듯 피어났다. 그토록 우연처럼 시작된 인연 속에서 이제 그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매혹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저 자연의 신성한 화신이 아니라, 하나의 꽃처럼 자신에게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녀가 그를 바라볼 때, 그의 눈에는 그저 숲을 수놓는 빛바랜 잎사귀가 아닌 한 사람의 따뜻한 눈빛이 아련하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무희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나무를 볼 뿐이었다. 가끔씩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무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보는 것인지, 눈물을 훔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눈은 유성의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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