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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 인연

by 소연생 Jan 31. 2025

1/30

우리 처음 만났던 순간들을, 시간이 흐른대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 시절인연, 규현 -


오늘 H가 나의 슬픔을 알아챘다.


우리가 함께 따스한 추억을 쌓을 때면 그 순간이 오롯이 기쁘지 않았다. 언제나 기쁜 한 구석에 슬픔이 공존했다. 그 이유는 언제나 같다. 그 기쁨이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만 머문다는 사실 때문에. 당장 내일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먼 미래에는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수 있다는 아쉬움과 미련에. 마음 한 구석이 얹힌 듯 아려온다.


나에겐 H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단지 오늘 딱 하루만큼만 허락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 하루를 누구보다 깊게 음미하리라 다짐했고, 그 하루를 음미하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물론,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겠다는 건 처음 만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지만. 기쁨과 행복이 깊어진 만큼, 그동안 슬픔도 깊어져 왔다. 그래서 그 깊은 슬픔이 오늘 잠깐 H의 앞에서도 새어 나왔나 보다.


H는 미래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면,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나의 마음은 자꾸 행복한 미래를 향해 다가선다. 내가 H를 대신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모습, 설거지를 하는 모습,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어 고맙다고 말해주는 H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힘들어도 어쩌면, H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사람마다 힘든 일에 대처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H가 힘든 일에 대처하는 방법은 현명하게도 대화와 애교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애교와 귀여움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없던 일로 만든다. H와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이없게도 나는 매번 행복한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곤 곧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각과 함께 공허함과 허탈함, 아쉬움과 미련, 슬픔이 밀려든다.


가장 저렴한 오므라이스에 H가 좋아하는 사이드 새우튀김, H가 먹고 싶어 했던 아츠아츠 스페셜 정식을 주문한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던 날 먹었던 그 경양식 카츠 정식이다. H는 스파게티가 맛있었다고 했다. 나는 급식 스파게티 같아서 별로던데, H는 그래서 마음에 들었단다. 우리는 그걸 나누어 먹으면서 주고받기로 했던 새해선물 얘기를 한다. H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해서, H의 삶이 더 반짝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예쁘고 반짝이는 시계를 선물했었다. H는 나에게도 새해 선물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무엇을 받을지 그동안 많이 고민했지만, 나는 뽀뽀를 받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1년 동안 만났을 때 입술에 뽀뽀해 주고, 집에 들어가기 전 입술에 뽀뽀해 주는 것. 그것을 새해 선물로 정했다.


매일 이어지는 아련한 하루들. 그것들을 이렇게라도 연장하고 싶었다. 적어도 365번의 행복은 더 꿈꾸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이다. 나에겐 콜드플레이의 내한공연을 보는 것보다, 월디페의 공연을 보는 것보다 H가 나의 입술에 스스로의 의지를 담아 뽀뽀해 주는 것이 더 짜릿하다. 주로 애정표현은 내가 먼저 한다. 대부분 내가 먼저 H에게 애정을 주고, (자주 거절당하긴 하지만) 내가 먼저 뽀뽀를 시도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AI 조율을 성공적으로 마친 나에게 칭찬을 한다며 H가 스스로 먼저 뽀뽀를 해주었는데,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미래를 꿈꾸지 못해 슬플수록 내가 점점 더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은, H가 현재의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H도 사실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현재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나를 좋아함으로 인해서 기쁜지, 아니면 슬픈지, 아니면 그것이 공존하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이 아닌 서로를 위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그녀의 의지로 나에게 다가오는 가벼운 뽀뽀는, 그 가벼운 스킨십이 만드는 짜릿함은, 서로의 마음을 단번에 확인시켜 준다.


역설적으로 현재의 내가 사랑을 돌려받을수록,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된다. 선순환일지 악순환일지 모를 이 굴레에서 더 이상 스스로의 의지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도 적어도 앞으로 1년간은 함께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H와의 인연이 시절인연일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할 순간들은 시간 속에 옅어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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