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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남 조 Sep 19. 2024

설한풍


지금의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백두산은 눈이 많이 내려쌓일때는 골짜기에 사람키 몇배를 넘기는곳도 있다.


이노키 간지인가 역도산의 제자로 알려진 일본의 프로레슬링 선수가 은퇴전 경기를  황해도 출신의 스승인 역도산(본명.김신락)의  고향 북한에서 치렀었는데 경기를 마치고 2월달에 그가 백두산을 보러 온다고 해서 그 한겨울에 백두산 올라가는 눈길을 치던때가 있었다.


그해 눈이 얼마나 많이 오고 바람도 세게 불어댔는지  2미터이상 높이가 되는 눈을 몇십미터씩 구간별로 나누어 단체별로 쳐냈는데 눈삽으로 눈을 처내서 길을내고 내려오면 밤새 또 바람에 메워져서 담날 또 올라가 치고 그러면서 이노키 한사람 때문에 그가 오는 날 당일 아침까지 추위에 떨며 양강도 한개 도민들이 엄청 고생했었다.


그렇게 겨울이면 북극이나 남극처럼 눈이 많이쌓이는 곳이다 보니 골짜기가 아닌데도 우리들중 키가 제일작은 준영이는 눈 깊이가 그의 어께를 스치는곳도있었다.


일행의 맨 뒤에서 앞선 네명이 이미 헤쳐놓은 길을 따라 걷다보니 나는 그나마 힘은 덜 들었다.


맨 앞의 금혁이 아빠가 제일 힘들것이다.


나이어린 일행들을 이끌어야하는  인솔자의 책임감 때문인지 그는 전혀 지친기색을 내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그도 힘들텐데 앞장서서 이 깊은 눈길을 헤쳐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출발전 약통이라며 꺼내 마신 술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사그러져갔다.


우리가 들어선 개활지대는 정작 들어서보니 늪지대다.


깊은곳은 밟을때 뿌지직~하는 얇은 얼음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또 어떤곳은 우뚝솟은 잡풀더미를 타고넘어 잠깐이나마 눈이 허벅지정도다.그렇게 일행모두는 올라섰다,내려섰다를 반복하며 줄지어 가는 모양이 마치 운동회날 파도타기 하는것같았다.

 

서서히 저멀리 동녘하늘이 2012년의 새해 첫날을 알리며 푸름,푸름 밝아오기 시작한다.


아침 7시가 다 되어오는것이다.


나는 또다시 따뜻한 우리집 아래목이 그리워지며 집 떠난걸 후회했다.


이제껏 설날을 집떠나 쇤적이 없는데 그것도  남의나라 땅에서 깊고깊은 산속을 헤메고있으니 어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아파 하실까?


날 밝을 무렵이여서인지 아님 개활지대여서인지 점~점 바람도 쎄진다.


왼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그쪽으로 얼굴을 돌릴수가 없다.


강한 바람은 아니지만 이미 얼어 찢길듯한 얼굴에 그대로 칼날같이 이마며 코등을 에이는것같이 아팠기때문이다.


장갑낀 손을 들어 바람을 막으며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린채 앞도 안보고 걷던 나는 갑자기 멈춰선 준영이와 부딫힐뻔 하면서 흠칫


고개를 들었다.


" 뭐야, 왜  안가니? "


" 내 안가는게 아이라 앞에 누나들이랑 섰습니다."


준영이의 말에 앞쪽을 보니 맨 앞의 금혁이 아빠가 걸음을 멈추고 지형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백여미터 앞에 또다시 숲이 나졌다.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것처럼 칼로 자르듯이 늪지대가 끝나고 일직선으로 숲이 시작되는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꽤 높아보이는 산봉우리가 나졌다.


하나가 아니다. 오르고 내리고 봉우리  몇개가 연결되있는것처럼 보였다.


금혁이아빠는 방향을 틀어 그 산봉우리를 향해 무릎으로 눈을 헤치며 걷기시작했다.


그닥 경사가 가파로워보이진 않지만 지칠대로 지친 나는 또 산을 타야 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아마 바람을 등지려고 그러나보다 생각하며 어쩔수 없이 일행은 그를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에 거의 들어설 무렵에는 점점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더 쎄게 불어댄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도 눈보라에 메워지기 시작했다. 저기 산봉우리에 다달을 즈음이면 미장질 해놓은것처럼 모두 말끔히 메워질것이다.


날은 거의 밝아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지만 동녘하늘 저끝에서 내리 비추는 햇살도 오히려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정작 숲이라고 들어섰지만 바람만 조금 피했을뿐 추위는 여전했다.


아까 지나온 빼곡한 밀림과는 달리 듬성 듬성 키 낮은 잡관목들도 있고 훵~하니 넓은 공지는 개울인지 늪인지 푹~푹 빠져들면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날이 완전히 밝으면서 바람도 추위도 한층 더 강해졌다.


귀마개 외에 머리에 아무것도 없는 나는 등뒤에서 목덜미로 파고드는 바람에 머리를 안으로 움츠리고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채 산기슭을 향해 걷고있었다.


긴장되고 쫓길땐 몰랐는데 배도 고프기 시작했다.


전기가 안들어 오는탓에 어제저녁 5시반쯤 이른 저녁을 먹고 밤새 걷고 뛰고 눈길을 헤치며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으니 배가죽은 이미 등가죽과 만나 인사를 나눈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앞에서 걸어가는 준영이는 가끔씩 넘어질듯 휘청거린다.


내가 이런데 나이어린 그도 지금 얼마나 배가 고프랴.


하루,하루 수십리길을 오고가며 석탄 짐 날라서 남는 이윤이라야 고작  국수 한사리다.


그걸로 앓는 엄마랑 동생 미영이까지 세식구가 하루를 나눠서 먹고 살아야 하니 먹어야 한끼에 얼마나 먹었겠는가?


뭐, 여자애들도 그렇고 우리집도 별반 사정이 나은건 아니지만 그나마 금혁이네는 금혁이 엄마가 쌀장사를 하니 일행중 집안사정이 조금 나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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