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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시영 Oct 27. 2024

15. 지고 난 후

에필로그

 무희와 진운은 푸른 하늘과 꽃내음을 가득 머금은 공기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그녀의 발길은 마치 흙길 위를 타고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고 가벼웠다. 무희는 진운과 함께 하는 이 길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녀에게는 온전한 자유가, 더 이상 되돌아갈 필요 없는 확신이, 그리고 그 자유를 향한 끝없는 갈증이 있었다. 진운을 만나고 꽃밭을 가꾸며 자연 속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자신을 느낀 그날 이후,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들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따라 걷다가 작고 아늑한 땅을 발견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조용한 곳이었다. 산등성이가 파랗게 하늘을 떠받치고, 먼 곳에서는 물이 흘러내려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무언가를 세운다면, 비로소 그들과 자연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음을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작은 흰 지붕의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집은 사람들의 소음과 떠나온 세상의 번잡함을 잊게 할 만큼 평화롭고 견고하게 서 있었다. 흰 벽돌 하나하나에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나무 울타리에는 들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둘은 집을 짓는 동안에도 서로의 눈빛과 숨결을 읽으며 같은 마음, 같은 시간을 나누었다. 진운은 흙을 다루는 손길이 익숙했고, 무희는 그 옆에서 자연을 닮은 담담함으로 그와 함께 흙을 나누고 벽돌을 쌓아 올렸다. 무희는 매일같이 새벽녘이 되면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은은하게 퍼지는 새벽이슬과 동백나무가 보였다. 그 나무는 진운과 그녀가 함께 심은 나무였다. 무희는 마치 이 동백나무가 자신처럼 여겨지곤 했다. 추위에도 굳건히 살아가면서도, 그 자리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그녀는 자신이 여기에, 자연의 한 조각으로서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꽃들이 자신을 위해 피고 지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무희는 이 자연과 함께 성장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마치 그녀의 본능과도 같았다. 이제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무희는 속삭였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싹튼 믿음이었다. 진운은 무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그녀를 향한 깊은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그녀와 함께할 때, 비로소 자신이 자유롭고 풍성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운의 존재는 무희에게 온전한 뿌리와도 같았다. 그는 그녀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지해 주었고, 그녀를 끊임없이 감싸는 흙과 물과 빛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를 나무처럼, 그리고 꽃처럼 지켜보며 살아갔다. 때로는 서로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때로는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속에서 둘은 더 깊어졌다. 나는 이곳에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되었어. 무희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길 하나하나에 생명과 자연의 고요한 힘이 담겼다. 그녀가 손을 뻗어 동백꽃을 만질 때, 그것은 마치 그녀 자신을 만지는 것과 같았다.


 진운은 그날도 혼자 땅을 파고 있었다. 집 앞 울타리 너머로 펼쳐진 초록의 들판과 파란 하늘이 선명했지만, 그의 눈길은 자꾸 흙 속으로 침잠해 갔다. 처음엔 그의 손끝에서 생겨나는 그 작은 생명들이 그를 삶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슴속 어딘가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되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무희는 진운이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 진운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진운은 잠시 고개를 들더니, 깊게 숨을 들이쉰다. 그는 말을 꺼낼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의 마음속 무거운 돌을 꺼냈다.


 - 무희야, 나 이제 걱정이 돼. 여기서의 삶이 너무 편안하니까, 내가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우리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무희는 그의 말을 듣고서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녀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가 떠올랐다.


 - 진운아, 그건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걸 거야. 모든 것이 자연스레 흘러가는데, 굳이 그걸 밀어낼 필요가 있을까. 세상이 우리를 요구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우리가 종속되어야만 하는 걸까?


 진운은 그런 무희의 말이 마치 짙은 안개처럼 자신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불안이 점점 더 솟아올랐다.


 - 그래도… 언젠가는… 현실을 마주해야 하지 않겠어? 언젠가는 이곳에서의 생활도 끝이 날 텐데… 난, 무희야, 우리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다고.


 무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차가워졌다.


 - 진운아, 우리가 뭘 위해 사는지 잘 생각해 봐. 정말 중요한 건 이곳에서 우리가 지금 느끼는 생명과 자유 아니야? 꼭 도시에 돌아가서 매일매일 똑같은 걱정에 묻혀 살아야만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진운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 무희야, 너도 알잖아. 우린 그냥… 여기서 평생을 살아갈 순 없어. 돈도 없고, 계획도 없어. 이게… 이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르겠어?


 무희는 그의 말을 듣고 화를 삼켰다. 그녀는 조용히,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 진운아, 나한테는 여기가 진짜 삶이야.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함께 꽃을 돌보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게 중요해. 왜 그런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운은 짙은 무기력에 휩싸여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그가 바라보는 흙은 이젠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 막히는 공허감에 사로잡혀, 무희가 사랑하던 이 공간마저도 자신을 점점 잠식해 가는 것처럼 느꼈다.


 - 나도 몰라. 더는 모르겠어. 여기가 나에게 편안한 곳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냥 날 갉아먹는 곳처럼 느껴진다. 나를 잊게 만들어. 현실도, 나 자신도, 모든 게 다 지워지는 것만 같아…


 무희는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


 - 그렇다면 너는… 현실을 놓을 자신이 없는 거겠지. 그 무거운 현실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돌아가. 난… 난 여기 남을 거야.


 무희의 그 차가운 말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흙 속에 묻힌 작은 씨앗이 깨어날 때 내는 소리처럼 낮고도 뚜렷하게 들렸다.


 진운이 떠난 후, 무희는 홀로 그 집에 남았다. 그는 떠났고,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날의 바람이 문틈을 스치며 사라진 그의 기척을 묻어놓았다. 그날 밤 무희는 홀로 눈을 감고 손끝으로 진운의 흔적을 더듬었다. 책상 위엔 그의 손길이 남아 있었고, 텅 빈 방구석구석엔 그가 머물던 온기조차 차갑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눈을 감을 때마다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던 진운의 눈빛이 떠올랐다. 한때 그 눈빛은 산들바람이었고, 차갑고도 따뜻한 푸른 강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희는 그 빈자리가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깊이를 알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그 자리를 묻어두려 애썼다. 무심코 그를 떠올리며 눈가가 젖기도 했지만, 이내 자신이 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준 완전한 자유였음을, 그가 알려준 자연의 너그러움이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무희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동백나무는 그 해에도 피어났다. 무희는 동백나무를 바라보며 느꼈다. 그것은 오랜만에 마음의 정원에 깃든 평온이었다. 그가 심어놓은 동백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잔가지들은 이제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꽃을 피워냈다. 붉은 동백꽃은 마치 눈물 같은 붉은빛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이제 이곳은 진운을 떠나보낸 공간이자, 그가 남긴 흔적에 물을 주는 그녀의 터전이 되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동백나무 곁에 앉아 그 나무를 돌봤다. 지치거나, 허물어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그 동백나무에 기대었다. 그것은 더 이상 추억에 머물지 않았다. 그 나무는 이제 온전한 하나의 생명으로 그녀 앞에 섰다. 나무의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진운의 온기처럼 따스한 기운이 번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 안에서 꽃은 진실로 자라났고, 흔적과도 같았던 동백은 그렇게 피어나 완전해졌다. 무희는 가만히 나무 아래에 앉아 차가운 흙을 만지며 속삭였다.


 - 이제는 너와 나, 둘 다 자유로워. 우리에게 남은 건 이곳뿐이니까.


 동백꽃이 바람에 흩날리듯 무희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자유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안고, 그녀는 혼자서도 완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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