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달리기.
집 근처의 도림천을 따라 러닝을 하면 상쾌하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도,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 소리도, 쿵쾅대며 벅차오르는 심장 박동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24년에는 도림천을 5번 정도 뛰었던 것 같다. 상쾌한데 5번 밖에 러닝하지 못한 이유는 나의 좌우불균형 골반과 뭔가 잘못된 러닝 자세 때문에 러닝을 하면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10 km 를 달리면 무릎이 아파서 자주 뛰지 못했다. 심폐지구력보다 무릎이 먼저 닳아서 뛰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요즘은 러닝머신에서 뛰고 있다. 달리기와 마라톤 관련한 영상을 틀어놓고 바로바로 자세를 수정한다. 오르막으로 러닝머신을 설정하고, 발바닥 앞부분을 먼저 닿는 방식으로 뛴다. 보폭은 좁게 타닥타닥, 위와 앞으로 밀어내는 느낌으로 뛴다. 이런 자세로 러닝하니까 그 전보다 무릎 통증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 10분까지만 뛰어야지, 5km까지만 뛰어야지, 이 영상 끝나면 내려와야지 하고 러닝머신에서 내려올 타이밍을 잡는다. 힘들지만 이 정도까지 뛰었으면 꽤 괜찮게 뛰었다는 보람을 가지고, 러닝을 멈춘다
러닝 목표에는 그에 걸맞는 러닝 페이스가 있다. 3 km 를 뛰겠다는 마음을 먹고 러닝머신에 올라서면, 속도를 12 km/h 로 세팅한다. 6 km 를 뛰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속도를 9 km/h 로 세팅한다. 9 km/h 보다 빠르게 뛰고 싶다는 욕심도 있지만, 그렇게 빠르게 뛰면 마지막 1 km 거리동안은 걷는 속도로 헉헉 거리며 겨우 러닝을 끝낼 수 밖에 없다. 9 km/h 로 달리는 페이스가 익숙해지고 나서야, 10 km/h 로 페이스를 올릴 예정이다.
대학원 과정은 박사 학위를 향한 42.195 km 의 풀코스 마라톤이다. 박사 과정은 체력적으로 힘든 실험을 해야 하며,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일 해야 하고, 결국에 팀이 아닌 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점에서 박사과정은 달리기와 닮았다. 대학원생은 며칠, 몇달, 몇년동안 실험을 해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 연구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연구의 결과를 정리하여 논문으로 출간한다. 어떤 이는 작은 논문을 여러 개 출간하기도 하고, 큰 논문을 한 개 출간하기도 하고, 큰 논문을 여럿 출간하기도 한다. 대학원생은 일정 수준 이상의 연구 결과와 노력을 들여서 박사가 된다. 즉, 박사 과정동안 어떤 이는 5 km 코스를 8 번 뛰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50 km 이상 거리를 뛰기도 하겠지만, 모든 박사들은 42.195 km 이상의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다. 우리 연구실은 42.195 km 풀코스 1 회를 완주해야 박사가 되는 것 같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작은 논문을 하나 쓰고, 큰 논문을 하나 써서 박사가 되고 싶었다. 대학원을 다루는 컨텐츠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대학원에 입학해서 빠르게 논문을 하나 작성해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논문을 출간하는 프로세스를 미리 경험해봐야 대형 논문을 작성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논문 출간을 통해서 얻는 경험들은 아래와 같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개시하고 결과를 끝맺음짓는 방법.
실험결과를 충분히 숙고하여 과학적인 의미를 도출하는 방법.
논문에 들어가는 학술적인 어휘와 구조의 문장을 작성하는 방법.
서론, 방법, 결과, 논의 등의 구성을 문단별로 자연스럽게 엮는 방법.
잡지에 논문을 싣기 위해 편집자에게 메일을 보내는 방법.
검수자에게 피드백을 받고, 그 피드백에 걸맞는 회신을 보내는 방법.
작은 논문에서 작은 실수를 하며 경험치를 올려놔야 큰 논문을 작성할 때 더 수월하게 논문을 작성할 수 있다. 작은 논문은 예방접종같은 개념이다. 그러니까 나는 풀코스 마라톤을 뛰기 전에 5km 를 뛰어보고 싶었다. 각 거리마다 체력 안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러닝 중에 물을 마시면 좋은지, 마라톤 선수 등록과 메달 수령은 어떻게 하는지, 등등 이런 내용을 미리 익히고 싶었다. 나는 5 km 러닝 경험으로 풀코스 마라톤을 수월하게 뛰고 싶었다.
