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에 대한 신뢰는 일관성에서 온다.
회사에서 새로운 제도를 시행한다고 한다.
말은 그럴 듯 한데, 본질적으로 왜 이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은 이 제도가 왜 필요한지, 도움이 된다는 것까지는 대충 알겠는데 과연 제대로 작동할지 의구심이 든다.
대충 하는 시늉만 내다가 흐지부지 될 것 같아 냉소적으로 지켜보게 된다.
이 제도가 과연 모든 구성원들에게 차별없이 적용될까?
누군가 더 이득을 보거나 불이익을 보는 사람은 과연 없을까?
위와 같은 풍토에서는 회사가 제대로 운영되기 힘들다. 회사와 제도에 의구심을 갖는 구성원들이 많다면, 회사의 운영 역량과 영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조직 구성원들이 회사와 제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제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지 않아서건,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하지 못해서건 저변에는 회사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제도의 성패는 구성원들의 신뢰에 달려있는 셈이다.
다수의 구성원들이 모인 회사 조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당연히 최고경영자일 것이고, 그 다음이 HR 부서라 볼 수 있다. HR이야말로 조직 구성원 자체를 대상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HR의 영향력은 제도로 구체화된다.
일반적인 회사 조직은 구성원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개별화된 원칙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편의상 공통의 잣대를 만들어 적용하고 관리할 수 밖에 없다.
소수의 집단이라면 그들끼리의 공유되고 합의된 가치 판단 하에 개별화 된 원칙을 적용할 수 있겠지만, 구성원이 수십 수백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구성원의 수만큼이나 많은 제도를 만들고 운영해야 한다면, 말도 안되는 시간과 자원이 소요될 것이다. 경영상의 효율을 추구해야 하는 관리 조직의 본질을 감안할 때 HR 부서 역시 어떤 일관된 기준, 즉 제도를 통해 일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도는 어떻게 힘을 발휘할까.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고, 반대로 따르면 그만한 이익을 보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사람, 더군다나 집단과 같은 복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억지로 따르는 척은 할 수 있어도, 그 제도가 본래의 취지에 맞게 제대로 돌아가려면 결국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따라줘야 한다. 결국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제도란 구성원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과 신뢰는 어떻게 줄 수 있는가?
물론 제도가 자체가 개인과 조직에 모두 이익을 가져다 주도록 잘 설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것은 일단 차치하고, ‘이 제도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지속적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믿음. 즉, 일관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어떻게 심어 주느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것에 해답을 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는 그 유명한 진시황의 진나라다.
최초의 통일왕조라는 위상에 걸맞게, 지금 중국의 공식적인 국호도 진나라(Qin→Chin)에서 따온 'China' 아닌가.
그런 진나라가 본래는 서쪽 변방의 소국으로 출발했다가 통일 100여 년 전쯤에야 비로소 전국을 통일할 만한 역량을 갖춰가기 시작하는데, 바로 '진효공' 때부터다. 진효공은 개인의 역량과 리더십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재상으로 믿고 중용했던 ‘공손앙’이 강력한 법치주의를 내세우면서 국부가 쌓이고, 군대가 강력해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법치주의가 잘 작동했던 것은 아닌데, 세련된 법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고대국가로서의 한계도 있었고 명문화 된 법보다는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앞서는 시대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마냥 강압적으로 법을 시행한다고 다스림이 온전히 될 리 없다. 마음으로부터 백성이 믿고 따르지 않으면 진정한 법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공손앙은 다소 특이한 명을 내린다.
도성 남문 앞에 9m에 이르는 큰 나무기둥을 세워놓고, ‘누구든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십금(十金)을 주겠다’고 썼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수군거렸으나 이내 비웃어 버렸다. 기둥을 옮기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지만, 저런 시덥잖은 일을 한 들 관아에서 정말 돈을 내어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공손앙은 이내 글을 고쳐 다섯 배인 오십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백성 중에 힘깨나 쓰는 자가 해본 들 손해볼 것 없다는 심정으로 낑낑거리며 기둥을 북문으로 옮겨놓았다. 그랬더니 정말 묻고 따지지도 않고, 그 장사에게 오십금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또 얼마 후에, 태자(진효공의 아들, 훗날의 혜문왕)가 나랏법을 어기는 일이 일어났다. 그 당시 법은 태자가 죄를 지으면 태자의 스승이 대신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태자의 스승이 진효공의 친형, 즉 존귀한 왕족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왕과 태자의 눈치가 보여 차마 형을 집행하지 못했겠지만, 공손앙은 가차없이 태자의 스승에게 코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그가 공표한 법을 예외없이 적용한 것이다.
그의 서릿발 같은 태도에, 이제는 백성들이 공손앙과 그가 만든 법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 이후 진나라는 땅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다 할 정도로 치안이 안정되었고, 나라에서 시행하는 각종 사업도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당시로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중앙의 행정력이 곳곳에 두루 미쳤기에 도강언(都江堰, 진나라 때 건축된 사천지방의 수리 시설로 현재까지도 사천지역이 곡창 역할을 하는데 기여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건설과 같은 업적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6국에 비해 훨씬 세련되고 강력한 법치를 구현한 덕분에 진나라는 빠르게 부강해져갔다.
다시 돌아와 생각해본다.
회사가, 그 중에서도 HR이 많은 구성원들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제도로 일해야 하고 그 제도에 대해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함은 충분히 강조했다.
다만 회사와 HR부서가 단지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 자체에 천착해, 정작 그 좋은 제도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듯 하다. 그래서 때로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일방적이거나 강압적으로 제도를 시행하는 것처럼 오해를 사는 것이다. 또한 기왕 제도를 만들었다면 비록 작은 것이라도 예외를 두지 말고, 일관성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들이 제도를 따르게 된다.
전국시대와 같은 전근대적 왕조 시절에 강압적으로 밀어 부쳤어도 될 법 했을 것을, 마음으로부터 백성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고자 했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관철시킨 공손앙과 진효공의 혜안이 2천년도 더 지난 오늘날 특별히 놀랍게 보이는 이유다.
+ 굳이 첨언하자면, 본인의 소신을 갖고 가차없이 법을 밀어부친 공손앙도 특출난 인물 임에는 분명하지만, 왕으로서 초법적인 지위를 가져 충분히 본인의 형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공손앙을 신뢰한 진효공이야말로 진정 훌륭한 리더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들(태자, 혜문왕)도 진나라의 부강을 이끈 명군이었지만, 태자 시절 공손앙에게 받았던 치욕을 잊지 않고 왕위에 오른 뒤 탄핵하여 실각시키기 때문에 아버지의 관대함과 비교되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