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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남 조 Sep 12. 2024

금혁이아빠(2)


그렇게 매일같이 술에 쩔어 살기에 직장도 점점 지각하는날보다 안하는 날을 오히려 손에 꼽을정도가 되였다.


그가 다니는 혜산광산 공무직장에서도 그 술때문에 미움 났는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당원돌격대로 내보냈다.


북한은 각종 명색의 돌격대가 있다.


8.15돌격대, 당원돌격대,속도전청년돌격대 등 이외에도 여러가지 이름을  단 돌격대가 있는데 중장비와 연유가 부족한탓에 각 도,시,군 공장 기업소들에서 인원을 뽑아 대규모 공사현장에 밥만주고 월급도 없이  투입해 일을 시킨다.


밥이라고 해봤자 통강냉이나 통밀을 타개고 삶아서 알루미늄 식기에 반도 안되게 주고 반찬이라야 고작 염장무우(단무지) 몇조각이 끝이다.


잠자는것도 공사장주변에 천막을 쳐놓고 선풍기하나 없이 무리생활을 시키다보니 위생환경도 너무 열악해서 속옷이나 머리에 항상 이가 득실거렸다.


나도 대학때 평양-남포 고속도도로 건설장에 예술선동대로 한달간 나간적이 있다.


북한은 공사판이나 농장의 농번기때면 항상 방송차를 끌고 예술선동을 한다.


나팔불고 노래부르고 기발흔들며 춤을추고 목이터져라 구호를 웨치고...


제대로 먹지도,씻지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무거운 돌지게를 져나르는 이들한테 그 소리가 들리기나 하랴만은...


그때 우리도 밤새 껍질채로 삶아서 퉁퉁 뿔어오른 밀밥을 먹었다. 말이 밥이지 당시 우리 아빠 말씀은 남포항으로 외국에서 싸게 사서 들여온 그 밀이 짐승 사료용이라는 것이였다.


그러니 그냥 밀이 아니라 밥이라고 숟가락으로 퍼서 들여다보면 반은 까만 풀씨랑 알지못할 씨앗들이랑이고 천막안에 건사를 제대로 못해서 쥐가 들어와 먹고 싼 쥐똥도 가끔씩 섞여있을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짐승사료마저도 배부르게 먹을수가 없었고 한사람당 고작 한끼에 식기 반식기 조금 넘게 받아먹으며 일했었다.


도로공사도 마찬가지다.


말이 고속도로지 논판에 벼뿌리를 호미로 파내고 그위에 사람인력으로 지게를지고 돌이며 자갈이며 흙을 퍼다가 부어 도로를 만들었는데 내가 봐도 그렇게 건설한 도로가 포장을 하고나면 주저앉고 갈라터질것만 같았다.


아무튼 일단 집을 떠나 6개월이든 1년이든 열악한 단체생활에 고된 노동을 해야하니 그것 자체만으로  고생인것이다.


금혁이 아빠는 등떠밀려 간 돌격대에서 지휘관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아님 도망쳐왔는지는 몰라도 석달도 안돼서 다시 집에 내려왔다.

그리고는 직장에서도 찾지않으니 매일 술이다.


언젠가 신파쪽에 사금캐려 간다고 두어달 안보이더니 불쑥 울집에 나타나서는 나한테 중국돈 백원짜리 지페 한장 꺼내주면서 장마당가서 술이랑 안주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는것이였다.


그때부터 하루가 멀다하게 울집에서 술판을 벌렸다.


사금은 무슨, 아마 중국 왔다갔다 하며 장사나 밀수를 했을것이다.


들키면 취조를 받아야되니 사금캐려 간다고 거짓말 했던것 같았다.


금혁이 엄마도 울어머니한테 그런 금혁이 아빠를 집에 들여놓지 말라고 열번도 넘게 당부했다.


그 당부 하기도 전에 우리 어머니는 이미 수십번을 별의별 말을 다해가며 되돌려 보내려 했지만 그가 언제 찾아오는지 알고 항상 문을 안으로 잠그고 살수도 없고 사람사는집에 사람 찾아오는데 어떻게 강제로 내쫓겠는가.


거기에 울어머니가 마음 모질지 못하시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는 우리집에 어려운 일이 생길때마다 자기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었었기 때문이다.


간부집 아내로 장사를 모르고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는 아빠가 억울한 루명을 쓰고 하루아침에 도인민위원회 높은직책에서 막노동자로 쫓겨나게되자 갑자기 식량이며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게되어 성후동 살던 아파트를 팔고 지금의 혜장동 압록강변 땅집촌으로 이사오게 되셨다.


이사온 첫날 이사짐 옮기는것부터 시작해서 낡은  집수리며 밖의 창고수리까지 심장쇼크로 쓰러지신 우리 아빠를 대신해 금혁이 아빠가 다 도와주었고 아프신 우리 아빠를 위해 약도 구해오고 퇴근길에 항상 울집에 먼저들려 곁에서 말동무도해주며 위로를 해드렸었다.


내가 대학때 간농양으로 40일 정도 병원에 입원한적이 있었는데 당시 병원에서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환자 가족들이 삼시세끼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었다.


그때도 금혁이 아빠는 일주일에 꼭~꼭 한,두번씩은 삶은계란 한두알씩 가지고 내 병문안을 와주었었다.


병원 입원했었던 얘기가 나오니 정말 가슴아프던 그나날들을 잊을수가 없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통강냉이 한알도 귀중하던때 우리 어머니는 매일 왕복 거의 백리길을 걸어 산에가서 약초를 캐려 다니시였다. 하루종일 힘겹게 캐온 약초로 밀가루 500그램정도 바꾸시어 두부집에서 두부짜고 남은 두부까리를 얻어다가 거기에 밀가루를 섞어 줴기를잡아 가마에 쪄서는 나빼고 네식구,식구한명당 하루에 한덩어리씩 소금에찍어 먹으며 살았었다.


그 두부까리빵을 한덩어리 보자기에 싸들고 병원에 오셔서는 같은병실 다른환자들 보기 부끄러우시어 차마 병실엔 들어오시지 못하시고 창문으로 배고픔에 언제 오시려나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나를 불러내시어 병원 구석에서 움켜잡고 먹는 내 모습을 보시며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그렇듯 금혁이 아빠는 우리아빠와 어머니와 맺은 정에 너무도 충실했고 그를 미워하고 밀어내기엔 미운정보다 고운정이 더 많은 사람이였다.


 잡히면 적어야 노동단련대고 아님 징역도 갈수있는 위험한길을 그를 따라 나선것도 그런 그와의 오랜 인연과 그를 따라다니며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날렵하며 정확한 판단을 할줄아는 그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위험한길인줄 아시면서도 아빠몰래 이 아들을 따라보내셨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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