그러던 중, 교수님은 나에게 프로젝트2를 해보자는, 즉, 5 km 러닝을 제안했다. 나의 프로젝트1은 증명해야할 가설들이 많은 풀코스 마라톤이다. 반면, 프로젝트2는 프로젝트1보다는 작은 규모다. 프로젝트2는 온도에 따른 단백질의 결합 양상이 달라지는지 확인하는 프로젝트였다. 온도에 따라 결합 양상이 일정한 결과가 나온다면, 일정하다고 논문을 쓰면 되고.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가 나온다면, X 메커니즘에 의해 달라진다고 논문을 쓰면 된다. 연구 결과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간략하게 설명한 감도 있지만, 실제로도 간단한 프로젝트였다. 교수님도 프로젝트2를 금방 끝내서 작은 논문을 내고, 원래의 프로젝트1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했다. 교수님도 나와 같은 의도였던 것 같다.
나는 금방 끝내버리자는 공산으로 나는 온 힘을 다해서 프로젝트2에 매진했다. 단백질을 과다하게 정제했고, 결합 실험도 대규모로 진행했고, 하나의 참고 문헌도 3-4번씩 다시 읽었다. 150%의 최선을 다해서 프로젝트2가 마무리되는 듯 했다. 나는 12km/h 전속력으로 5 km 구간의 러닝머신을 뛰듯이, 프로젝트2의 결승 지점으로 달려갔다.
교수님은 프로젝트2의 마무리 시점에서 조금만 더 하면 끝난다고, 추가 실험을 주문했다. 나는 추가 실험도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했다. 추가 실험을 끝내고 교수님께 갔더니, 교수님은 또 다른 추가 실험을 주문했다. 또 다른 추가 실험도 잘 마무리하여 교수님께 방문했더니 또 또 다른 추가 실험 요청이 왔다. 그렇게 추가 실험을 끝내면 또 추가 실험이 왔고, 또 추가 실험이 왔고, 추가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추가 실험을 계속할수록 실험에 살짝씩 에러도 발생했고, 내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교수님이 왜 그렇게 프로젝트를 끝내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프로젝트2는 예상했던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한두 실험을 더 보충해서 그래도 봐줄만한 논문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험을 지시한대로 정확한 결과가 제깍제깍 나오는 학생이니, 시켜보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이다. 프로젝트2의 주제와, 이 학생의 열정을 작은 논문으로 끝내기는 아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교수님의 입장이지 내 입장은 아니다.
4.5 km 까지 달려온 시점에서 교수님이 "500 m 만 골인지점이야 더 가면 돼! 자 스퍼트 내보자!!" 라고 말씀해서 나는 막판 스퍼트를 내어 5 km 지점에 도달했다. 5 km에 도달해보니까 5 km 지점은 교수님의 골인 지점이 아니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다시 또 말했다. "500 m 만 더 가보자! 500 m 만 더 가보자!" 나는 500 m를 달리는 매 구간마다 교수님의 말을 믿었고. 스퍼트를 계속 냈다. 하지만 프로젝트2의 골인지점은 절대 오지 않았다.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터질듯이 쿵쾅대고, 나는 트랙 위에 서있지도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뛰어야 하는 그 목표를 제대로 알고, 그 목표에 걸맞은 페이스에 달려야 한다. 5 km 코스로 목표를 설정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 걸맞는 마인드와 그에 걸맞는 속도로 달렸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코스는 10 km, 20 km 점점 늘어났다. 처음부터 20 km 짜리 코스라는 걸 알았다면, 12km/h의 전속력으로 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체력도 안배해가며, 내가 더 주도적으로 달리기를 이끌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전속력으로 달려버려서 달릴 의지와 체력이 모두 바닥나버렸다. 나는 그 전과 동일한 속도로 달릴 수도 없고, 달리고 싶지도 않다. 나는 조금 빠르게 걷는다 싶은 느낌의 8km/h 속도로 연구 페이스를 설정했다.
프로젝트2는 5 km 코스가 아니라, 풀코스가 되었다. 교수님의 "500 m만 더 달리면 골인이야!"라는 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는 500 m 를 더 달리더라도 절대로 골인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요즘의 교수님은 왜 연구 마인드가 초반같지 않고, 왜 실험이나 분석의 정확도도 떨어지는지, 따지면서 혼낸다. 이제는 교수님께 5년 이상 혼났으니까 혼나는 것도 익숙해져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나는 앞으로도 절대로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냥 내 페이스에 맞게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