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HI Sep 10. 2024

섬망

DELIRUM - 단편집 미히버스(MIHIVERSE) 수록작

인공비서의 목소리가 지배하는 도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결정을 손바닥만 한 디바이스에게 의지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서나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들. "이 옷을 살까요?", "오늘 날씨 어때요?", "지금 주식 시장은 어떻죠?" 평범했던 일상이 디지털로 완전히 녹아든 시대.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이상해졌다. 거대한 촉수를 휘두르는 문어와 같은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겁을 먹기보다 먼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 속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영상을 녹화하고, SNS에 공유했다. "이거 외계인 침공 아니야?" "근데 저게 진짜 맞아?" 겁에 질리기보다는 일종의 새로운 구경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정부는 이 괴상한 존재들이 외계 생명체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6개월 전부터 우주에서 수신되던 음성은 오늘 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24년 9월 9일 6시 지구를 말살하겠다.’


“우주적 존재에 대응할 방법은 없습니다.”


국방부 대신이 말했다.


원탁에 모인 대신들은 저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총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현 시간부로 섬망 작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신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원탁을 떠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을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서였다.


비혼이었던 농림부 대신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원탁에는 총리 한 명만 남았다.


그는 빈 의자를 망연하게 쳐다보더니,


남은 권한으로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도시는 점점 더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디바이스에 대고 물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뭘 해야 해?"


그 순간, 모든 인공비서 화면에 똑같은 문구가 떠올랐다.


"KEEP CALM AND CARRY ON."


도시 곳곳에서 인공비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집 안에서도 똑같은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진정하고, 평소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세요." 


사람들은 이내 안심하고, 평소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서울의 하늘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까마귀 형상의 코즈믹 호러가 검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똑같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저건 뭐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해?"


그리고 그들의 휴대폰에서도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진정하시고, 하던 일 계속 하세요."



작가의 말


KEEP CALM AND CARRY ON

이전 21화 설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